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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 워싱턴 상원의원 신호범

鶴山 徐 仁 2008. 8. 15. 22:34
미국 워싱턴 상원의원 '신호범'

“저는 어릴 적 이 땅을 비참한 심정으로 떠난 입양인입니다.역경도 많았습니다.하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꿈을 간직하십시오”
2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동아문고에서 열린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 신호범 의원(65·미국명 폴 신)의 ‘공부 도둑놈,희망의 선생님’ 출판기념회.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서러움과 그래서 죽도록 공부한 사연,입양인으로서 낯선 땅에서 겪은 고난 등 그의 인생역정은 100여명의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경기도 파주시 금촌이 고향이었던 그는 네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행방불명되자 거지생활을 전전했다.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15세 때 서울 영등포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군의관 레이 폴 박사와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폴 박사는 배움에 목마른 성실한 그에게 “아버지가 돼주고 싶다”고 말했다.지난 53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18세 한국 소년 신호범은 그후 하루 3시간만 잠을 자며 공부에 매달렸다.
양부모의 부담을 덜기 위해 접시닦이와 배달원,공사판 노동일을 하며 브리검 영 대학,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학위를,워싱턴 대학에서 동아시아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69년부터 대학교수로 일하다 92년 정계에 입문했다.워싱턴주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98년 11월에는 상원의원에 당선됐다.“나는 한국전쟁 고아 출신의 입양인으로 이제 미국에서 은혜를 받은 만큼 봉사하고 싶다”며 지지를 호소하고 선거기간중 하루 11시간씩 강행군을 하며 지역구내 2만7000가구를 모두 방문한 끝에 백인이 93%에 달하는 지역에서 승리했다.
당선된 후 그는 워싱턴주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배울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미국 50개주마다 한국 정치인이 1명씩 나오게 한다는 취지로 지난해 9월에는 한국인 2세 정치인 후원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입양인인 만큼 미국내 입양인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한국계 아들(32)과 딸(30)을 입양시켰고,KIDS(Korean Identity Development Society)를 설립해 입양인이 한글과 태권도 등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는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란 말을 한국 국민들에게 하고 싶다”며 입양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신호범 2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신호범(64·미국명 폴 신)씨가 자서전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을 출간하고 고국을 찾았다.
신 의원은 1935년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서 태어나 고아로 자라다 18세때 미국인에게 입양돼 한국을 떠난 뒤 반세기만에 금의환향한 것. 국내에선 거지와 군 하우스보이 등으로 떠돌다 53년 미국에 입양된 신 의원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이 거절되자 독학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이때 하루 3시간 이상을 자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후 대입자격을 따내 피츠버그대와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메릴랜드대와 하와이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정계에 진출, 최초의 아시아계 하원의원을 거쳐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신 의원은 “LA 흑인 폭동사건이 정계입문의 계기가 됐다”며 “미국내 한국인의 권익을 보호하려면 정계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말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비결과 관련, “작은 일에 몸과 마음을 던져 희망을 일궈가는 ‘진지함'에 있다"고 설명했다.
신 의원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미국내에서 한국인의 새로운 위치, 즉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호범 3

서울역 거지에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된 신호범
“침을 뱉으며 떠난 한국이지만,
그래도 난 한국인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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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2시. 약속된 인터뷰 시간에 맞춰 신호범씨(64·미국명 폴 신)가 묵고 있는 호텔 객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 약속이 어긋난 것은 아닌가 하는 낭패감에 젖어들 무렵 초로의 사내가 막 잠이 깬 모습으로 빼꼼히 문을 열었다. 신호범씨였다. 그는 벌써 한낮이라는 게 믿기지 않은 듯 어이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육십 평생에 처음으로 푹 잤네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잠을 아낀다는 것이다. 그 역시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지금까지 하루 5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창 공부할 때는 3시간이 고작이었고, 지금도 새벽 5시만 되면 본능처럼 눈이 떠진단다. 그런데 낮 2시가 다 되도록 꿈나라를 헤매다니….
