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문득 산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리운 산을 찾아서 나그네 길을 떠나곤 한다. 산에 들면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준다. 그런 산이 내게는 고향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산으로 난 길을 걸으면서 숲속의 친구들과 마음으로 통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나 자신과의 대화를 하기도 한다. 산의 품에 안겨 산과 하나가 되면 나를 끄달리게 하던 것들이 어느덧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마음 한 자락이 텅 비면서 고요한 안식이 찾아온다. 이렇듯 산은 나에게 있어 마음자리를 닦는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에 들면 나는 행복하다.
오늘은 전남 장흥군(長興郡)에 있는 천관산(天冠山, 723m)이 보고 싶어 차를 몰아서 남쪽으로 향한다. 네다섯 시간을 달린 끝에 장흥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다 된 한밤중이다.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둔 회진면(會鎭面) 회진포구의 '회진횟집'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손님도 없는데 나 한 사람을 위해 기다려준 횟집 주인아주머니가 고맙기 한량없다. 2층으로 올라가 포구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 도다리를 뼈채 치는 회(세꼬시회)와 복분자술을 주문한다. 창밖을 내다보니 회진포구는 어둠속에 잠겨 있다. 보름달이라도 떴으면 좋으련만..... 그믐을 하루 앞둔 스무여드렛날이라 오늘은 애시당초 달구경하기는 틀렸다. 사방의 벽에는 횟집 주인이 쓴 시화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시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나그네의 회포를 달래본다. 소설가 한승원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도 바로 이 회진면 신상리 포구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득량만과 천관산을 바라보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소설가 송기숙과 이청준, 시인 이성관도 장흥출신의 문인들이다.
장흥은 나의 본관인지라 전부터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리는 곳이었다. 나의 조상들이 한때 이곳에 살았다는 인연 때문일까?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나의 조상은 중국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충간하다가 참형을 당한 주왕의 숙부 비간(比干)이다. 비간이 참형을 당하자 그의 아들 견(堅)은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하면서 성을 임씨(林氏)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이 분이 한국의 여덟 개파에 이르는 임씨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한국의 임씨는 신라 초기에 이미 아찬(阿飡) 임권(林權), 경덕왕(景德王) 때에 각간(角干) 임종(林宗) 등의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성씨임을 알 수 있다.
임씨 중 장흥으로의 분적(分籍)은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임언수(林彦修)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셋째 아들 개성판윤(開城判尹) 관산군(冠山君) 임제미(林齊味)의 증손인 임분(林賁)이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지고, 그의 묘소 역시 장흥에 자리잡으면서 장흥 임씨라는 본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파시조로부터 8대 자손인 상주목사(行尙州牧使) 임우소(林雨所)의 일족이 경북 상주로 옮겨간 후, 그 후손들은 문경(聞慶)의 영순(永順)이나 예천(醴泉)의 율현(栗縣) 등지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이들은 예천 임씨라는 또 하나의 파를 이루었다. 나의 조부는 경북 예천에서 거주하다가 예천에서 돌아가셨고, 부친은 예천에서 충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은 조상들이 살았던 고장 장흥에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은 역사적인 날이다.
*천관산 지도
예로부터 정주(定州) 또는 관산(冠山)이라 불리우던 장흥은 남해에 접해 있어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유서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건마국(乾馬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마차현(馬次縣)이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경덕왕 16년)에는 오아현(烏兒縣)으로 바뀌어 보성군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정안현(定安縣)으로 개명되었고, 11세기초 현종대에 장흥부로 승격되었다. 1265년(원종 6년)에는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년)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조선 초 1392년(태조 1년)에는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아 장흥의 중심지로 삼았으며, 1413년(태종 13년)에는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에 나주부 장흥군, 1896년에 전라남도 장흥군이 되었다. 1940년에 장흥면이, 1980년에 관산면과 대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장흥은 장흥읍과 관산읍, 대덕읍을 비롯해서 용산면, 안량면, 장동면, 장평면, 유치면, 부산면, 회진면 등 3개읍 7개면 135개 동리가 있다.
장흥은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북쪽은 화순군, 동쪽은 보성군과 고흥군, 서쪽은 강진군과 영암군, 남쪽은 다도해의 완도군과 접하고 있다. 북부는 비교적 산악지대를 이루며, 남부는 해안지대로 비옥한 해안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북쪽에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지산파의 중심사찰이었던 보림사(寶林寺)가 있는 유치면의 가지산(迦智山, 510m)과 삼계봉(三界峰, 503.9m), 장평면의 봉미산(鳳尾山, 506m)이 있으며, 중앙에는 장흥읍의 억불산(億佛山, 518m)과 광춘산(廣春山, 387.4m), 유치면의 용두산(龍頭山, 551m) 등이 있다. 동쪽에는 장동면의 금성산(錦城山, 401m)과 철쭉으로 유명한 제암산(帝巖山, 807m), 안량면의 골치산(骨峙山, 664m), 사자산(獅子山, 666m) 등이 있고, 서쪽에는 유치면의 국사봉(國師峰, 613m)과 용산면의 부용산(芙蓉山, 609m), 장흥읍의 수인산(修仁山, 561m) 등이 있는데,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거쳐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은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한국의 100대 명산이자 호남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관산읍의 천관산과 양암봉(陽巖峰, 465m), 대덕읍의 부곡산(富谷山, 423m), 천태산(天台山, 549m) 등이 있다.
