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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잊혀 진 기갑부대의 명장 [ 3 ]

鶴山 徐 仁 2010. 11. 16. 10:28

august 의 軍史世界

 

잊혀 진 기갑부대의 명장 [ 3 ]

 

 

 

가능성을 발견한 전장

 

비록 필요에 의해서 1년 만에 현역으로 복귀하였으나 그 동안의 공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찌정권의 견제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클라이스트는 최전선의 주력부대가 아닌 제22군단장으로 부임하여 폴란드전역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슬로바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22군단은 남부집단군에 속한 제14군의 예비였는데 예하에는 단지 제2산악사단만 편제되어 있던 전투력이 미약한 부대였습니다.

 

[ 폴란드전 개전 당시 제22군단 예하의 유일 부대였던 제2산악사단 ]

 

제22군단이 속한 상급부대인 제14군의 사령관인 리스트(Siegmund W. List)가 클라이스트와 동기였고 폴란드침공전의 핵심 군단 급 부대라 할 수 있는 제19장갑군단의 구데리안이나 제16군단의 회프너(Erich Hoepner)가 후배라는 점으로 본다면 클라이스트는 폴란드전역 개시시점에서 분명히 한직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알려진 이유는 없지만 그의 반 나찌 성향이 하나의 요인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 동기이자 상급자였던 제14군 사령관 리스트 ]

 

폴란드전역은 독일군으로서는 상당히 시험적인 무대였습니다.  비록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하고 순식간 독일이 유럽의 군사대국으로 급성장하였지만 재건한 독일군을 실전에 투입하여 본적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공갈로 주변을 겁박하여 무혈점령을 이루었지만 폴란드침공전은 제1차 대전 종전이후 처음으로 그들의 부대를 실전에 사용하는 무대였습니다.

 

[ 재군비 선언 후 수시로 그들의 군대를 자랑하였지만 실전투입은 처음이었습니다 ]

 

따라서 독일은 폴란드전에서 그동안 시험적으로 연구되고 개발한 여러 가지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핵심은 전차와 차량화보병을 집중 운용하여 공격의 중심축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는 독립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보병지원용 무기로만 인식되었는데 일부 선각자들은 전선 돌파의 주역으로 별도의 기갑부대 창설을 주장하였습니다.

 

[ 전차를 전선 돌파의 주역으로 삼고자하는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러한 주장의 대표주자들은 영국의 퓰러(John F. C. Fuller), 리델-하트(Basil H. Liddell Hart), 프랑스의 드골(Charles de Gaulle) 등을 들 수가 있는데, 막상 집중화된 기갑부대를 창설하고 전선에 데뷔시킨 것은 독일이었습니다.  폴란드전에서 독일은 7개 전차사단(Panzer Division)과 2개 차량화보병사단(Motorized Infantry Division)을 편제하였습니다.

 

[ 폴란드전역에 투입된 전쟁 초기의 독일군 기갑부대 ]

 

하지만 이때만 해도 독일군 또한 구데리안을 비롯한 소장파 장군들의 생각과 달리 대다수의 지휘부는 전통적인 전술을 옹호하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화된 기갑부대의 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창설된 전차사단을 각 군단별로 쪼개서 배치하였고 속도전의 핵심이 될 집중화된 기계화부대는 구데리안의 제19장갑군단이 유일하였을 정도로 아직까지는 실험적으로 운용하였습니다.

 

[ 비록 실험적 수준이었지만 최초로 창설 된 군단급 기계화부대를

산파역인 구데리안이 직접 지휘하여 폴란드전역에 참전합니다 ]

 

병력면에서는 폴란드를 일방적으로 압도하지는 않았지만 앞서간 전술과 무장으로 부대를 개편한 독일은 전쟁이 개시되자 폴란드를 순식간 제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실험적 성격이 농후하였던 제19장갑군단은 예상외의 놀라운 돌파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후속하여야할 보병부대가 쫓아오지 못하여 너무 앞서간 전차부대가 고립되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클라이스트는 폴란드전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목도합니다 ]

 
독일군의 신화가 되어 트레이드마크로 각인된 기갑부대도 이와 같이 처음부터 확실한 편제와 무장이 이뤄진 것이 아니었고 실전에서의 전술 또한 완벽하게 정리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폴란드전은 이론적으로만 구상하던 기갑부대의 운용 및 전술에 관한 초기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클라이스트는 여기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