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스크랩] 500장 이상의 사진으로 보는 수원 화성의 모든 것...2. 서장대에서 팔달문까지...

鶴山 徐 仁 2007. 6. 14. 10:24

500장 이상의 사진으로 보는 수원 화성의 모든 것...

 

2. 서장대에서 팔달문까지...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서장대.

팔달산 정상은 120여미터 밖에 되지 않는 높이이지만 주변이 낮은 평야지대라서

화성의 지휘본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지리(地利)를 점하고 있다. 

 

 

 

11. 서암문(西暗門)

 

암문은 성의 외부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하도록 만든 비밀통로와도 같은 출입구이다.

서암문은 서장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효원의 종각 

 

종루는 정조의 효성을 기리며 수원 시민의 성의를 모아 만든 '효원의 종'을 설치한 곳이다.  

 

12. 서포루(西鋪樓) 

 

서포루는 서장대로 올라오는 길에도 있었다.

砲樓와 鋪樓에 대해서 서북포루와 북포루를 설명할 때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논리로 보면 이곳의 표지판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西鋪樓가 분명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 목조부분의 모양이 북포(鋪)루와 같은 개념이다.

砲樓의 폐쇄적이고 벽돌로 꼭꼭 둘러 싼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포루에서 포혈을 통해서 본 서장대... 

 

서포루에서 본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서포루 안에서... 

 

 

 

 

 

서삼치쯤에서 서쪽으로...숲 있는 곳이 서울대 농대가 있던 곳이다. 

 

 

13. 서삼치(西三雉)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서 공격하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좋게

만든 시설이다. 치에는 일반적으로 누각은 없이 여장만 설치되어 있다. 

 

 

 

14. 서남암문과 포사 

 

서남암문은 다른 암문과는 달리 암문위에 건물을 지었다. 이를 포사라고 한다.

이 서남암문을 지나 170미터 쯤 가면 화성의 남쪽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서남각루에 이른다.

 

 

 

 

 

 

 

서남이치(西南二雉) 

 

 

15.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양루 華陽樓)

 

서남각루는 화성의 4개의 각루 중 방화수류정과 함께 별칭이 붙은 두 개의 각루중 하나이다.

화양루라고 현판에 쓰여 있으며 화성의 남쪽 방항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서남암문에서 약 170미터 떨어져 있다.

아래의 표지판 중 한글 설명 끝부분에 서남암문이 빠진 것이 눈에 거슬린다.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에 이르는 이 길을 용도라고 한다. 

 

 

14.서남암문 

 

 

 

팔달문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16.남포루(南砲樓)

 

팔달문에 이르기 전 중턱부분에 남포루가 있는데 화성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근접촬영을 하지 못했다. 

대신 맞은편의 동남각루에서 찍은 희끄므레한 남포루의 사진을 올린다.

 

 

 

팔달산을 내려와서 남포루 쪽을 올려다 보며 찍은 사진이다... 

 

17. 팔달문(八達門)

 

화성의 남대문인 팔달문이다. 

사통팔달을 아시는가? 원래는 길이 사방 팔방으로 뚫려서 문물이 자유자재로 유통되고

사상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모르긴 하지만 조선 중흥의 왕 정조는 당시 급격히 성장하던 신시대의 학문, 실사구시의

학문이었던 실학을 기존의 성리학을 대신하여 국부를 실현하고 민생을 향상시킬 새로운

사조로 받아들였음직하다. 다산등 많은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화성의 축성 책임을 맡긴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폐쇄적이고 소모적인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당쟁. 거기에서 해방되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의 시작이 바로 사상과 문물의 사통팔달이 아니었을까?

 

한양의 4대문의 이름이 유가의 기본인 인의예(仁義禮)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화성의 남북대문이

이름이 의식의 사통팔달, 문물의 사통팔달과 백성을 오래 평안하게 하라는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진 것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주의이자 통치의 이념이 아니었을까?

 

이 시대의 정치가들이 챙겨야 함에도 정략에 사로잡혀 소홀히 하는 민생의 문제를 200여년 전에

이미 꿰뚫고 있었을 정조임금에 대한 경모의 마음이 이는 것을 숨길 수 없다.

 

 

팔달문에대한 일반사항은 다음백과사전에서 빌려 싣는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에 있는 조선 후기 화성(華城)의 성문.

보물 제402호. 사적 제3호인 화성은 1796년(정조 20)에 완공되었는데, 이 문은 화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남문이다.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虹霓門)을 내고, 그 위에 여장(女墻)을 돌린 다음 2층 누각(樓閣)을 세웠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아래층과 위층의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이며, 쇠서의 끝이 강하게 위로 솟아 있고 살미첨차의 끝이 장식화되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성문의 좌우에는 적대(敵臺)를 설치하여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했으나 도로 개설 때 성벽이 헐리어 현재는 없어졌다. 바깥쪽에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축조했는데 윗부분의 중앙부에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用道)를 내었고, 양 옆면에 총안(銃眼)과 현안(縣眼)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남쪽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五星池)를 만들었으며 안쪽으로 앞면·옆면이 각각 1칸인 누각을 세웠다. 이 성문은 북문인 장안문(長安門)과 형태가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었다. 또한 화성의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당시 팔달문의 규모와 여기에 사용한 목재·석재·기와·전돌의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고,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계속됩니다.

출처 : 옛정자 그늘...
글쓴이 : 파빌리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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