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44. 魯國公主의 죽음

鶴山 徐 仁 2007. 4. 5. 21:50
팔만대장경공민왕은 패기만만(覇氣滿滿)한 포부(抱負)를 품은 반면 만사(萬事)를 감정적(感情的)으로 다루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특히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를 가까이 모시던 김용, 최유 같은 자가 반란(反亂)을  일으키기에 이른 것이다. 감정적인 인물은 공사간에 마음에 드는 일이면 적극성(積極性)을 띠우지만 한 번 실망(失望)하면 만사를 포기(抛棄)하는 수가 많다.
 
공민왕 十四년, 노국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부터의 왕의 태도가 그러했다.
 
공민왕은 비록 원과 대립하는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원나라 공주인 노국공주와의 금실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이것도 공민왕의 감정적인 성격의 일면일 것이다.
 
공주는 원래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러 재상들의 권고로 달리 왕비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왕의 사랑은 오직 공주에게로만 쏠렸다. 물론 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여성적인 매력이 공주에게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 번 마음이 쏠리면 헤어나지 못하는 공민왕의 성격이 더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십여년을 두고 아기를 갖지 못하던 노국공주가 기적적으로 임신을 했다. 왕이 기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뭐라고 했소? 공주는 반드시 태자를 낳을 것이니까 다른 비를 맞는데 반대한 게 아니요?"
 
왕은 이런 말을 하면서 공주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주의 안산을 위해서 가능한 조처는 모두 했다. 그러나 지나친 조섭 때문이었던지 너무나 늦은 초산 때문이었던지 그해 이월, 공주는 난산으로 진통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숨이 지고 말았다. 공민왕의 슬픔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공주가… 나의 공주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태자고 뭐고 임신이라도 말 것을…"
 
왕은 어린애처럼 몸부림을 치며 통곡했다.
 
공주를 잃은 왕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감정적이며 인간적인 왕은 모든 정열을 기울여 사랑하던 공주를 잃으니 세상 일이 모두 귀찮아졌다. 정사고 뭐고 돌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쓰는 것은 공주를 추모하는 일 뿐이었다.
 
왕은 원래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 솜씨와 정성을 기울여 공주의 진영을 그리어 벽에 걸고 산 사람을 대하듯 이야기도 하고 통곡도 했다.
 
그리고 공주의 혼을 위로한다고 수시로 불사(佛事)를 일으켜 제사를 지냈다. 또 공주의 진영(眞影)을 모셔두기 위해서 굉장한 영전(影殿)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정사는 왕의 손을 떠나 그때 왕이 가장 사랑하던 중 편조(遍照) 즉 신돈(辛旽)의 손에서 좌우되었다.
 
신돈은 원래 영산(靈山) 사람으로 그의 모친은 계성현 옥천사(桂城縣玉川寺)의 종이었다고한다. 어려서부터 중이 되어 이름을 편조(遍照)라고 했는데 모친의 신분이 천한 때문에 다른 중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서 홀로 지냈다.
 
신돈이 공민왕을 만나고 그의 총애를 받게 된데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하룻밤 공민왕은 꿈을 꾸었다.  한 장사가 장검을 휘두르며 왕을 해치러 다가왔다. 왕은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무슨 까닭에 과인을 해치려 드느냐?"
 
그래도 그 장사는 듣는지 마는지 다가오기만 했다.
 
"거, 누구 없느냐?  저 무엄한 놈을 물리치지 못할까?"
 
왕은 이렇게 소리쳐 보았다. 그러나 달려오는 사람도 없었고 대답하는 사람도 없었다.  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장사가 다가오는 쪽 이외에는 모두다 돌로 쌓은 성벽이었다. 이제는 죽었다고 왕이 단념하고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으악!"
 
소리를 지르며 무엇이 쓰러졌다. 그러나 왕의 몸엔 아무 일도 없었다. 왕은 눈을 뜨고 둘러 보았다. 쓰러진 것은 이때껏 칼을 뽑아 들고 있던 그 장사였다. 머리통이 박살이 되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었었다.
 
"누가 이놈을 죽이고 나를 구해 주었을까,"
 
살펴보니 장사가 쓰러진 두어 발자국 저편에 한 중이 굵직한 석장을 짚고 서 있었다.
 
"대사가 과인을 구해 주었구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이다. 어느 절에 있는 누구요?"
 
중은 대답이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장사의 시체에 합장을 하고 나서 잠간 왕의 얼굴을 응시하고는 간 곳이 없어졌다.
 
비록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왕은 그 중이 대단히 고마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 꼭 그런 중이 살아 있어서 자기가 위험한 고비를 당했을 때 나타나서 구해 줄 것만 같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밀직사 김원명(金元命)에게 넌지시 고했다.
 
