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38. 貢女 속의 世子妃

鶴山 徐 仁 2007. 4. 1. 19:56
팔만대장경 충렬왕은 원래 놀기 좋아하는 임금이었다.
 
충렬왕 팔년 어느날, 왕은 공주의 거처로 가서 그 싱거울이만큼 유한 미소를 띠우고는 말했다.
 
"공주, 빨리 먼 길을 떠날 차비를 하시오."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글쎄. 과인만 따라오면 될 게 아니요?  과히 해로운 일은 아니니까."
 
왕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여행의 목적은 밝히지 않고 재촉만 했다. 싹싹한 공주는 그것도 늙은 왕의 애교이거니 생각하고 더 캐묻지 않고 왕을 따라 서울을 떠났다.
 
처음에는 그저 산수 좋은 곳을 찾아 구경이라도 가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서울을 떠나 자꾸 남으로 내려가더니 마침내 임진강을 건넜다.
 
"상감,  저를 데리고 어디까지 가시려는 거죠?"
 
공주는 마침내 조바심이 나서 정색을 하고 캐물었다.
 
"충청도까지 갈 생각이요."
 
"충청도까지예요?  그렇게 먼 데까지 무슨 일로 행차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은 약간 멋적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실은 사냥을 하러 가는 거요."
 
이 말에 공주는 또 발끈했다.
 
"사냥을 하러 그렇게 먼 데까지 가요? 그리구 사냥은 남자들이나 하는 건데 어째서 나까지 데리고 가자는 거예요?"
 
"그야 한시도 공주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왕은 공주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이런 소리까지 했다. 그러나 공주는 여간해서도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저하고 떨어지는 게 싫으시면 궁중에 계실 일이지 국가 대사도 아닌데 사냥 같은 것을 하기 위해서 끌려 다니긴 싫어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 말에 왕은 한편 무안하고 한편 역정도 나고 해서 그 자리에서 물러가더니 곧 신하들과 함께 그 근처에서 사냥을 시작했다. 숲에 불을 지르고 짐승들을 몰아내어 잡는 사냥이다.
 
그런데 때마침 바람이 심히 불어 산불이 나고 백성들의 전답까지 태워버렸다. 이것을 보자 공주는 더욱 화가 났다. 왕에게 직접 말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 이번에는 장군 조인규(趙仁規)를 불러 따졌다.
 
"도대체 사냥이라는 것은 죄 없는 짐승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또 그 일에 매달리는 신하들의 수고도 적지 않은 것이니 상감께 아뢰어 환궁하시도록 하오."
 
조인규는 지각도 있고 학식도 많은 현신(賢臣)이었다. 일찍이 고려 자제들 중에서 총명한 자를 골라 몽고말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인규도 그 속에 뽑혔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다른 동료들보다 별로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이것을 분하게 생각한 그는 두문불출 밤이나 낮이나 가리지 않고  삼년 동안을 역학(力學)해서 마침내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로부터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인 만큼 공주의 말이 옳고 왕의 처사가 그름을 판별할 줄 알았다. 인규는 즉시 왕에게 좋은 말로 간하여 환궁할 것을 간하니 왕도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쫓아 환궁하였다.
 
충렬왕 십일년, 왕은 상장군 김자정(金子廷)을 동경부사(東京副使)로 삼은 일이 있었다.
 
김자정은 원종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자로서 임연이 김준을 죽였을 때엔 그 일에 가담해서 공을 세운 일도 있었다. 그리고 원종 십년 그 당시 세자였던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까지 갔다가 그 후 충렬왕이 즉위하자 친종장군(親從將軍)으로 승진했고, 충렬왕 삼년에는 방수군(防守軍)을 압송하여 탐라(耽羅)에 간 적도 있었는데 내료(內僚)로서 출사(出使)하기는 김자정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김자정은 충렬왕에겐 심복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동경 즉 경주는 바로 충렬왕의 모친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고향이다.
 
이 일을 알자 공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감께서 또 일을 그르치시는 걸.'
 
왕이 마침 공주의 처소에 들리자 공주는 슬며시 이렇게 물었다.
 
