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원나라의 관제를 폐지하고 친원파인 기철 등을 숙청했으나 소식을 듣자 크게 노한 순제는 공민왕 삼년, 사신을 보내고 그 처사를 책망(責望)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황후의 감정이 다분히 개재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무력하더라도 고려에 비해서는 엄청난 대국의 비위(脾胃)를 너무 거슬린다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라고 공민왕은 생각했다.
그래서 북쪽 땅을 복구하는 일을 맡고 있던 서북면병마사 인당(印 )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죽인 다음 이인복을 보내어 외교적 절충을 꾀하도록 했다. 즉 정식으로 쌍성(雙城=永興), 삼살(三撒=北靑) 등지를 돌려달라고 소청한 것이다. 이런 청원은 단지 원조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승인을 얻으려 한데 지나지 않는다. 이때 이미 삼살 이남의 땅은 고려에서 점령하고 있었고 그 일에 내응하고 협조해 준 쌍성 사람 이자춘(李子春)을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하여 지금의 함흥에서 국경을 지키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자춘은 바로 훗날 이씨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부친이니 이씨 일문이 고려 조정에 발판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렇게 원나라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원나라 역시 내란으로 국운이 기울어 제대로 간섭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고려의 국정이 안전한 것은 못되었다.
남쪽 바다로부터는 왜구들이 쉴 새 없이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북쪽으로부터는 대륙에서 봉기한 반란군들이 항상 고려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었다. 왜구란 일본(日本)의 해적들을 부르는 말이다. 일찍이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 해변에 침입한 일이 있었으나 그당시는 수와 피해가 그다지 많지 않았었는데 고려 중기에 와서 갑자기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그 행패가 극도에 달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민왕 육년에는 개경에서 가까운 승천부(昇天府)와 교동(喬洞)까지 침범을 당했고 칠년, 팔년에는 예성강 하류를 침범당하고 구년에는 강화도와 교동이 침범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민심은 흉흉하고 조정에서는 그 방비책을 강구하기에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별로 신통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남쪽으로부터 침범하는 왜구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일어난 신흥 세력의 침범도 고려의 국정을 어지럽혔다.
공민왕 팔년에는 북으로부터 소위 홍건적이 쳐들어 왔다. 홍건적은 중국 북쪽 각처를 유린한 한림아(韓林兒)라는 자의 사병으로서 이때 고려에 쳐들어 온 군병은 한림아의 부장 모거경(毛居敬)이 거느리는 사만 대군이었다. 그들은 때마침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경(西京)을 함락했으나 고려 장수 이방실(李芳實)의 분투로 크게 패하여 쫓겨가고 말았다.
그러나 공민왕 십년 홍건적은 다시 이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개성 근처까지 쳐내려 왔다. 개경의 민심은 극도로 소란해져서 왕과 공주는 마침내 태후를 받들고 남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개경에 침입한 홍건적은 여러달 동안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사르고 갖은 만행을 다했다. 그러나 복주(福州=安東)까지 피난간 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일대 반격전을 감행케 했다. 정세운은 그 이듬해 정월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 등 제 원수와 합세하여 적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했다. 그리고 다시 남은 적병을 구축하여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이와같이 남북으로 외침(外侵)을 당하여 어지럽기 이를데 없는 국정인데 안으로는 간신의 발호가 또한 그치지 않았다.
공민왕의 근신에 김용(金鏞)이란 자가 있었다. 김용은 안성(安城) 사람으로 성품이 음란하고 잔인하고 시기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공민왕이 세자의 몸으로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곁에서 시중을 들었으며 그 공로로 대호군에 승진했다가 공민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호군이 되었다.
이와같이 처음에는 김용을 총애하던 공민왕도 그가 저지른 죄를 그냥 둘 수는 없어 벌을 준 적도 있었지만 이내 그 죄를 사하기가 일쑤였다.
어떤 때는 백성들의 재물을 함부로 걷어 들여 저지른 죄로 옥에 가두었다가 다시 석방하고 오히려 밀직부사란 요직을 맡긴 일도 있었다. 또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고 이궁을 침범했을 때 숙직하던 다른 관원들은 모두 피살되었지만 오직 김용만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비난이 자자했고 왕도 조일신과 내통하지 않았나하여 먼 섬으로 귀양보냈으나 얼마 안돼서 다시 불러들인 일도 있었다.
이 무렵 신귀(辛貴)란 관원이 있었다. 항상 외방에 부임해서 서울집을 비워두는 수가 많았다. 그런데 그의 처 강씨(康氏)는 지극히 음탕한 여자여서 많은 대신들과 밀통하고 김용도 역시 밀통했다.
이런 꼴을 보다 못한 신귀의 모친은 어사대(御史臺)에 호소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김용만은 왕의 총애를 입어 죄를 모면하였다.
요컨대 제삼자에게는 간악한 인물이었지만 왕에게는 김용이 누구보다도 마음에 드는 총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던 사람은 김용과 정세운이었다. 정세운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일찍이 김용과 마찬가지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왕이 즉위하자 그 공로로 일등공신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성품이 김용처럼 간사하지는 않고 청렴결백, 오직 국가와 백성들만 염려하는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홍건적이 쳐들어 와 왕이 복주로 피난하자 상장군으로 따라가면서도 밤낮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해 마지않았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세운은 눈물을 뿌리고 분격했다.