장흥을 흐르는 대표적인 하천은 영산강, 섬진강과 더불어 호남의 3대 강 중의 하나인 탐진강(耽津江)이다.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弓城山, 484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군 유치면에서 유치천(有治川)과 제비내, 부산면에서 부산천(夫山川)과 합쳐져서 장흥읍의 중앙을 통과한 뒤 송암리에서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강진군의 군동면, 강진읍을 차례로 지나 도암만(道巖灣)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약 56㎞에 이르는데, 곡류가 심하고 급경사를 이루는 곳이 많다. 일명 납양강(納陽江)이라고도 한다. 유역에는 용반평야와 부산평야, 장흥평야, 강진평야가 발달해 있다. 탐진강이란 이름은 신라 문무왕 때 탐라국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인 고후(高厚)와 고청(高淸) 형제가 내조할 때 구십포(九十浦)에 상륙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즉 탐라국의 ‘탐(耽)’자와 강진의 ‘진(津)’자를 합해서 탐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장평면의 서부를 남동류하는 보성강은 장평면 봉동리 일대에서 갈라져 다시 장동면의 북부를 가로질러 동류하다가 보성군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자산에서 발원하는 월계천(月溪川)과 억불산에서 발원하는 수대천(水大川)이 합류한 홍거천은 안량면의 서부를 남류하다가 득량만으로,성산천과 농안천, 부평천 등 세 하천이 합류해서 된 고읍천(古邑川)은 관산읍의 북부를 가로질러 동류하다가 득량만으로 흘러든다.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용산면 남포리 정남진(正南津)을 휘감고 흐르는 남상천(南上川)도 득량만으로 흘러든다. 대덕읍의 중앙을 가로질러 남류하다가 남해로 흘러드는 대덕천 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장흥에는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산재해 있다. 천관산과 억불산 주변에는 수백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며, 특히 관산읍 방촌리에는 한곳에만 백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 지어 있다. 또 장흥읍 건산리에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도 있다. 산성으로는 회진면 회진리의 장흥회령진성(長興會寧鎭城, 전남기념물 제144호)과 유치면 대리의 장흥수인산성(長興修仁山城, 전남기념물 제59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유치면 봉덕리의 보림사 경내에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寶林寺三層石塔─石燈, 국보 제44호)과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보림사동부도(寶林寺東浮屠, 보물 제155호),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6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호),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보물 제158호), 보림사사천왕문(寶林寺四天王門, 전남유형문화재 제85호) 등이 있다. 인도와 중국에도 보림사가 있는데, 이 세 절을 합칭해서 삼보림(三寶林)이라고 한다. 관산읍 농안리의 천관사에는 천관사오층석탑(天冠寺五層石塔, 전남유형문화재 제135호)과 천관사석등(天冠寺石燈, 전남유형문화재 제134호), 천관사삼층석탑(天冠寺三層石塔, 보물 제795호)이 있고, 대덕읍 연지리의 장흥탑산사지석등(전남문화재자료 제196호), 장동면 북교리의 용화사약사여래좌상(龍華寺藥師如來坐像, 전남유형문화재 제46호), 안량면 기산리의 미륵사석불(彌勒寺石佛, 전남문화재자료 제171호), 장평면 용강리의 고산사석불입상(전남유형문화재 제161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장흥읍 교촌리의 장흥향교(長興鄕校, 전남유형문화재 제107호), 원도리의 장흥연곡서원(長興淵谷書院, 전남기념물 제18호), 유치면 늑룡리의 강성서원(江城書院, 전남문화재자료 제70호) 등이 있다. 또 조선시대 후기 호남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공부했다고 하는 관산면 옥당리의 장흥장천재(長興長川齋, 전남유형문화재 제72호), 안유(安裕)와 조선시대의 여섯 공신, 그리고 안중근(安重根)을 모신 장동면 만년리의 만수사(萬壽祠, 전남문화재자료 제71호), 용산면 어산리의 영석재(永錫齋, 전남문화재자료 제69호), 용산면 모산리의 월산재(月山齋, 전남문화재자료 제73호), 장동면 반산리의 이순신(李舜臣) 등을 모신 반계사(盤谿祠)와 반계사유물일괄(전남유형문화재 제164호) 등이 있다.
그밖에 조선시대 도요지인 용산면 월송리의 장흥이씨백자도요지(長興李氏白磁陶窯地, 전남기념물 제30호), 장흥읍 송암리의 장흥사인정(長興舍人亭, 전남유형문화재 제55호), 장동면 만년리의 동백정(冬柏亭, 전남문화재자료 제169호), 부산면 부춘리의 부춘정(富春亭)과 부춘정원림(富春亭園林, 전남기념물 제67호), 용반리의 용호정원림(龍湖亭園林, 전남기념물 제68호)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용산면 어산리의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268호), 관산읍 옥당리의 효자송(孝子松, 천연기념물 제356호)이 있으며, 무형문화재로는 안량면 모령리의 한형준(韓亨俊)이 제와장(製瓦匠,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으로 지정되어 있다.
장흥은 대부분 구릉지대와 평야지대로 논농사 위주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콩, 감자, 고구마, 참깨, 땅콩 등이고, 특산물은 인삼, 잎담배, 양송이, 표고버섯, 유채 등이다. 장흥읍 행원리 잣두들에서는 잔털이 없고 달고 연한 잣두무가 생산된다. 건산리에서 생산되던 건산모시는 인조섬유의 보급으로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으며, 부산면 유양리의 장흥유기(長興鍮器)와 호계리의 호계죽석(虎溪竹席)도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장흥의 연근해에서는 조개류와 김양식, 굴양식이 활발하다. 특히 장흥김은 완도김에 못지 않게 맛과 향이 뛰어나다. 연안의 바다에는 전어와 멸치, 숭어, 장어 등 각종 어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탐진강의 은어는 여름철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장흥은 목포와 부산간의 국도가 통과하는 한편 보성, 강진, 나주, 영암 등을 연결하는 국도와 지방도도 잘 발달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해상교통 또한 발달하여 회진면 회진항은 완도군 생일도(生日島)와 조약도(助藥島), 장흥군의 노력도(老力島)를 연결한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지산과 보림사, 뛰어난 산세와 가을 억새가 장관인 천관산과 천관사, 철쭉이 유명한 제암산 등의 명산과 사찰은 장흥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안량면 수문리에는 1km에 이르는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수문포 해수욕장이 있다. 최근 장흥군은 강릉시 강동면의 정동진(正東津)이 서울의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라는 유래를 가진 것에 착안하여,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있는 관산읍 신동리를 정남진(正南津)으로 명명하고 이미지 브랜드화하고 있다. 정남진은 한반도 최북단의 정북진(正北鎭)인 평북 자성군의 중강진과 일직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정서진(正西津)은 어디일까?