"상감, 동경은 바로 상감의 모후되시는 순경태후의 고향이 아니어요?"
 
"그렇소. 그런 또 왜 갑자기 물어보오?"
 
"모후의 고향에 상감이 부리시던 환관을 부사로 보낸다는 건 어떨까요? 태후의 일가친척과 결탁해서 공평치 못한 정사를 할 염려가 있지 않겠어요?"
 
옳은 말이었다. 왕의 심복이 그 곳을 다스리게 된다면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왕의 외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후한 대접을 할 것이고 그 반면에 백성들의 원망을 산다는 것은 십중팔구 있음직한 일이었다.
 
왕은 말문이 막혔다. 입을 다물고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공주는 다시 왕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그런데 남반에 속한 벼슬아치에게 지방의 요직을 맡기는 일이 언제부터 있었죠?"
 
남반(南班)이란 동반(東班) 서반(西班) 외에 제삼직인 내료직(內僚職)에 속하는 것으로서 양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천시되어 오던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김자정을 동경부사로 삼는다는 것은 사리사욕을 채울 뿐만 아니라 계급과 전통을 어지럽히는 결과도 되는 것이다.
 
"부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요."
 
왕은 자기 허물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생각이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공주는 싸늘한 웃음을 띠우며 "과연 상감께서는 아버님을 닮으신 아드님이시군요."하고 통렬히 비꼬았다.
 
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낯을 붉히기만 했다.
 
충렬왕 십삼년, 공주는 친정인 원조로 근친을 가게 되었다. 공주가 친정엘 가게 될 때는 언제나 진귀한 선물을 장만해 가지고 가게 마련이었는데 이번엔 색다른 선물을 생각해 냈다.
 
"상감, 이번 근친 갈 땐 전과 다른 선물을 장만해 가기로 했어요."
 
"전과 다른 선물이라니?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라도 구했단 말이요?"
 
"그런 게 아니구요. 어여쁜 여자들을 바치자는 거예요."
 
"난 또 뭐라고…  공녀 말이로군." 하면서 왕은 상을 찡그렸다.
 
공녀는 고려에서 어여쁜 여자들을 골라 원나라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풍습은 고종 때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했을 때 항복조건으로 동남동녀(童南童女) 오백 명 내지 천 명을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고려에서는 결혼도감(結婚都監), 과부처녀 추고별감(寡婦處女 推考別監)이라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해다가 원나라에 바쳐왔다. 그러나 원나라, 즉 몽고를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그당시의 고려 여자들은  한사코 응하지 않았으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역적의 처나, 중의 딸이나, 그밖에 사생아를 모아 보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나라 조정에서는 늘 공녀를 독촉해 오던 터였다. 원나라가 고려에게 공녀를 요구한  것은 근친정책(近親政策)으로 원과 고려의 관계를 굳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원나라 상하가 어여쁜 고려 여자를 많이 탐낸 때문이었다.
 
"공녀라고 보통 공녀가 아니어요."
 
공주는 득의에 찬 얼굴을 하고 말했다.
 
"보통 공녀가 아니라니?"
 
"이때까지는 천한 계집들만 보냈기 때문에 우리 모국에선 고려 여자들의 평이 좋지 않아요.  고려 여자들은 슬기롭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어째 이런 것들뿐이냐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이런 일은 고려 사람들의 체면을 많이 깎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번엔 고관들의 딸들을 뽑아 보낼까 해요."
 
"고관들의 딸들을? 당치도 않은 말씀이요, 공주. 웬만한 집 딸들도 공녀로 가기를 한사코 싫어하는데 고관들의 딸들이 어찌 응하겠소."
 
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니까 공주는 이내 독살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소리친다.
 
"응하지 않으면 힘으로 다스릴 뿐이지요."
 
"아무리 공주의 힘이라도 이것만은 어려울 것이요."
 
"두고 보시어요.  내 힘이 어떤가."
 
