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37. 蒙古出身 王妃 薺國公主

鶴山 徐 仁 2007. 4. 1. 19:54
팔만대장경 고려가 원(元=蒙古)나라의 속국이 되자 원나라에서는 황실의 공주를 고려왕의 왕비로 삼을 것을 강요했다. 
 
이와같은 정략결혼은 두 가지 뜻에서 고려 왕실을 속박하는 결과가  되었다. 즉 왕비로 간 공주가 고려 조정의 정사를 감시해서 수상한 동태가 있으면 즉시 본국으로 연락한다. 그리고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는 것이므로 함부로 반기를 들 수 없고 또 공주에게 소생이 있어서 왕위를 잇는다면 그 왕에게는 원나라 사람의 피가 반반 섞일 것이므로 더욱 반원(反元)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된다.
 
이와같은 정략결혼은 오랜 시일을 분쟁해 온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외교적 조정과 평화를 가져 왔다. 원나라에서 공주가 오는 대신 고려에서는 아름다운 처녀들이 많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소위 공녀(貢女)라는 것이 그것이다. 공녀로 먼 이국땅에 끌려간다는 것은 확실히 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공녀들 중에는 원나라 황실이나 고관들의 집안에 들어가 세력을 갖게 되고 고려 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자도 적지 않다.
 
원나라의 공주로서 처음으로 고려왕의 비가 된 것은 二十五대 충렬왕(忠烈王)의 비인 제국대장공주(薺國大長公主)이다. 공주는 원나라 세조(世祖)의 딸로서 홀도로게리미실공주(忽都魯揭里迷失公主)라고도 한다.
 
원종 십오년,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다. 이때 충렬왕은 삼십구세란 중년을 바라보는 장정이었으므로 이미 결혼한바가 있었지만 대국의 위세에 눌려 본처를 궁주(宮主)로 강격(降格)시키고 후처인 제국대장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인 것이다. 공주는 친정이 바로 대국의 황실이므로 그것을 믿고 거만한  거동이 적지 않았다.
 
충렬왕 원년 구월, 공주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二十六대 충선왕(忠宣王)이다. 공주의 몸에서 원자 탄생을 보자 백관들은 모두 다 그것을 경하해 마지 않았으며 충렬왕의 전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도 잔치를 베풀어 득남을 축하하였다.
 
이때 정화궁주를 모시는 궁인들이 동상방(東廂房)에 잔치자리를 베풀려고 하니까 때마침 왕이 지나가다 보고 "어째서 동상방에 그런 자릴 베풀려 하느냐? 정침(正寢)에 꾸미도록 하라." 이렇게 간섭을 했다. 
 
좀 더 좋은 곳에다가 연석을 꾸미라는 말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왕이 얼마나 공주를 어려워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
 
왕의 말대로 궁인들은 다시 정침에 평상을 놓고 연석을 베풀었다. 그런 다음 공주를 청했다.  공주가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공주를 모시던 한 시녀가 좌석을 바라보더니 공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공주마마, 잠깐 기다리시어요."
 
"왜 그러느냐?"
 
"이 자리를 자세히 보시어요. 이렇게 평상을 놓고 그 위에 잔치자리를 꾸몄으니 여기서 잔치를 하시면 별 수 없이 공주마마와 정화궁주가 같은 자리에서 앉게 되지 않겠사와요?"
 
이 연석에서 웃자리와 아랫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충렬왕의 뜻과는 반대되는 결과가 된 셈이다. 거만한 공주는 발끈 성을 냈다.
 
"뭐라구? 나를 궁주와 똑같이 대접한단 말이지? 그게 될 말이냐? 지난날엔 정화궁주도 왕비였는진 모르지만 지금은 엄연히 공주보다 훨씬 낮은 신분으로서 어찌 감히 한 자리에 앉으려 드느냐?"
 
그리고는 잔치자리를 서상방(西廂房)으로 옮기게 했다. 서상방에는 한층 높은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자, 정화궁주가 꿇어앉으며 왕에게 술잔을 올렸다. 그러자 왕은 슬쩍 공주를 돌아보았다. 공주에게도 한잔 따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왕의 그런 눈짓을 오해하고는 매섭게 왕을 쏘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째서 나를 흘겨보는 거예요?"
 