장흥은 예로부터 민중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위대기(魏大器)와 선세신(宣世臣) 등이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관산과 대덕 출신의 의병장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철종 때는 부패한 지방관들을 척살하기 위해 고제환(高濟煥)과 정방현(鄭邦賢) 등의 주동으로 관아를 습격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동학혁명 최후의 격전이 벌어진 곳도 장흥의 석대뜰이다. 장흥출신의 접주 이방언(李芳彦)이 이끄는 동학군은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호남지방의 동학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된다. 1908년에는 심남일(沈南一)이 지휘하는 의병군은 유치면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밤 12시가 넘어서 회진횟집을 나왔다. 횟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회진면에는 민박집이나 모텔에 방이 하나도 없단다. 할 수 없이 관산읍으로 나가 옥당리에 있는 '로얄장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새벽 2 시가 다 되어서 비몽사몽간에 잠자리에 든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이튿날 아침해가 중천에 떠 있다. 천관산은 산행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는 산이 아니라서 마음은 느긋하다. 근처 '전통식당'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고장이라서 그런지 밥상에는 각종 해산물로 만든 반찬이 여러 가지 올라와 있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도 깔끔한 편이다.
*관산읍에서 바라본 천관산
아침식사를 마치고 천관산으로 향한다. 관산읍에서는 천관산 주능선과 계곡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오늘은 관산읍 탑동 들머리에서 시작해서 봉황봉과 장천재 삼거리-장천재-금수굴과 선인봉 삼거리-선인봉-종봉-노승봉-대세봉-문수보현봉-천주봉-대장봉-환희대-연대봉-봉황봉-장안사로 해서 탑동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할 생각이다.
백두산(白頭山)에서 뻗어내린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개마고원, 금강산을 지나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전북 장수군의 영취산(靈鷲山, 1,075.6m)까지 내려온 다음 서쪽으로 65km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분기한다. 금남호남정맥은 영취산에서 장안산(長安山, 1,237m), 수분현(水分峴, 530m), 팔공산(八公山, 1,151m), 성수산(聖壽山, 1,059m), 마이산(馬耳山, 667m), 부귀산(富貴山, 806m)을 지나 전북 무주군의 주화산(珠華山, 565m)에 이르러 다시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갈라진다. 호남정맥은 주화산에서 남서쪽으로 내장산(內藏山, 763.2m)에 이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무등산(無等山, 1186.8m)을 거쳐 장흥땅으로 들어와 제암산(帝巖山, 807m)을 지나 사자산(獅子山, 666m)까지 치달려 내려온다. 사자산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튼 호남정맥은 보성의 일림산을 지나 순천의 조계산(曹溪山, 884.3m)과 광양의 백운산(白雲山, 1217.8m)을 거쳐 섬진강과 광양만이 만나는 외망포구에서 462km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다.
호남정맥의 사자산에서 하나의 지맥이 서쪽으로 가지를 치는데, 이 산맥이 일명 탐진지맥이다. 탐진지맥은 사자산에서 갈라져 억불산과 광춘산, 괴바위산(463m), 부용산, 양암봉, 천태산, 부곡산, 공성산, 오성산(五聖山, 218m)을 거쳐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에서 남해바다속으로 산꼬리를 감춘다.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강진군 칠량면의 경계를 이루는 양암봉에서 가지를 친 지능선 하나가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는데, 이 지능선상에 바로 천관산이 있다. 그러니까 천관산은 백두대간 호남정맥 탐진지맥 천관지능선에 솟아 있는 산이다.
천관산은 지리산과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다. 관산읍과 대덕읍 경계에 있는 천관산은 산의 형상이 탑묘와 같다고 해서 지제산(支提山), 또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서 천풍산(天風山), 가끔 정상에서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하여 신산(神山)이라고도 한다. 천관산은 장천재 계곡을 비롯한 깊은 계곡들과 장쾌하게 뻗어가는 능선들, 그리고 대세봉(大勢峰) 일대의 기암첨봉들이 웅장하고 장엄한 경치를 연출한다. 이들 기암괴석과 첨봉들은 멀리서 보면 마치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과 흡사하게 보이는데, 여기서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천관산은 남동쪽의 여성적인 부드러운 산세와 북서쪽의 남성적인 씩씩한 산세가 잘 조화되어 있다.
산세가 웅장하고 기암첨봉이 즐비하게 솟아 있는 천관산은 가히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할 만하다. 위백규는 이 산 하나만을 가지고 '지제지(支提誌)'라는 지리서를 썼을 정도로 천관산은 경치가 아름답고 유서깊은 산이다. 이 책에는 '화엄경에 천관보살이 그 권속과 함께 천관산에 상주하면서 설법한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이 산에는 신라시대 김유신(金庾信)이 젊은 시절에 사랑을 나누었던 천관녀(天官女)가 숨어서 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그렇다면 천관녀는 김유신을 시험에 들게했던 천관보살이었다는 말인가? 고려시대에는 천관산 기슭에 보현사(普賢寺), 화엄사(華嚴寺), 천관사, 탑산사 등의 사찰과 수정암(修定庵) 등의 암자가 89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천관사 외에는 절터와 몇 개의 석탑, 석불만이 남아 있다.
천관산은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계곡의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고 깨끗한 계류가 흐른다. 가을에는 단풍이 능선과 계곡을 아름답게 수놓고,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주능선에는 수십만평에 이르는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겨울에는 푸르른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국적인 경치를 연출한다. 천관산 자연휴양림에 있는 동백림과 비자림도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등산로 입구
*춘백꽃
등산로 초입의 숲터널을 이룬 나무들은 이제 막 연두색 새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연두색은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여린 색이다. 또 연두색에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이 담뿍 담겨 있다. 그래서 봄에 갓 돋아난 연두색의 새잎은 이상하게도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을 막론하고 갓 태어난 새끼나 새싹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맹수조차도 어린 새끼 때에는 그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흐르는 세월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늘 청청한 푸르름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숲길을 걸어가노라니 내 몸과 마음도 어느덧 연두색으로 물들어 오는 듯하다.