공주는 이렇게 장담하더니 홀적(忽赤)들에게 양가의 처녀들을 납치해 오도록 명령했다. 홀적이란 고려 때 활을 메고 궁전을 지키던 숙위병(宿衛兵)인데, 홀지(忽只), 화리적(火里赤), 역홀지(亦忽只)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두 다 몽고식 명칭을 본떠서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충렬왕 원년, 원나라에 인질로 다녀온 자들 중에서 선발한 것인데 그 중에는 몽고 사람도 섞여 있었다. 말하자면 몽고의 교육을 받고 고려보다도 몽고에 충실하려는 장졸들이다.
 
그러므로 공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인정사정 없이 양가를 습격하고 규중 깊이 침입하여 어여쁜 처녀들을 함부로 잡아왔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은 발끈 뒤집히고, 딸을 가진 사람들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잡혀온 처녀들 중에는 서원후 영(西原侯瑛)의 딸, 대장군 김지서(金之瑞)의 딸, 시랑 곽번(郭蕃)의 딸, 별장 이덕수(李德守)의 딸도 섞여 있었으니 공주의 명령이 얼마나 가혹했는가 알 수 있었다.
 
공주가 공녀로 보낼 여자들을 잡아다 궁중에 가두어 두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때부터 어쩐 일인지 세자가 몹시 화를 내며 식음을 전폐하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공녀는 무슨 공녀를 보낸다고 어머님은 저렇게 야단이실까?"
 
세자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보자 간사한 홀라다가 살살 꼬이며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
 
"세자마마, 공녀를 대국에 보내는 건 고려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이온데 어찌하여 그렇듯 불쾌히 여기시옵니까?"
 
그러니까 세자는 볼멘 소리를 질렀다.
 
"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양가의 처녀까지 골라 보낸다면 고려 남자들은 누구한테 장갈 들란 말야? 쓸 만한 사람은 모두 대국으로 다구 고려엔 찌꺼기만 남을 게 아니냐?"
 
세자의 말을 듣자 눈치 빠른 홀라다는 이내 그 심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자의 나이 십삼 세,  이미 여성에게 관심을 가질 나이다.
 
'하하… 세자는 바로 자기 비가 될 여자들까지 없어질까봐 염려하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홀라다는 다시 세자의 눈치를 살피면서 "세자마마, 과히 심려 마옵소서. 아무리 공녀를 보낸들 세자마마 비가 될 규수까지 보내겠사옵니까?"
 
이 말을 듣자 단순한 세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아라! 벌써 내가 생각해 둔 처녀까지 공녀로 골라 버렸더구나!"
 
그 말에 홀라다는 일부러 크게 놀라는 척하면서 "아니, 그렇사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그 규수는 어느 규수이옵니까?"
 
"바로 서원후의 딸이란 말이야. 나는 서원후의 딸을 비로 삼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간사한 홀라다는 세자의 마음을 캐내자 이내 공주에게 달려갔다.
 
"마마, 한 가지 앙청할 일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공녀들 중에 한 사람만은 공녀로 보내는 것을 중지하시옵소서."
 
"누구를 보내지 말란 말이냐?"
 
"바로 서원후의 딸이옵니다."
 
"서원후의 딸? 그것은 또 어째서?"
 
그제야 홀라다는 능글맞은 웃음을 웃으며 세자가 서원후의 딸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세자가 벌써?"
 
공주는 흡족한 미소를 띠웠다. 세자가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대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원후의 딸만은 공녀로 보낼 것을 즉각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 규수는 후에 과연 세자의 비가 되었으니 바로 정비(靜妃)이다.
 
이와같이 해서 양가의 처녀들까지 공녀로 가게 되었지만 그 중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공녀가 되기를 거역한 처녀와 부모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 홍규(洪奎)라는 사람에게도 한 딸이 있었다. 홍규는 원래 성품이 활달하고 욕심이 적고 의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임연이 죽고 그의 아들 유모가 정권을 계승하였을 때 원종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걸 무력으로 막으려 해서 인심이 흉흉한바 있었다. 그때 왕은 은밀히 홍규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 경의 충성을 믿고 분부하노니 사직을 지키고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 역적을 물리치도록 하라."
 
