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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사형수였던 장군 [ 11 ]

鶴山 徐 仁 2009. 8. 6. 10:33

august 의 軍史世界

 

사형수였던 장군 [ 11 ]

 

 

 

베를린 레이스

 

" 목표는 베를린 이다 !  조국과 인민을 짓밟은 파시스트를 처단하러 우리는 베를린으로 간다 ! "

 

1945년 1월 12일 바르샤바를 해방시킨 이후 지휘관으로 영전한 제2벨로루시전선군의 9개 야전군 예하부대와 장병들에게 로코소프스키는 감격스런 명령을 하달합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 개전이후 5,000여만의 사상자와 국토가 절단 난 소련은 드디어 원수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 소련은 4년 만에 원수의 땅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습니다 ]

 

제2벨로루시전선군은 바르샤바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최단 진격로로 독일로 들어가도록 예정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나찌 독일을 선두에서 처단하려는 로코소프스키의 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경쟁상대라면 바르샤바 점령 전까지 그의 상관이자 친구였던 주코프 원수였습니다.

 

[ 소련의 맹장들이 베를린 레이스에 동참하였습니다 ]

 

소련군 부총사령관 주코프 ( 총사령관은 스탈린 ) 는 로코소프스키가 직전까지 지휘하던 제1벨로루시전선군을 직접 지휘하여 베를린 레이스에 동참합니다.  따라서 東프러시아를 남북에서 병진하여 돌파하고 베를린으로 들어갈 소련의 주공은 소련 최고의 명장인 주코프와 로코소프스키가 담당하였던 것이고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했던 상대는 쇠르너 ( Ferdinand Schorner 1892~1973 ) 가 지휘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이었습니다.

 

[ 히틀러의 마지막 가신 쇠르너가 방어에 나섰습니다 ]

 

이 당시 중부집단군을 포함한 독일군의 대부분은 서류상에서나 존재하던 수준이었습니다.  기갑군이니 장갑군단이니 하는 단대호가 붙은 부대가 보유하고 있던 주력들은 걷다가 지쳐버린 알 보병들뿐이었고 정원과 장비를 완전히 채운 부대들은 상상에서나 존재 하였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얼마 안 돼는 독일군들은 생사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채득한 수많은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독일은 그 동안의 경험을 밑천삼아 격렬히 방어에 임하였습니다 ]

 

소련이 독일 점령을 위해 大진군을 개시하자 전력으로는 절대 열세인 독일군이 앞 다투어 방어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독일군에는 국민방위군 ( Volkssturm ) 이나 히틀러유겐트 ( Hitler Jugend ) 처럼 노인이나 어린이들도 부지기수였지만 경험 없는 이들을 전선에서 지휘하는 사람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소련에서 나찌가 저질렀던 만행을 스스로 알고 있던 독일군은 죽기 살기로 소련군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독일은 그들이 소련에서 저지른 죄과 때문에 보복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

 

독일이 아무리 수세에 몰리고 있었지만 소련군에게 독일은 항상 어려운 상대였습니다.  아마도 무조건 항복을 하기 전까지 이런 어려움은 계속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로코소프스키와 주코프는 쾌속의 진군을 하고 있었으나 독일로 진입하면서부터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었고 전투 공간 또한 독일 측의 홈 코트였기 때문에 소련에게 유리하지만도 않았습니다.

 

[ 베를린에 가까워 질수록 전진이 어려웠습니다 ]

 

거기에다가 상대적으로 북쪽으로 진군하던 로코소프스키의 제2벨로루시전선군은 기존의 중부집단군 외에도 발트해에서 후퇴하여 온 하인리히 ( Gotthard Heinrici 1886~1971 ) 가 지휘하는 비스툴라집단군 ( 舊 북부집단군 ) 잔여부대까지 합류하여 진격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에서 진격하는 주코프의 부대에 비해 진격속도가 늦어졌습니다.

 

[ 로코소프스키의 진격이 난항을 겪자 주코프가 앞서 나갔습니다 ]

 

이러한 전황을 근거로 해서 소련의 전쟁지도부는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코네프 ( Ivan Stepanovich Konev 1897~1973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으로 하여금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하고 로코소프스키에게는 東프러시아와 단찌히 ( Danzig ) 를 제압하여 독일 중부집단군을 붕괴시켜 북부 폴란드와 오데르 ( Order ) 강 입구를 점령하도록 조치합니다.

 

[ 소련은 드디어 베를린에 적기를 게양하였습니다 ]

 

하지만 이런 조치의 이면에는 적의 심장인 베를린을 정복하였다는 커다란 영광을 폴란드인에게 돌리기가 꺼렸던 러시아인들의 생각도 깊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베를린 정복의 주연은 주코프가 담당하였고 그 선봉장으로는 제8친위군 ( 舊 제62군) 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한 냉혈한 추이코프 ( Vasily Chuikov 1900~1982 ) 가 맞았습니다.

 

[ 로코소프스키와 몽고메리 ]

 

1945년 4월 시작된 베를린 전투는 메이데이에 발맞추어 독일의 항복을 받으려던 스탈린의 조바심 때문에 예상외의 출혈을 보고 1개월간의 지리 한 공방전을 펼쳐 겨우 마무리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발트해연안의 북부독일로 진격한 로코소프스키는 4월 30일 서쪽에서 독일로 진격하여 오던 영국의 몽고메리 ( Bernard Montgomery 1887~1976 )제21집단군과 엘베강에서 조우하였고 독일은 일주일도 못가 항복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