붉은색으로 활짝 피어난 춘백꽃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한 따스한 봄을 마음껏 구가하고 있는 듯하다. 바야흐로 봄은 사랑의 계절인 동시에 탄생의 계절이다. 동물들은 짝짓기를 통해서 새끼를 낳고, 나무나 풀들은 새싹을 틔운다. 내 가슴에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생동하는 봄의 기운으로 가득찬다.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픈 이 주체할 수 없는 춘정을 어찌하리오! 봄은 이처럼 만물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신비한 마력을 가졌다.
*덕암 위석규 선생 의열비
*봉황봉과 장천재 삼거리의 수양매화
천관산관광농원 입구에는 자연석에 '湖南第一支提靈山(호남제일지제영산)'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이것으로 천관산의 옛이름이 지제산임을 알 수 있겠다. 조금 더 올라가면 덕암 위석규(德庵魏錫珪, 1878∼1913)의 유허지가 나온다. 유허지에는 '德庵魏錫珪先生義烈碑(덕암위석규선생의열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89년에 '덕암위석규선생의열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운 의열비의 비문은 이숭령이 짓고 글씨는 이돈흥이 썼다. 추진위원회는 또 '덕암의열록'도 간행했는데, 이 책에는 비문과 함께 의열추모시록이 실려 있으며, 부록에 의리장명(衣履藏銘)과 기몽(記夢), 유서(遺書), 서간문 등이 있다. 의열비에 새겨져 있는 위석규의 어록을 보면 독립을 위한 그의 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짐승(倭)이 사람의 영토를 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吾國(오국)이 盜獸(도수)들의 擄掠(노략)으로 國家(국가)가 存亡之秋(존망지추)에 다달아 백성이 盡滅(진멸)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踊躍奮鬪(용약분투) 萬死一生(만사일생)의 각오로 이 領土(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大義(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私慾(사욕)을 취하면 禽獸(금수)라. 항차 이런 일임에랴! 古今(고금)을 莫論(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國家社稷(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義憤慷慨(의분강개)하여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이다.-1906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독립운동가 위석규의 호는 덕암이고 자는 여장(汝章)이다. 그는 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청나라 원세개의 원조를 받아 일제를 몰아내려 하였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를 거점으로 박태문과 강명운, 국사성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3년 4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문집에 '덕암유고(德庵遺稿)'가 있다.
봉황봉과 장천재 삼거리에 이르니 수양홍매의 선혈처럼 붉은 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수양매는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진다고 해서 능수매라고도 부른다. 설중홍매(雪中紅梅)라는 말이 있듯이 홍매는 처녀의 순결처럼 매운 꽃이다. 어쩌면 꽃이 핏빛을 머금은 듯 저리도 붉을까! 이곳에는 육각지붕의 영월정(迎月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달맞이를 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왼쪽 길은 봉황봉, 오른쪽 길은 장천재로 가는 길이다.
계곡에 가로놓인 장천교를 건너면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장천교로부터 장천재(長川齋)까지 약 백미터에 이르는 계곡은 위백규가 장천팔경이라 명명한 장천동이다. 장천팔경에는 청풍담(淸風潭), 백설뢰(白雪瀨), 도화량(桃花梁), 세이담(洗耳潭), 명봉대(鳴鳳臺), 추월담(秋月潭), 청령뢰(淸靈瀨), 와룡홍(臥龍弘) 등이 있다. 퐁호정(風乎亭)으로 가는 길에 붉은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는 동백림이 나타난다.
*풍호정
동백림에서 작은 봉우리의 동쪽으로 산허리를 돌아간 곳에 풍호정(風乎亭)이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이 정자는 최근에 세운 듯 하다. 경북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에도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18대손인 풍호(風乎) 신지가 15세기경에 세운 같은 이름의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가 풍호 신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풍호정의 전망은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산읍과 들판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장천재의 소나무 보호수
*장천재
풍호정에서 도로 나와 동백림 사이로 난 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장천재를 만난다. 장천재 앞 계곡에는 기암괴석 사이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장천재 바로 앞에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8백5십년이나 묵은 아름드리 '태고송(太古松)'이 서 있다. 장흥군의 보호수인 이 태고송은 큰 가지 하나를 계곡을 향해서 늘어뜨리고 있고, 그 아래 계곡에는 목도화교(木桃花橋)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다리가 놓여져 있다.
장천재는 여덟 계단의 석재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ㄷ자형의 구조로 지은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세칸은 온돌방이고, 정면 양칸의 앞뒤는 누마루 형식으로 난간을 설치하여 돌출되어 있으며,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양쪽 누마루 지붕의 앞면은 팔작지붕이지만, 옆면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어 다소 특이한 느낌을 준다. 벽면 곳곳에 빼곡하게 걸려 있는 한문으로 쓴 편액들에는 세월의 두께가 덕지덕지 앉아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장천암(長川庵)을 헐고, 장흥위씨(長興魏氏) 문중에서 조선초인 1450년경에 한학을 위한 강학소로 장천재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70년경에 중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위백규를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장흥부 계춘동(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난 위백규는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들을 읽고 학문에 뜻을 세운 뒤, 고향의 장천재에서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1751년부터 1766년까지 그는 이이(李珥)로부터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에 이르는 학통을 이어받은 노론계의 윤봉구(尹鳳九)를 스승으로 삼아 충청도의 덕산을 오르내리며 경서와 의례,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 등 성리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덕산에 머문 기간은 얼마 안 되며, 대부분은 장천재에서 경전과 과거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때 그는 '의례문답(疑禮問答)', '대학차의(大學箚義)', '고금(古琴)' 등을 저술하고 '정현신보(政鉉新譜)'와 '환영지' 등의 초고를 썼다.