"상감마마, 편조대사를 아시옵니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서울에서 백성들의 숭앙을 한참 받고 있는 명승이옵니다. 한 번 불러 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릴 적엔 신분이 천하다 해서 남들에게 천대를 받던 편조도 원래 총명한 성품이라, 어느덧 인심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많은 신도들을 모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의 야망은 정계에까지 미쳐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원명과 접선을 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원래 이름난 중이면 가까이 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김원명이 천거하는 말을 듣자 말했다.
 
"그렇게 백성들이 숭앙하는 사람이라면 나라 정사에 도움이 되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것이니 한 번 입궐하도록 하라."
 
이렇게 분부했다.
 
그 이튿날로 김원명은 편조라는 중을 데리고 입궐했다.
 
왕은 그 중을 보자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눈치 빠른 김원명이 물었다.
 
"상감마마, 전에 대사를 만나신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왕은 며칠 전의 꿈이야기를 한 다음, 말했다.
 
"그 꿈에 나타난 중과 지금 여기 있는 저 승려와 용모가 아주 흡사하단 말이야…"
 
그 말을 듣자, 편조는 왕의 마음을 단숨에 흡수해 버릴 듯한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황송하오나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되니 왕은 편조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지기처럼 느껴졌다. 가슴을 털어놓고 정사(政事)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고, 교리(敎理)를 논했다.
 
왕의 말을 받아 논하는 편조의 변설이 더욱 왕의 맘을 끌었다. 그가 아는 불교의 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생 전반의 문제나 정사에까지 정통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는 들어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견해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국가는 문벌 높은 몇몇 권신들에게 농락될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그 수가 몇 천 갑절, 몇 만 갑절이나 되는 이름 없는 백성들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이런 말도 했다.
 
"권세가와 재산 많은 자들은 그 위세를 믿고 가난한 백성들을 더욱 더 수탈하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부강케 하려면 몇몇 사람들이 수탈한 전답을 거두어 그 옛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견도 제시했다.
 
"아무리 천한 노비라도 성품이 착해서 양민(良民)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 하는 일을 보아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가장 천한 인간들까지 앞날에 큰 소망을 걸고 살 수 있으며 상감의 성덕이 방방곡곡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편조 자신이 천하고 가난한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말은 구체성을 띠웠고 절실한 데가 있었다. 왕은 어느 말이나 하나 하나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조는 입으로만 약한 백성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이건, 삼복중이건 언제나 누덕누덕 기운 한 겹 옷만 입고 다녔다.  먹는 음식도 지극히 검소했다.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백성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편조가 자주 접촉을 갖게 되자 왕도 감화되어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도 그것을 권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대대로 부귀를 누려오던 권신들에겐 편조가 눈 안의 가시였다. 그 중에서도 편조를 가장 미워한 것은 이승경(李承慶)과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요망한 중놈이 나라를 망치려 든다!"
 
두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편조를 죽이려고 노리고 있었다. 정세운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며 이승경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이대로 두었다간 편조는 반드시 그들의 손에 죽고 말 것이므로 왕은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편조를 몰래 산중으로 보내어 숨겨 두었다.
 
그 후 정세운이 김용의 간계로 죽게 되고 이승경 역시 병을 얻어 죽게 되자 왕은 다시 편조를 불러들였는데 그대로 불러들이면 조신들의 반발을 다시 살까 염려해서 머리를 기르고 이름을 고치어 다른 사람같이 보이게 했다.
 
편조가 신돈(辛旽)이란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신돈을 다시 불러들인 왕은 전보다 한층 더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직접 지어 주기도 하고 사부(師傅)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모든 국사를 그와 의논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서 의욕을 잃었던 나라일을 모두 신돈에게만 맡겨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한낱 보잘 것 없는 중이었던 신돈이 이제는 고려 천지를 호령하는 세도가가 되었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
 
"지금 세상엔 신돈 어른에게만 잘 보이면 못하는 일이 없지."
 
"아마 그 분의 세력은 상감님에 못지 않을 걸."
 
"큰소리론 못할 말이지만 상감께선 어디 정사를 돌보시나? 모두 다 신돈 어른이 처리하시지. 그러니 사실상 그 어른의 세력이 상감님 이상이란 말야."
 
"암 그렇구 말구."
 
벼슬아치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수근거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서로 다투어 신돈에게 아첨했고 신돈의 집 문전은 뇌물을 바치러 모여든 사람들로 저자를 이룰 지경이었다.
 
"신돈 어른은 부처님이 사람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신 신승(神僧)인 모양이요."

"글쎄 그 분의 설법만 들으면 내세에 극락 가기는 따놓은 당상이라는구만."
 
"원 참, 내세 뿐이겠소? 그 분께 불공을  부탁하면 이승에서도 부귀영화(富貴榮華) 마음대로 누리게 된다지 않우?"
 
입이 가벼운 아낙네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재잘댔다. 그래서 신돈의 집에는 설법을 듣고 불공을 드리러 모여든 여인네들로 또한 법석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