공주가 소리치는 바람에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왕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아마 전에 왕비로 있던 궁주가 내 앞에 꿇어앉아서 술을 따르는 게 못마땅해서 그러시는 게죠?"
 
그리고는 발딱 일어서서 "이따위 축하라면 차라리 받지 않는 게 더 나아요." 악을 쓰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주빈인 공주가 뛰쳐나가자 주빈을 잃은 좌석은 파할 수밖에 없다. 난처한 일이었다. 전각 아래로 뛰쳐나간 공주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며 "다 귀찮다! 모두 다 보기 싫어!  빨리 내 아이 있는 곁에나 가고 싶다. 어서 데려다 다오." 하고 발을 굴렸다.
 
그래서 시녀와 마침 공주 곁에 모시고 있던 공주의 유모는 하는 수 없이 공주를 태울 덩을 불러 오려고 하는데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시오. 공주."
 
왕이 지팡이를 짚고 헐레벌떡거리며 달려 왔다.
 
"공주,  모든 것이 과인의 불찰이니 허물하지 말고, 마음을 진정하오."
 
왕이 아무리 달래 보아도 공주는 들은체 만체 발을 구르며 덩을 재촉하기만 했다. 늙은 왕은 딱하기 이를데 없었다. 공주를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공주가 누구보다도 아끼는 유모를 협박했다.
 
"여봐라. 공주께서 기어이 이 자리를 뜨게 하신다면 반드시 네년은 죽을 줄 알아라. 내 손으로 네년의 목을 졸라 숨이 끊어지는 걸 보고야 말겠다."
 
왕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니까 그 꼴이 몹시 우스웠던 모양이다.  이때껏 울부짖던 공주는 이번엔 웃음을 터뜨리며 "상감께선 딱하시기두 해. 나한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시지 죄없는 유모를 어째서 괴롭히시어요?"
 
그러니까 왕은 이내 입이 벌어져서 "유모를 죽이고 싶지 않거든 공주의 노여움을 어서 푸시오."
 
공주는 발끈하기 잘하는 대신 성미가 싹싹한 여자였다.
 
"유모를 죽이신다면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참석해야죠. 유모는 나를 키워 준 은인이니까요.  그렇지만 똑똑히 알아두세요. 상감의 말씀이 무서워서 다시 참석하는 건 아니예요."
 
이런 말을 던지고는 가슴을 쫙 펴고 의기양양하게 잔치자리로 다시 들어갔다. 잔치가 파하자 왕은 은근히 겁이 났다. 은밀히 시신 하나를 불러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에게 보내어 오늘 잔치에서 공주의 노여움을 산 일을 알린 다음 "공주가 만일 정화궁주의 일로 노여움을 품고 대국에 이 일을  통기한다면 우리나라에 적지 아니 불리할 텐데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문의 했다.
 
인공수는 여러 차례 원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기 때문에 그 곳 조정의 일과 왕실의 동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신의 말을 듣자 인공수는 껄껄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시는구료. 여자들의 투기에서 나온 사소한 일을 어찌 천자께 상주할 것이며 설혹 상주했다손치더라도 대국의 천자께서 그런 일에까지 간섭하시지는 않을 거요."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왕이 얼마나 공주의 배경을 두려워했는지 이런 일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공주는 정화궁주를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는데 그 이듬해 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투서를 한 것이다. 달로화적이란 원나라의 관직의 하나이지만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후 원나라에서는 일종의 고문관 겸 감시관을 고려로 보냈으므로 이것을 고려 사람들은 달로화적이라고 불렀다.
 
달로화적은 고려 임금의 잘못을 충고도 했고 고려에 나와  있는 원나라 관원과 고려인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으며 원나라에 죄를 지은 고려 사람을 처단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려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왕족들까지도  달로화적을 지극히 두려워했다.
 
달로화적에게 보낸 익명의 투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옷이 있어야 입을 것이며, 음식이 있어야 먹을 것이니 남을 위해서 그것을 얻지 말라.]
 