위백규는 1757년에 스승에게 '시폐십조(時弊十條)'를 지어 올렸다. 1781년(정조 5년)에 모친상을 당하자 그는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사성록'(思成錄, 1781) 전후편과 정조의 요청으로 백성의 실상과 그 해결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奉事, 1786)를 저술하였다. 이어서 '환영지'(1787)와 '거병서'(去病書, 1789), '정현신보'(1791), '사서차의'(四書箚義, 1791), '격물설'(格物說, 1791) 등도 완성했다. 그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뒤 1794년(정조 18년)에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저술활동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68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機張)과 태인 그리고 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지냈다.
위백규의 학문적 성격은 그의 저술에 담겨 있는 강한 현실 비판의식으로 볼 때 경세적 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학자적인 풍모가 잘 나타나 있는 저술은 '정현신보'로, 당시의 사회상황과 현실의 모순에 대해 매우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주장에서 주목되는 점은 향촌사회 개혁론이다. 그는 지방교육의 혁신을 통해서 향촌 질서의 유지와 교화, 관리의 선발, 지방관리의 경제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지방관들의 부정부패와 그 결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방관들의 선도책과 관제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부세론 등을 제시하였으며, 견고한 향촌의 방위체제를 갖출 것도 주장하였다.
향촌사회의 개혁을 위한 방법론으로 위백규는 향촌의 자율성과 공의(公議)의 구현을 제시하였다. 그는 향촌의 지식인들이 향촌의 자율성과 공의 구현의 주도층이 되어 지배층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가하는 한편, 피지배층에 대한 보호와 원조라는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현재 실시되고 있는 지방자치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개혁성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는 중앙정부와 지방관들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 그 결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참상 등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조선왕조라는 봉건적 사회체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였다. 따라서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봉건체제인 조선왕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단순히 교육과 지식인을 통해서 향촌사회를 개선하려고 한 점은 너무 이상적이고 안이한 발상이었다. 그 자신이 봉건 지배층의 일원이 되고자 열망했던 지식인이었기에 그런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위백규의 문학관은 재도론(載道論)에 입각해 있음이 발견된다. 그는 현실비판적 문학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자신도 그런 류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보리' 연작시와 '연년행(年年行)' 연작, 구황식물연작 등의 한시, '농가구장(農家九章)'의 시조 9수, 가사 '자회가(自懷歌)' 등은 모두 농촌사회의 현실이 반영된 시들이다. 그의 문집에는 '존재집(存齋集)'이 있으며, 그의 글을 총망라해서 모아놓은 '존재전서(存齋全書)'가 있다.
*각시붓꽃
장천재를 지나면 금수굴과 선인봉 삼거리가 있는 체육공원이 나온다. 갈림길 모퉁이에는 꽤 오래 묵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곧바로 올라가면 금수굴, 오른쪽으로 돌면 선인봉으로 가는 길이다. 금수굴(金水窟)은 선인봉 능선과 봉황봉 능선의 한가운데로 뻗어내린 능선상의 금수봉 중턱에 있는 작은 석굴이다. 정동쪽을 향하고 있는 굴의 입구는 작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제법 넓은 굴에 물이 흐르고 있다. 굴안에는 언제나 금가루가 떠 있는 것처럼 금색을 띤 물이 고여 있다고 해서 금수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특히 햇볕이 비치면 물이 찬란한 황금색으로 변하여 신비함을 더해준다고 한다.
금수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이 굴의 물은 아침 열시경부터 맑았던 물에서 노란 물줄기가 솟아나기 시작하여 정오가 되면 황금빛으로 변했다가 정오가 지나면 다시 맑은 물로 돌아왔다. 또 오후 두시에도 황금빛으로 변했다가 오후 네시에 다시 맑은 물로 되돌아왔다. 이 굴의 물은 이렇게 하루에 두 번씩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이 금물에는 어떤 병이든 치료하는 신기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전국각지에서 병약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물을 떠먹는 금그릇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인이 물을 떠 마시고 금그릇이 탐이 나서 몰래 감추어 가지고 나오다가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이 물은 더 이상 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이란......
삼거리에서 금수봉에서 뻗어내린 능선의 허리를 돌아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건넌다. 선인봉으로 오르는 길가에 자주색 각시붓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다. 마치 갓 시집 온 새각시처럼..... 가끔 활짝 핀 철쭉꽃이 눈에 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철쭉꽃의 계절이 올 것이다.
*선인봉
*선인봉에서 대세봉에 이르는 능선
*선인봉에서 바라본 금수봉 능선과 연대봉
암봉인 선인봉에 올라서자 사방의 전망이 시원하게 탁 트이면서 천관산맥의 북쪽 능선과 계곡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기슭의 나무들은 일제히 연두색 새잎들을 터뜨리느라고 야단이다. 산의 높이에 따른 고도차로 인해 산 아랫자락에서는 제법 짙었던 연두색이 정상부로 오를수록 점점 옅어지다가 시나브로 회색빛으로 변한다. 그것은 마치 연두색의 옷을 입은 대군이 저 산밑에서부터 능선으로 계곡으로 정상을 향해서 물밀듯이 밀고 올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선인봉에서 대세봉을 거쳐 환희대(歡喜臺)에 이르는 능선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노승봉(老僧峰)과 종봉(鐘峰), 대세봉, 문수보현봉(文殊普賢峰), 천주봉(天柱峰), 대장봉(大藏峰) 등의 암봉들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금수봉 능선 너머로 천관산 최고봉인 연대봉(煙臺峰)이 솟아 있다.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주능선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세가 순하고 너그러워 보인다. 북쪽으로는 관산읍과 관산평야가 눈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지나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유장하게 뻗어간다. 동쪽으로는 득량만의 득량도와 장재도는 물론 다도해의 소록도와 거금도도 보인다.
