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나라의 정사는 모후인 덕녕공주가 보살피게 되었다. 덕녕공주는 원나라 진서 무정왕(鎭西武靖王)의 딸이었으며 충숙왕 십칠년(AD: 1,330)에 충혜왕의 비가 되었으니 충혜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직 한창 나이였다.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곁에 간사한 신하가 붙어 있게 마련이다. 덕녕공주의 경우도 그러했다. 공주의 거처에는 항상 간신들이 출입했지만 그 중에서도 강윤충(康允忠)과 배전(裵佺) 두 사람은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배전은 정치적인 면으로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배전은 원래 흥해군(興海郡) 사람인데 그의 모친은 한낱 궁비(宮婢)였다고 한다. 그러나 재치 있고 눈치 빠른 배전은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호군, 군부판서(軍部判書) 등을 역임하고 조적의 난에는 왕의 편을 들어 활약했으므로 난이 평정되자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흥해부원군에 책봉되었다. 배전이 충혜왕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예로 이런 일화가 있다.
그가 충혜왕과 함께 원나라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밤 왕이 배전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그의 집에는 처남 김오(金俉)의 처가 와 있었다. 김오의 처는 젊고 매혹적인 여성이었으므로 호색한 왕의 눈에 들었다. 왕은 즉시 배전에게 명하여 김오의 처를 침실로 들게 했다.
왕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이 복종했지만 배전은 속으로 대단히 못마땅했다. 그것은 처남의 처가 왕의 육욕의 제물이 되는 것을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다.
ㅡ상감이 김오의 처를 가까이 하면 자연히 김오를 총애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경쟁자가 하나 더 느는 셈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ㅡ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배전은 곰곰히 생각한 끝에 자기 처를 호화스럽게 단장시킨 다음 왕의 침실로 들여 보냈다. 이렇게 된 이상 자기 처마저 왕에게 바쳐 김오 부처를 눌러 보자는 생각이었다.
'이건 또 웬 떡이냐!'
김오의 처와 흠뻑 즐기고 났으면서도 왕의 욕정은 다시 배전의 처에게로 동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아양을 떠는 배전의 처와 감미로운 시간을 즐겼다.
배전이란 이런 인간이었다. 권세를 잡기 위해서는 도의심이나 감정 같은 것은 일체 무시해 버리는 인간이었다.
덕녕공주가 정권을 장악하고 배전과 강윤충이 자주 드나들게 되자 공주는 배전에게 정사에 관한 대소사를 의논하는 한편 강윤충에게는 아직 시들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욕정의 눈초리를 은근히 보냈다.
강윤충은 원래 천한 종이었는데 충숙왕 때에 기회를 얻어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조적의 난에는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고 밀직부사에까지 승진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음탕한 인간이어서 김남보(金南寶)의 처, 백유(白儒)의 처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의 처첩을 범하고 말썽을 일으킨 일이 많았다.
이런 인물은 세상 사람들의 욕을 많이 먹는 대신 어느 부류의 여성에게는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덕녕공주는 강윤충의 염문을 듣자 그것을 괘씸하다고 생각하거나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많은 여성을 농락할 수 있는 그 수완에 오히려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자기 편에서 시녀를 시켜 그를 가까이 하고 마침내는 깊은 관계를 맺었다.
권세욕에 불타는 배전으로는 이러한 강윤충이 눈의 가시였다. 될 수만 있으면 당장 제거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강윤총을 직접 배척할 만큼 단순한 인물은 아니었다.
'공주가 한참 그자에게 빠져 있는데 그자를 배척한다면 오히려 공주의 미움이나 사지 아무 소득이 없지.'
그는 여러 가지로 계산한 끝에 공주와 강윤충의 사이를 오히려 부채질했다. 그들의 추행이 심해지고 물의를 일으키면 자기가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고지식한 간관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도 생각했던 것이다.
배전의 계산은 과히 빗나가지 않았다. 공주와 강윤충의 추문이 외부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다. 이런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배전은 마지막 술책을 은밀히 단행했다. 자기 심복을 시켜 방을 써다 붙이게 한 것이다.
ㅡ강윤충은 한낱 환관의 몸으로 군모(君母)와 밀통한 후 음란한 술책으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만약 이 자를 없애지 아니하면 나라에 어떠한 화를 미칠는지 알 수 없으리라.ㅡ
그러나 간교한 배전은 이런 방만 붙이게 한 것이 아니었다. 공주나 여러 신하들이 자기가 방을 붙이게 한 것을 알아차릴까 염려하여 따로 자기 자신을 비방하는 방도 붙이게 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막연히 공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말만 쓴 것이었다.
과연 그 방이 나붙자 조정은 발끈 뒤집혔다. 몇몇 재상들은 공주에게로 달려가서 배전과 강윤총을 멀리할 것을 강경히 진언했다. 그러나 덕녕공주도 녹록한 여인이 아니었다. 재상들의 진언을 듣자 "그런 소문이 세상에 떠돌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구료. 앞으로 배전 같은 사람은 일체 가까이 하지 않겠소."
이렇게 말했으나 강윤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상들의 비난이 수그러지자 전보다 한층 더 강윤충을 총애했으며 배전도 적당히 불러들여 이용했다. 말하자면 여론이 비등하면 적당히 무마하는 체하면서도 자기의 욕망과 정책은 끝내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충목왕은 등극한지 사년 만인 십이세 때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충목왕의 이복 동생인 경창원군 저(慶昌院君 )가 계승했으니 곧 삼십대 충정왕(忠定王)이다.
이렇게 되니 정권은 덕녕공주를 둘러싼 권신들과 새 임금의 외척인 윤시우(尹時遇) 일파의 손에서 농락되어 내정은 문란할 대로 문란하고 또 이 무렵부터 왜구(倭寇)의 침입이 극심하게 되어 원나라에서도 그냥 버려둘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충정왕은 즉위한지 삼년만에 폐위되고 충혜왕의 동생 강릉대군 기(江陵大君 祺)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바로 제 31대 공민왕(恭愍王)이다.
공민왕은 일찍이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결혼하고 원나라 조정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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