이것을 보자 달로화적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옷이 있어야 입을 것이며… 음식이 있어야 먹을 것이라… 이것은 바로 고려사람들이 우리 원나라를 원망하는 소릴 게다. 특히 자기 자리를 쫓겨난 정화궁주가 우리 공주님을 미워하고 이런 소릴 퍼뜨린 것인지도 몰라… 남을 위해서 그것을 얻지 말라… 공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런 뜻으로 해석되거든."
 
달로화적은 즉시 공주에게 글을 올렸다.
 
ㅡ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은 것을 원통히 여겨 무당들로 하여금 공주를 저주하도록 시키고 있사오니 급히 조처 있으시기 바랍니다.ㅡ
 
이 글을 받자 공주는 팔딱팔딱 뛰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그래도 제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대로 두었더니 이제는 나를 저주한다? 어디 두고 보자."
 
공주는 즉시 왕에게 졸라서 정화궁주를 유폐하도록 했다. 이런 소식을 듣자 분연히 공주의 처사를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 첨의시랑(僉議侍郞) 유경(柳璥)이었다.
 
유경은 천품이 명민하고 기도(器度)가 웅심(雄深)하고 대사를 당했을 때 과단성 있게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김준이 최씨 정권을 무너뜨릴 때에는 거기 가담해서 무신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왕에게 돌려 준 역대의 공신이었다.
 
"한낱 떠도는 소리를 믿고 지난날 국모였던 분을 가두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로 아뢰오.  정화궁주께서 이미 스스로의 처지를 깨달으시고 근신중이거늘 이 이상 그 분을 괴롭힌다면 그것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처사이며 나아가서는 민심에 끼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줄로 아뢰오."
 
이와같이 상서했다. 그 글을 보자 영리한 공주는 즉시 정화궁주를 석방하였으나 그 대신 별궁에 거처하게 하여 임금과의 교섭은 일체 끊도록 했다.
 
한 번은 왕이 공주와 함께 말을 달려 천효사(天孝寺)로 행차한 일이 있었다. 이때 왕이 먼저 산밑에 당도하고 공주가 뒤이어 당도했으나 뒤따르는 신하들과 시녀들은 멀리 처졌다.
 
그러자 공주는 또 발끈 성을 냈다.
 
"아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다른 나라에서 온 몸이라고 신하들까지 업신여기는 모양이지?"
 
그리고는 말을 돌려 되돌아가려고 했다. 공주가 이렇게 신경질을 부리자 공주의 눈치만 살피는 왕은 거기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주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데 그제야 시신들과 시녀들이 어슬렁 어슬렁 올라오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공주의 짜증은 극도에 달했다.
 
"너희들이 정말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기냐? 고려의 법도는 만만한지 모르지만 원나라의 법도는 얼마나 무서운가 보여 주겠다."
 
이렇게 외치더니 말채찍으로 시녀들을 닥치는 대로 두드려 팼다. 일이 또 난처하게 되자,  능글맞은 데가 있는 충렬왕은 정면으로 달래 보았자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공주가 하는 꼴을 멀거니 바라보고 섰더니 자기 머리에 썼던 것을 벗어 던지고 홀라다(忽剌多)라는 신하의 뒤를 쫓아가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놈!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다 네 탓이란 말이다. 모두 다 네 죄란 말야."
 
홀라다는 몽고 사람으로 공주를 어릴 때부터 모시던 가신이며 공주가 고려로 시집오자 역시 그 뒤를 따라왔다. 그러므로 한시도 공주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 역시 그를 극진히 총애했다. 천성이 괴팍하고 욕심이 많아서 공주의 총애를 빙자하고 닥치는 대로 뇌물을 받아먹었으며 타인의 노비나 전답을 함부로 빼앗아  많은 사람의 원망을 사고 있었다. 이러한 인간이니 만큼 왕도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몽고 조정과 잘 통하는 인간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저 보고만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이런 일을 당하니 문득 그자의 기를 꺾고 공주의 마음을 달래보자는 계산을 한 것이다.
 