시애틀에서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준비위원으로 지난 몇 달간 행사준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데다, 불과 이틀전 밤낮이 뒤바뀐 이곳 한국에 와서도 분주한 일정을 보낸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평생 가슴에만 꼭꼭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드러낸 데서 오는 묘한 감정이 그가 일평생 유지해온 긴장감을 풀고 편안하게 잠을 자게 했던 것은 아닐까? 신씨는 전날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담은 자전에세이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고 했다.
“난 한국에 올 때마다 꼭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엘 들릅니다. 절망스럽던 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니까요. 그곳에서 다시 나를 채찍질하곤 하죠.”
신호범씨는 4살 때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뒤이어 아버지마저 집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그는 동리 사람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제 자식도 거둬먹일 수 없을 정도로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라 밥때가 되어도 그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고, 친구집에 놀러가도 ‘밥 먹었니?’ 하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당연히 학교에 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4살 때 어머니 잃고 아버지마저 집나간 뒤 눈칫밥 먹는 천덕꾸러기로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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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살의 나이에 그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친척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지생활뿐이었다. 남대문시장을 돌며 순대 찌꺼기 같은 노점상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거나, 서울역 광장에서 구걸한 돈으로 끼니를 때웠고, 그마저도 없으면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봄을 기다렸고, 비오는 날이면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점점 지나는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의 눈초리에도 무덤덤해졌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었다.
“책보를 메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내 발길도 자꾸 학교로 향했죠. 그러다 아이들이 거지새끼라고 놀리고 때리기까지 했지만 자꾸 학교로 발걸음이 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느 해 겨울, 그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초등학교를 찾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교실 안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라 공부를 하고 있었다. 창밖에 선 채 용기를 내어 한 글자 한 글자씩 선생님을 따라 칠판에 적힌 글씨를 쓰고 입술을 움직여 따라 읽었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경찰이었다. 너무 놀란 그는 무조간 도망치기 시작했다.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그만 얼음판에 미끄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화가 잔뜩 난 경찰은 그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뭘 훔쳤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의 손엔 몽당연필 한자루와 기역, 니은이 적힌 누런 종이 한장뿐. 그걸 본 경찰은 말없이 어린 신씨를 데리고 국수집으로 데려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고 했다. 도둑공부라도 하고 싶었던 거지 소년의 마음이 경찰을 감동시킨 것이다.
신씨는 뒤늦게 아버지를 다시 만났지만 이미 아버지는 새 살림을 차리고 동생들까지 여럿 있었다. 더구나 방한칸에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사는 궁핍한 살림이라 신씨가 끼여들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집을 나와 거지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들이 들어왔다.
“미군 트럭을 쫓아다니는 재미는 대단했죠. 트럭을 향해 ‘기브 미 꺼므’ 같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소리치며 쫓아가면 미군들이 초콜릿도 던져주고, 껌도 던져주고….”
그날도 미군트럭을 쫓아가는데 미군이 웃으며 신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생각없이 그 손을 덥석 잡고 트럭에 올랐다. 때가 꼬질꼬질한 옷과 얼굴이 한눈에도 그가 고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미군들은 그를 데려가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하였다.
그는 미군 장교들의 심부름꾼으로 일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숫물을 받아오고, 식사를 나르고, 빨래를 하고, 군복을 다리고, 하루종일 잔심부름을 했다. 남보다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하다고 해서 미군들로부터 ‘벅숏(총알)’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하우스보이 생활은 더 이상 끼니걱정과 추운 겨울에 얼어죽을 걱정을 안해도 되고, 더구나 월급까지 주어서 거지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은 적도 많았고, 미군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물론 도둑이나 살인누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폴 대위를 만났다. 군종관으로 있던 그에게서 점점 인간적인 신뢰를 느낀 신씨는 폴 대위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 무더운 여름날 찬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3m 깊이나 되게 땅을 파고 그 속에 물통을 넣었다. 그러면 땅의 차가운 기운으로 물이 조금이라도 더 시원해질 것 같아서였다.
폴 대위도 그를 신뢰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폴 대위가 그에게 물었다. 너를 양자로 삼고 싶은데 나를 따라 미국으로 갈 수 있겠냐고. 부산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며 그는 한국땅을 향해 침을 뱉었다. 가난과 배고픔과 절망뿐이었던 이 땅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의 나이 18살이었다.