*종봉
*금강굴
*종봉에서 노승봉을 지나 대세봉에 이르는 능선
*대세봉에서 천관사로 뻗어가는 능선상의 암봉인 605봉
*종봉에서 바라본 천관사
선인봉에서부터는 능선길을 걷는 동안 기암괴석과 첨봉들이 연출하는 웅장한 경치가 시종일관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종봉 바로 밑에 있는 금강굴(金剛窟)의 천정에서는 물이 병아리 오줌처럼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 금강굴 안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샘물은 산짐승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맙고 소중한 존재다. 먼 산길을 내려가지 않아도 마른 목을 축일 수 있기에.....
금강굴을 돌아서 바위봉우리인 종봉으로 오른다. 정상의 암반 바위틈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혹독할 정도로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런 소나무를 볼 때마다 경이로움과 외경심을 느끼곤 한다. 종봉의 정상도 선인봉처럼 전망이 매우 좋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대세봉의 웅장한 암봉이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설악산이나 금강산의 한 자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이곳에는 큰 종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종봉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대세봉 북쪽, 그러니까 천관사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는 선재봉(善才峰)과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 다섯 개의 암봉이 차례로 솟아 있다. 한동안 암릉이 이어지다가 육산으로 변하는 저 능선을 따라서 내려간 곳에 천관사가 자리잡고 있다. 관산평야는 연초록색의 물감을 쏟아놓은 듯 푸르다. 관산평야 건너편에는 탐진지맥에서 갈라진 산줄기 하나가 서쪽의 부용산에서 동쪽의 휘봉산으로 뻗어간다. 두 산의 중간에서 갈라진 또 하나의 산줄기는 남동쪽으로 뻗어내려 관산읍의 북쪽을 장성처럼 에워싸고 있다. 대세봉의 남쪽으로는 문수보현봉과 천주봉, 대장봉, 환희대가 차례로 솟아 있다. 환희대 북쪽으로 솟아 있는 대장봉과 천주봉, 문수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 등 아홉 개의 암봉을 일러 구정봉이라고 한다.
*노승봉
*대세봉
*천주봉(앞)
*천주봉(뒤)
노스님이 도를 닦고 있는 모습처럼 생겼다는 노승봉을 지난다. 그런데 오른쪽 스님은 무얼 그리 잘 잡수셨는지 풍채가 좋은 반면에 왼쪽의 스님은 깨달음을 위해 용맹정진하셨는지 비쩍 마르고 쭈글쭈글한 모습이다. 세운 지 오래되어 보이는 노승봉 표지판은 삭을대로 삭아서 글씨를 새겼던 판자는 떨어져 나가고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산기슭에는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피어 있다. 진달래는 그 누구의 일편단심 애닯은 사랑을 머금고 피어났기에 저리도 붉게 물들었을까! 귀촉도의 핏빛 울음을 머금고 피어났음인가! 사랑이 저토록 짙붉은 아름다움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목숨을 걸어도 좋으리.
노승봉에서 조금 더 가면 천관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그 바로 앞에 대세봉이 우뚝 솟아 있다. 대세봉의 바위봉우리들이 금방이라도 우르르 무너질 듯 위태로와 보인다. 천주봉 주변도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커다란 돌기둥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깃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천주봉이란 이름이 붙었다.
*대장봉(좌)과 그 뒤의 환희대, 진죽봉(우)
*환희대에서 탐진지맥의 양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산의 비로봉과 중수봉
*환희대에서 탐진지맥의 양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농안제
*환희대
*환희대 정상
*환희대에서 대장봉과 천주봉, 문수보현봉을 지나 대세봉에 이르는 능선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주능선
환희대에서 남서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은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었다는 구룡봉을 거쳐 대덕읍 연정리로 이어진다. 구룡봉에서 석굴암과 탑산사, 문학공원을 경유해서 대덕읍 연지리로 내려갈 수 있다. 구룡봉에는 금정산의 금샘과 같은 웅덩이가 수십 개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구룡봉 바로 아래에 있는 탑산암지에는 인도의 아육왕이 신병(神兵)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인도와 이곳에 탑을 쌓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아육왕탑이 있다. 탑산사 입구 문학공원에는 한승원, 송기숙, 이청준 등의 소설가와 이성관 시인 등 장흥출신 문인들의 육필원고를 보관한 문탑이 세워져 있다. 한승원의 시비에는 천관산에 대하여 '학교의 교가 속에 우뚝 솟아 있듯이 내 육체와 영혼 속에 이 산이 들어와 우뚝 솟아 있다.'고 적혀 있다. 천관산은 언제나 한승원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는 그런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장흥출신의 문인들 외에도 구상이나 안병욱, 김병익, 박범신, 차범석, 양귀자, 이호철 등과 같은 유명 작가들의 글도 바위에 새겨서 모아 놓았다.
천관산맥 주능선은 환희대에서 남동쪽으로 722봉과 710봉을 지나 연대봉으로 뻗어간다. 환희대에서 연대봉까지 약 1km의 주능선 좌우에는 약 40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억새밭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억새평원은 천관산의 명물로 해마다 10월이면 이곳에서 억새축제가 열린다. 천관산 정상부에 나무가 없고 억새가 우거진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강요로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수백 척의 배를 만드느라 모조리 베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관산읍 죽청리에는 배를 만들던 터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천관산 정상부에 나무가 없는 것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이리라.
황금빛 억새평원에서 억새들의 춤을 바라보며 한승원의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생각하다. 한승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천관산의 천관사에 갔다가 억새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 억새가 울부짖는 소리는 이후 40여년간 한승원의 뇌리에 깊숙히 각인된다. 어느 글에선가 그는 '..... 자드락길 굽이굽이마다 들솟아 있는 억새풀, 띠풀, 싸리풀들이 내 키를 재면서 겨울 찬바람에 몸부림치며 울어댔다. 내 몸속에 그 억새숲의 울음이 절절이 스며들고 있었다. ...... 그 바람소리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에 머무르고 있다. .......' 그 당시의 기억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라고 그 스스로 밝히고 있다.