공주도 바탕은 영리한 여자였다. 너무 짜증을 내다가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에게 화가 미치면 곤란하므로 이내 노여움을 거두고 "상감! 너무 그렇게 달리다가 낙상을 하시면 어쩌시려구요." 하고는 까르르 웃었다.
 
그러니까 왕도 덩달아 웃으면서"공주가 과인의 몸을 그렇게 염려해 주니 과인도 홀라다 놈을 쫓는 걸 그만두겠소." 이렇게 해서 그 자리는 어물어물 수습되고 왕과 공주는 다시 천효사로 향했다.
 
이런 일로 미루어본다면 공주는 항상 친정의 배경을 믿고 거만하게 군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이국만리에, 더구나 늙어가는 남편에게 시집온 젊은 여자로서 신경질을 부린데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왕은 항상 공주의 눈치만 살피는 것 같았지만 능란한 솜씨로 공주에게 솜방망이 같은 반격을 가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공주가 어리광과 신경질만으로 시종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여자답게 즉흥적이며 직감적이기는 했지만 국사에 대해서도 제법 올바른 의견을 진언하고 백성들의 살람살이를 윤택하게 해보려고 애쓴 흔적도 있다.
 
한 번은 어떤 여승(女僧)이 모시 한필을 바친 일이 있었다. 어찌나 올이 가늘고 고운지 마치 매미의 날개 같았으며 거기다가 각자지 꽃무늬까지 섬세하게 놓았다.
 
"어머나! 참 고운 옷감도 다 보겠네. 이렇게 고운 옷감은 궁중 깊이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널리 백성들에게 구경시켜 짜는 법을 알리도록 해야지."
 
공주는 이렇게 말하고 그 모시를 사람을 시켜 장거리에 내다가 구경시키도록 했다. 신기하리만큼 섬세한 옷감에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어쩌면 이렇게 고운 옷감이 있을까?  이런 옷감을 어떻게 짜냈을까?"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옷감을 구경하고도 그와 비슷한 것을 짜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짜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는 하는 수 없이 그 모시를 바친 여승을  다시 불렀다.
 
"일전에 바친 모시는 어디서 구했지?"
 
"예,  저에게 한 여종이 있사온데 그 애가 짠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여종을 궁중으로 들여보내도록 하라."
 
여승은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유달리 고운 모시를 짜는 기술자를 종으로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싼 값으로 팔기도 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선사도 함으로써 여승은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종을 궁중에 들여 보낸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눈치를 챈 공주는 여승에게 많은 금품을 주어 기술자를 불러들이는데 성공했다. 공주는 궁중에 있는 궁인들과 하인들에게 그 여종을 따라 섬세한  직조술을 습득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 기술은 마침내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고려의 고운 모시 옷감은 원나라에까지 수출하게 되었다.
 
이것은 여성적인 직관으로 산업발달에 이바지한 예이지만 또 여성적인 직관만 믿고 일을 서둘렀다가 실패한 예도 없지 않다.
 
공주는 자주 원나라에 드나들었다. 그러므로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 인삼을 신약으로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강남(江南) 지방 사람들은 고려 인삼이라고 하면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구하려고 애를 썼다.
 
"강남지방에 인삼을 수출하면 큰 이를 볼 수 있을 거야."
 
공주는 시험 삼아 강남지방에 인삼을 수출해 보았다. 과연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았다. 공주는 그 일에 재미를 붙였다.
 
"이렇게 이가 남는 일이라면 더 많이 수출해야지."
 
공주는 환관들을 각 지방에 보내어 인삼을 걷어 들이 게 한 다음 자꾸 수출했다. 그러나 인삼의 생산에는 한도가 있었다. 전국 도처에는 인삼이 동이 났다. 그래도 저희들의 공만 서두르는 환관들은 백성들을 괴롭히며 인삼을 걷어 들이려고 기를 썼다.
 
"아니 인삼을 풀뿌리나 나무뿌리로 아나? 그렇게 쉽게 자라는 줄 아는 모양이로군."
 
"도대체 여자가 하는 일이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서둘러서 탈이야."
 
백성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