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글] 병역면제에 관한 단상
august 의 軍史世界
전설로 남은 별
1960 년 9 월 26 일,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 Fenway Park 에서 홈팀 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 가 볼티모어 오리올즈 Baltimore Orioles 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42 살의 老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날카롭게 휘두른 방망이에 공은 커다란 궤적을 남기고 홈런이 되었고 모든 관중의 기립환호와 아쉬움 속에 통산 521 홈런을 기록한 이 타자는 은퇴를 하였습니다.
[ 마지막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하고 老타자는 은퇴합니다 ]
바로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남은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 ( Ted Williams 1918 ~ 2002 ) 의 은퇴식 경기 당시의 장면입니다. 1941 년 시즌 그가 기록한 0.406 ( 456 타수 185 안타 ) 의 타율은 역대 8 위 기록이지만 이 기록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아직까지 4 할대 타율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야구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전설의 타격왕 테드 윌리엄스 ]
20 년간 오로지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있었으면서 통산타율 0.344, 2654 안타, 521 홈런, 1839 타점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한 그를 평가할 때 꼭 한 가지 따라다니는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계속하여 운동을 하였다면 과연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 그의 백넘버는 당연히 영구결번입니다 ]
테드 윌리엄스는 선수생활 중 제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무려 5 년이라는 공백 기간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로 그의 공백 기간 동안 선수생활을 계속하였을 경우 222 개의 홈런을 더 쳐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통산 743 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행크 애런보다 앞서 베이브 루스의 통산 714 홈런 기록을 경신했을 것이라고 분석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먼저 갱신하였을 지도 몰랐습니다 ( 베이브 루스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모습 ) ]
역사적인 4 할대 타율을 기록한 그는 이듬해인 1942 년 타율 0.356, 36 홈런, 137 타점으로 타격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으나 시즌을 완전히 끝마치기 전에 해군에 입영신청을 하고 해병대 조종사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 갑자기 생계곤란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하여 달라고 소송을 내었던 탤런트가 생각나는데 해프닝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TV 에서 온갖 터프한 척을 다하더군요. )
[ 1942년 시즌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참전합니다 ]
전쟁이 끝나고 3 년간의 공백 끝에 1946 년 야구장으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타율 0.342 와 38 홈런, 123 타점의 맹타를 휘둘러 공백 기간의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고 1947 년에는 리그 MVP 자리에 오르는 등 참전 이전과 다르지 않은 훌륭한 기량을 팬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병역의무기간 동안 경기력 하락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제2차 대전 후 야구장으로 복귀하여 변함없이 맹타를 날립니다 ]
그런데 절정기의 기량을 선보이던 1952 년 그에게 또 한 번의 징집영장이 전달되었습니다. 즉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테드 윌리엄스는 망설임 없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1952 년 겨울 "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듣도 보도 못한 한국으로 떠납니다.
[ 다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전선에서 활약합니다 ]
이전 참전 때도 그랬지만 테드 윌리엄스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후방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그런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1953 년 2 월 16 일 평양 남쪽의 보급 기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격하여 정확히 목표지점을 폭파 시킨 뒤 기수를 돌리던 중 그의 애기는 북한군의 대공포를 맞았습니다. 추락위기에도 불구하고 수원공군기지까지 날아와 동체착륙에 성공하였을 정도로 군인으로써의 윌리엄스 대위는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 1999년 보스턴에서 열린 올스타전의 히어로는 바로 테드 윌리엄스였습니다 ]
[ 메이저리그의 현역 올스타들 조차 그의 옆에 한 번 서 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
1953 년 휴전까지 총 39 번의 출격작전을 수행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레드삭스의 중심타자로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윌리엄스는 수차례의 참전기간에도 기량이 녹슬지 않았고 1957 시즌과 1958 시즌에 리그 타격왕에 올랐는데 1958 시즌의 40세 최고령 타격왕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어려운 불멸의 기록입니다.
[ 경기 전 추모행사와 펜 웨이 파크에 서있는 동상 ]
2002 년 7 월, 그가 84 세로 숨을 거두자 메이저리그는 경기 전 그를 추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놀라운 성적도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결코 모자람은 없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범적인 태도로 인하여 테드 윌리엄스는 모든 미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진심어린 존경까지 받을 수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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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랩 - 한겨레신문 2006.08.31 김동훈 기자 ]
( 전략 ) 백차승은 21일 2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뒤 메이저리그의 양대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인상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특히, 28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는 시즌 첫승과 동시에 통산 3승을 거뒀다. 그러면서 백차승의 병역 문제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부산고 출신인 백차승은 1999년 6월 부산 김해공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 시애틀로 출국했다. 그 뒤 7년여가 흐른 지금까지 한 차례도 귀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2년 안에 귀국하겠다"는 내용으로 백차승의 귀국보증을 섰던 아버지 등 두 사람이 각각 5천만원씩 벌금을 낸 바 있다. 귀국보증제도는 7월1일부터 폐지됐지만, 그 전에 출국한 사람은 계속 적용을 받는다.
병무청은 백차승이 출국한 지 2년이 지난 2001년 6월, 그를 병역법 위반자로 명시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백차승이 귀국하는 대로 처벌하기 위해 전국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백차승은 지금 귀국해도 징집되거나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백차승은 미국 현지에서 미국 시민권자인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데 이어, 지난해 4월 미국 시민권 취득과 함께 한국 국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병역 기피 의혹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법적으로는 외국인이다. 병무청 쪽도 "백차승은 겉모습만 한국인일 뿐, 법적으로는 미국 사람"이라며 "지금 당장 귀국하더라도 국내법에 따라 처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가 아무리 잘 해도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 백차승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대표선수 후보로 거론됐지만 국적의 벽에 막혔다. 이번 도하아시아경기대회 대표선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를 '코리안 메이저리거'로 부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후략 ) [ august 의 軍史世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