즉 임유모를 치라는 명령이었다. 유모는 바로 홍규의 처남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의를 위해서 처남의 목을 베고 왕을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공으로 좌부승선(左副承宣)에 임명되었으나 동료들이 나라 일은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아첨만 일삼는 것을 보자 더불어 한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럽다하여 관직을 사퇴한 일도 있었다. 
 
그 후 다시 추밀원 부사에 임명되었지만 굳이 사양하고 벼슬을 받지 않았는데  이때 홍규의 나이 아직 사십이 못 되었다. 이와같이 기백 있는 인물이므로  고려의 처녀들을 원나라에 보내는데 격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주의 명령으로 홀적들이 자기 딸을 잡으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뭐라구? 내 딸을 오랑캐 놈들에게 바치겠다? 당치도 않은 소리 작작하라고 그래! 내 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랑캐 놈들에겐 주지 않을 테다."
 
홍규가 이렇게 호통을 치자 마침 놀러왔던 한사기라는 사람이 물었다.
 
"그렇지만 그 극성스런 공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야 있겠소?"
 
그러나 홍규는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 여자가 아무리 극성스럽기로 내 딸의 머리카락을 베어버린다면 데려가지 못하겠지."
 
"머리카락을 베어버린다! 지독한 일을 하시겠다는구료. 그러시다가 공은 큰 화를 면치 못하실 거요."
 
"겁나지 않소. 나는 내 생각대로 할 뿐이요."
 
그리고 나서 홍규는 마침내 삼단 같던 딸의 머리를 빡빡 깎아 버렸다. 홀적들이 달려왔을 때엔 홍처녀는 이미 중대가리가 되어 있었다.
 
"아니 누구의 분부라고 이렇게 거역하는 거요?  두고 봅시다."
 
홀적들은 곧 이 일을 공주에게 고해 바쳤다. 공주는 팔팔 뛰며 성을 냈다.
 
"그래 그 놈이 감히 내 명령을 어긴다고? 홍규란 놈을 당장 잡아다가 호된 형을 가하는 한편 그 딸년은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소리 질렀다. 홀적들은 즉시 홍규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한편 홍처녀를 공주 앞으로 끌고 왔다.
 
"이년! 누가 네 머리를 중대가리로 만들었지?"
 
마당에 꿇어 엎드린 홍처녀를 내려다보며 공주는 호통을 쳤다. 그러나 홍처녀도 보통 처녀가 아니었다.
 
"두어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제 머리쯤 제가 꺾지 누가 깎겠나이까?"
 
이렇게 말대꾸를 했다.
 
"네 이년!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네 아비가 깎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왜 감추러 드는고?"
 
"마마께선 아직도 고려 풍속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몽고에선 또 몰라도 고려에선 점잖은 남자 분이란 아녀자의 몸에 손도 대지 않는 법인데  어찌 머리를 깎는 그런 좀스런 일까지 하겠나이까."
 
홍처녀의 말에 공주의 울화는 더욱 폭발했다. 
 
"이년이 입은 살았다구 나풀나풀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러더니 맨발로 마당에 뛰어내려가 쇠채찍으로 홍처녀의 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목덜미고 등이고 다리 팔이고 함부로 내리치니 온 몸에 유혈이 낭자하다. 그러나 홍처녀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공주가 홍규 부녀에게 가혹한 형을 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뜻 있는 신하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역대의 공신 김방경(金方慶)은 병석에 누워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입궐하여 강경히 간하였다.
 
"홍규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충신이거늘 사소한 죄로 말미암아 이렇듯 가혹한 형벌을 가하신다면 민심에 끼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까 하오."
 
그러나 공주는 끝내 신하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홍규를 먼 섬으로 귀양 보내고 그 가산은 몰수하고 홍처녀는 원나라 사신에게 주어 버렸다. 지독히 가혹한 처사였다.
 
이와같이 여성다운 장점과 결점을 함께 드러내며 고려 조정에 군림하던 여걸도 하늘이 부여한 수명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충렬왕 이십삼년 오월, 우연히 병을 얻더니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나이 겨우 삼십구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