정상부의 북쪽 사면에는 온통 진달래꽃으로 울긋불긋하다. 분홍색 옷으로 갈아입은 봄처녀는 진달래꽃으로 활짝 피어나 천관산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산비탈에는 마치 연분홍색의 물감을 쏟아부은 듯하다. 완만한 능선길을 걸으면서 천관산의 봄경치를 만끽한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서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진다.
*얼레지꽃과 노랑제비꽃
*710봉에서 바라본 722봉의 진달래꽃
환희대에서 연대봉까지는 가까운 거리다. 주능선의 북쪽 산기슭의 억새가 자라지 않는 곳에는 얼레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720봉 기슭에는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달래꽃밭이 펼쳐져 있다. 저 진달래꽃밭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마음마저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오는 듯하다. 710봉에서 남쪽 기슭으로 50m쯤 내려가면 인근에서 만병에 좋다고 알려진 '감로수'라는 이름의 샘이 있다. 산을 오르느라 타는 목마름을 이 샘물 한 모금으로 축일 수 있다면 감로수가 따로 있으리오!
*710봉에서 바라본 연대봉
*연대봉 정상에서 필자
*연대봉 남동쪽의 불영봉 능선과 다도해
*연대봉 동쪽 회진면의 수동제1, 2저수지와 다도해
*연대봉 북동쪽 봉황봉 능선
710봉에서 연대봉을 바라보니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 천관산 최고봉 연대봉(煙臺峰, 723m) 봉수대에 오르니 사방의 경치가 일망무제로 전개된다. 연대봉의 북동쪽으로는 보성만, 동쪽으로는 득량만과 고흥반도, 남쪽으로는 그림같은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에는 약산도와 금일도, 금당도, 거금도, 거문도, 소록도, 득량도와 같은 섬들과 이름모를 작은 섬들이 무수히 떠 있다. 소록도는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난 소설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섬이다.
연대봉에서 남동쪽 방향의 능선은 657봉, 645봉, 책바위, 불영봉(535m), 470봉을 지나 관산읍 외동3구 관흥으로 치달려간다. 불영봉에서 갈라진 또 하나의 산줄기는 관산읍 삼산리쪽으로 뻗어내린다. 이들 능선의 끝자락에는 수동 제1,2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로 해안선까지 광대한 들판이 펼쳐져 있다. 연대봉의 북동쪽 능선은 봉황봉을 지나 관산읍 탑동쪽으로 뻗어간다. 북쪽으로는 관산읍과 관산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억불산 뒤로 제암산에서 사자산을 거쳐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장엄하게 굽이쳐 간다.
연대봉 봉수대는 1149년(고려 의종 3년)에 처음 설치한 이래 계속적인 개축을 해왔는데, 지금의 봉수대는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 봉수대는 외적의 침입을 장흥의 억불산과 병영면의 수인산으로 알리는 동시에 제주도 한라산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내륙으로 전하는 곳이었다. 연대봉은 장흥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뛰어난 곳이어서 봉수대의 입지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는 제암산과 사자산은 물론 완도의 상황봉,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까지 다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은 한라산도 보인다.
불가에서 천관산은 천관보살이 항상 머물면서 설법하는 산이라고 본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 법기보살이 머무는 금강산과 더불어 천관보살이 머무는 천관산은 그래서 신령한 산이다. 천관보살은 보살도에 따른 보살행을 통해서 수행을 하며 중생의 제도와 교화를 중시하는 보살이다. 나무천관보살! 연대봉 정상에 서서 무한한 희열과 행복에 젖는다.
*연대봉에서 환희대, 대장봉, 천주봉, 문수보현봉을 지나 대세봉에 이르는 능선
*봉황봉
*양근암
*양근암에서 바라본 연대봉
*산벚꽃
다도해와 억새평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사람들이 모두 산을 내려가고 난 다음 연대봉을 떠난다. 만날 때는 언제나 반가웁고 이별은 아쉬운 법이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다시 한번 천관산을 돌아보고 가슴에 담는다. 정원석과 할미바위를 지나 봉황봉을 넘는다. 봉항봉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양근암이라는 이름의 바위를 만난다. 아무리 봐도 고놈 참 잘 생긴 대물이다. 저리도 빳빳이 치켜들고 있으니 하늘에 큰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양근암 맞은편 금수봉 능선에는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는 금수굴이 마주보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오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양근암에서 연대봉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작별을 고한다.
장안사로 내려가는 길에 산벚꽃이 활짝 피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연분홍빛이 도는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화 '첨밀밀(甛蜜蜜)'에서 이요(장만옥)와 여소군(여명)의 아련하면서도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떠오른다. 여소군에게는 본토에 두고온 약혼녀가 있었기에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더욱 아름답고 슬픈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젊은 나이에 자살한 등려군(鄧麗君)이라는 가수를 좋아했는데...... 영화의 주제가 '月亮代表我的心(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합니다.)'을 부른 등려군의 감미롭고 애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이 노래를 재즈풍으로 연주한 케니 지의 감미로운 기교를 곁들인 연주도 들을 만하다. 나도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해서 가끔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을 때는 그녀가 부른 '첨밀밀'이란 노래를 원어로 불러보기도 한다.
문바위를 지나 장안사에 들렀다가 가기로 한다. 장안사는 시멘트 슬라브 건물로 아직 지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절같다. 아침에 지나갔던 영월정 삼거리를 거쳐 탑동마을로 내려와 산행을 마무리한다.