막상 미국에 갔지만 미국은 쉽게 새로운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18살이란 나이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였다. 양어머니와 가족들도 그를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더구나 공부가 하고 싶어 미국으로 왔는데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그를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18살에 미국서 시작한 검정고시 공부,
수없이 코피 흘려가며 1년 반 만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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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갔어요. 그런데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는 거예요. 중학교 역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죠. 마지막으로 고등학교엘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이번엔 중학교를 안 나와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죠.”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까지 왔는데 자신을 받아줄 수 없다는 말에 그는 절망과 깊은 좌절을 느껴야 했다. 그가 울며 불며 매달리자 교장선생이 정말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교장선생은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그걸 해보라며 권유했다. 원한다면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견한 그 길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새벽 7시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 빈 수업시간을 이용해 영어를 배웠고, 오후엔 양부모님에게 생활비 부담을 주기 싫어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시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양아버지로부터 수학과 물리 등을 배웠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복습을 하고, 다시 5시에 일어나 예습을 했다.
처음부터 영어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게다가 영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영한사전을 찾아보아도 한글을 제대로 모르는 그가 사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었다.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무작정 파고들었다. 심지어 영어사전을 태워 재로 만든 후 물에 섞어 마시면 기억이 잘 될까 싶어 그렇게 해보기도 했다.
입술이 부르터 피가 나고, 하루에도 수없이 코피가 터졌다. 손수건으로는 부족해 항상 휴지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나중에는 얼굴까지 터져 피가 흘렀다. 말 그대로 피터지게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1년 반 만에 검정고시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미국이 그에게 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허락한 것이다.
한국에선 초등학교도 못 가본 그였지만 마침내 미국 학생들은 물론 한국유학생까지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더 나아가 15년 동안 워싱턴주지사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92년엔 워싱턴주 하원의원으로, 지금은 워싱턴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미국 주류사회에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그는 역시 한국인이었다.
“입양아들은 물론 이민 2세, 3세들도 내적인 갈등이 심해요. 아무리 미국인이 되려고 노력해도 그 사회에 편입이 안되니까요. 그래서 사춘기가 되면 누구나 갈등하죠.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입양아들이 생겨나고 범죄에 빠져드는 2세들이 늘어났다. 신호범씨 역시 그런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미군으로 국방의 의무를 할 때에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그는 항상 반쪽 미국인이었다.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자신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잃어버린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 교수와 친해져서 그에게 3년 동안 한국의 말과 역사를 배우고, 대신 그의 집 정원 잔디를 깎아주는 일을 했다.
그는 그 자신이 입양아이듯이 아이들도 백인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입양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 입양아들과 그들의 양부모들을 위한 단체를 조직해 입양아들이 미국 속의 한국인으로 바로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던 신씨가 입양아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국아이를 입양한 한 미국인이 저에게 편지를 했어요. 자신들은 정말 잘 해주고 있는데도 아이가 방황하고 있다며 절더러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갔죠.”
처음엔 아이가 농구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아이도 백인들만 있는 마을에 얼굴 모양이 같은 동양인이 나타나니까 관심을 보였다. 둘은 금세 친해졌다. 신씨는 아이에게 자신도 입양아 출신이라며 힘들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꺼냈다.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양부모님은 다른 백인 아들이 잘못하면 때리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안 때린다는 거예요. 그건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손님으로 생각하는 증거라고. 자기는 정말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잠시 말이 끊겼다. 그 눈물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혼자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입양아들의 고뇌와 고통이 그의 눈물 속에 묻어 있다는 것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몇년전 한국에서 해외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어요. 그래서 해외입양이 금지되기도 했죠. 하지만 혈통을 중시하는 관습 때문에 입양을 안 하는 거예요. 고아들이 늘어나자 다시 해외입양을 재개했죠. 분명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알았으면 해요.”
침을 뱉으며 떠난 한국, 그래도 한국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한국인의 권리향상과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신호범씨의 마지막 말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건드렸다.

출처 : 한국을 빛낸 해외동포 - _-!! By.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