*천관사 전경
*천관사 극락보전 앞의 5층석탑과 석등
*천관사 3층석탑
천관사를 보지 않고서는 천관산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기슭에 자리잡은 천관사(天冠寺)로 향한다. 천관사는 천관산 환희대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기슭의 꽤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절마당에서는 대세봉과 환희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렁찬 기세의 능선이 천관사에서 대세봉을 거쳐 환희대를 향해서 치달려 올라간다. 종봉에서 대세봉에 이르는 능선과 환희대에서 진죽봉에 이르는 능선도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천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655년(신라 진흥왕 2년) 통령화상(通靈和尙)이 보현사(普賢寺)와 탑산사(塔山寺), 옥룡사(玉龍寺) 등 89암자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천관보살(天冠菩薩)을 모셨다고 해서 천관사라 하였다. '지제지'에는 이 절이 신라 말 애장왕대(800~808)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건 당시부터 이 절은 기도처로 이름이 높아 당나라에서도 많은 승려들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9세기경 홍진대사(洪震大師)는 김우징(金祐徵)을 천관사에 참례하게 하여 화엄신중을 감동시킴으로써 그를 왕위(神武王)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뒤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은 완도의 청해진으로 피신한다. 김우징과 교분이 깊었던 홍진대사는 천관사에 머물면서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장보고를 설득한다.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기로 약속하고 5천 명의 군사를 얻은 김우징은 마침내 민애왕을 몰아내고 신무왕이 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지 여섯 달만에 신무왕은 독살을 당함으로써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천관사는 해안에 자리잡은 까닭에 신라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으로 점차 규모가 줄어들었다. 광해군(1608~23) 때는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사까지 된 뒤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왔다. 그 와중에도 1561년(명종 16년) 묘법연화경의 간행을 시작으로 13차에 걸쳐 경전을 간행하였으며, 1659년(효종 10년)에는 천관사의 역사를 담은 '지제산사적(支提山事蹟)'을 펴내기도 하였다.
천관사는 1963년에 한택이 대웅전과 칠성당을 중건하고, 한때 관산사(冠山寺)라고도 불렀다. 1986년에 도통이 중창하였고, 1980년에 요사 2동을 지었으며, 1991년에 범종각을 세웠다. 지금은 천관보살을 봉안하였던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비롯해서 삼성각과 범종각, 요사만을 갖춘 작은 규모의 사찰이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간결한 건축양식과 직선으로 된 지붕선, 소박한 벽면장식 등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사찰건축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는 건물이다. 극락보전 우측에는 독성과 산신, 칠성을 각각 모신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극락보전 앞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5m의 석등(石燈, 전남유형문화재 제134호)이 세워져 있다. 이 석등은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하나의 돌로 만든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놓인 평면 팔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하대석과 상대석, 간주석 등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옥개석과 상륜부를 얹었다. 하대석은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단석에는 각면 한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상단석에는 복엽 8판의 복련(伏蓮)으로 장식하였으며, 상면에 굽형괴임대를 놓아서 간주석을 받고 있다. 간주석은 평면 8각형으로 전체적인 구도에 비해 짧은 느낌을 준다. 상대석에는 복엽 8판의 앙련(仰蓮)을 새겼고, 상면에는 높직한 단을 형성하여 화사석을 받고 있다. 평면 팔각의 화사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네 면에 각 한개씩 화창(火窓)을 뚫어 놓았다. 옥개석은 여덟 귀퉁이가 시원스럽게 들려 있어 경쾌한 인상을 준다. 옥개석 상면의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중의 원통형 복발(覆鉢)과 꽃봉우리 모양의 보주(寶株)를 올려 놓았다.
삼성각 앞에는 5층석탑(전남유형문화재 제135호)이 있다. 높이 4.2m의 이 석탑은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옥개석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탑신이 빈약하여 호리호리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네 매의 긴 장대석으로 지대(地臺)를 놓고 그 중앙에 기단부를 두었다. 단층기단의 하대석은 호각형(弧角形)의 2단괴임을 하고 그 위에 네 매의 판석으로 면석을 짰다. 각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하였다. 갑석은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과 중앙에 각각 1단괴임을 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각 층 탑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은 특이하게도 옥개석을 매우 두껍게 만들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모든 층이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급하다. 탑의 곡대기에는 보주장식이 남아 있다. 두꺼운 옥개석과 옥개석 처마로 내려오는 전각의 심한 반전 등과 같은 현상은 고려 하대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종각 뒤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3층석탑(보물 제795호)이 세워져 있다. 높이 4m의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즉 전체적인 탑의 양식을 보면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놓아 네 매의 돌로 이루어진 하층기단을 받고 있다. 면석의 각 면에는 탱주가 없고 우주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갑석은 큼직한 두 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층갑석의 상면은 약간 경사가 져 있고 중앙에는 2단의 굄으로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도 우주만 새겨져 있고, 상층갑석의 하면에는 부연(附椽), 상면에는 2단 굄을 마련하였다.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탑신에도 역시 우주만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윗면에 1단 굄을 두어 탑신을 받도록 했다. 낙수면은 급경사인 듯하나 전각부에 이르러 편평해지면서 추녀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이 커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에는 하나의 돌로 된 노반(露盤)과 원구형의 복발(覆鉢)이 하나 놓여 있다. 기단부의 탱주가 생략된 것이나 옥개석이 얇아지고 간략해진 것 등은 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오면서 탑의 양식이 지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단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요사채에는 스님과 처사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님에게 예를 올리자 삶은 달걀을 하나 먹으라고 내준다. 법랍이 40년이 넘었다는 스님의 눈빛이 형형하다. 불법이 매우 높은 스님이라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그는 의사나 한의사도 못 고치는 환자들을 여러 명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한의사 노릇을 제대로 하라는 뜻이렸다. 스님은 자신에게 맞는 한약처방을 하나 해서 보내달라고 한다. 이건 스님이 나에게 던지는 하나의 시험이요 화두다. 산문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 무슨 약이 필요하리오! 스님은 여름에 다시 한번 들르라는 말을 남기고 출타를 한다.
천관사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산문을 떠나 회진포구로 향한다. 저물어가는 회진포구에서 감성돔회를 안주로 하산주를 한 잔 마시다. 얼큰한 매운탕에 저녁밥도 맛있게 먹었다. 가야 할 길이 천리라 어둑어둑해진 회진포구를 떠난다. 남녘땅 장흥의 진산 천관산이 어둠속에 잠기면서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천관산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귀로에 오르다.
2007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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