"상감마마, 저 불쌍한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다 조정의 우리 백관들이 변변치 못한 때문이 아니옵니까? 마땅히 교지를 내리시어 민심을 달래는 한편 각도의 군사를 모아 도적들에게 반격을 가해야 할 줄로 아옵니다."
세운이 상주하니 왕도 그 뜻을 따라 세운으로 하여금 총병관을 삼고 홍건적을 무찌르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세운과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마침내 홍건적을 평정하자 평소부터 정세운과 왕의 총애를 다투고 있던 김용은 무척 두려워졌다.
'가뜩이나 상감이 총애하는 정세운이 그렇듯 큰 공을 세웠으니 이대로 두었다간 상감의 신임이 두터워질 것이며 나 같은 건 맥도 못추게 될 것이 아닌가?'
김용이 두려워한 것은 정세운 뿐만이 아니었다. 정세운과 같이 공을 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도 모두 두려운 경쟁자로 새로 등장한 것이다.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하겠다. 그래야 내 지위가 위태롭지 않단 말이야. 그렇지만 마침 큰 공을 세워 한창 위세가 등등한 그놈들을 내 손으로 죽이기도 어려운 일이고…'
곰곰 생각한 끝에 세 사람을 서로 이간시킨 다음, 안우, 김득배, 이방실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할 계교를 꾸몄다. 김용은 자기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金琳)에게 계교를 일러주고 안우 등을 찾아가도록 했다. 김림이 안우의 처소를 찾아가니 마침 이방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자리를 잡고 나자 김림은 두 사람에게 넌지시 말했다.
"세운은 원래 공들을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인데 이제 함께 적을 무찔러 군공을 다투게 되었으니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안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어쩌겠소?"
"뻔한 일이 아닙니까? 공들을 해치고 군공을 독점하겠죠. 그러니 앉아 화를 당하느니보다 이편에서 선수를 쓰는 것이 상책일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안우도 그럴듯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방실과 함께 김득배의 처소를 찾아가서 의논해 보았다.
김득배는 상주(尙州)사람으로 일찍이 등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 전객부령(典客副令)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공민왕이 세자 때 원나라로 따라가서 숙위하다가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어 국가 요직에 참여했으나 찬성사 조일신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물러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홍두적과 왜구의 침범이 심해지자 다시 특채되어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으며 뒤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등을 거쳐 홍두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분전하여 대 승리를 거둔 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하에서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같은 대학자를 배출한 석학이기도 했다.
안우 등이 정세운을 제거하자는 말을 하자 김득배는 정색을 하며 반대했다.
"이제 겨우 외적을 평정했는데 동족끼리 서로 해칠 필요가 어디 있겠소? 정공의 허물이 뚜렷해서 어쩔 수 없다면 상감께 상주해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이 말에 안우와 이방실도 그럴싸하게 여겨 일단 물러갔으나 밤이 되자 다시 찾아왔다.
김득배의 말을 듣고 안우와 이방실이 망설이는 것을 본 김용이 이번엔 왕명이라 칭하고 정세운을 주살할 것을 독촉한 것이었다.
"세운을 주살하는 것은 상감의 분부요. 우리가 아무리 공을 세웠더라도 상감의 분부를 받들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어찌하겠소?" 그래도 득배는 세운을 죽이는데 반대했으나 두 사람이 너무나 강경히 주장하므로 하는 수없이 술상을 차려 놓고 세운을 부른 다음 숨겨 두었던 장사를 시켜 죽여 버렸다.
세운을 죽이고 나자 안우 등은 그 목을 베어가지고 궁궐로 향했다.
"군명을 받들어 정세운의 목을 베어 왔으니 어서 문을 여오."
안우가 궁문 앞에서 이렇게 외치자 수문장은 궁문을 열고 안우를 철퇴로 박살했다. 미리 김용이 명령한 일이었다.
안우가 죽는 것을 보자 이방실과 김득배는 비로소 김용의 간계에 넘어간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한편 김용은 즉시 궐내로 들어가서 왕을 알현하고 말했다.
"안우 등이 함부로 주장을 죽였사옵니다. 이것은 곧 상감을 업신여기는 처사라 단단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하겠기에 신이 우선 안우를 죽였습니다만 아직 김득배와 이방실이 생존해 있으니 마저 잡아 처단해야 할 줄로 아뢰오."
김용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나 곧이듣는 공민왕은 크게 노하여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는 자에겐 삼급(三級)을 초등(超等)해서 녹용(錄用)하겠다는 고유를 내리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등을 시켜 두 사람을 잡게 했다.
이때 김득배는 산양현(山陽縣)에 있던 선형(先瑩) 곁에 숨어 있었으나 관에서 노모를 비롯해서 형제자매를 잡아다가 숨은 곳을 대라고 참혹한 고문을 가하므로 보다 못해 자수해서 죽고 말았다.
한편 이방실은 안우가 죽는 것을 보고 일단 몸을 피했으나 왕명으로 자기를 체포하려고 하는 것까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의 무죄함을 왕에게 호소하려고 행궁으로 향하려 하는데 마침 왕이 보낸 그의 장인 신구(辛 )와 만나 입궐했다.
방실이 어전에 부복하자 김용의 명령을 받고 있던 오인택이 갑자기 칼을 뽑아 내리쳤다. 방실은 칼을 맞고 잠간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으나 얼마 후 소생해서 담을 뛰어 넘어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곧 박춘(朴春), 정지상(鄭之祥) 등이 추격하여 죽이고 말았다.
정세운 등 정적을 죽이고 나자 김용의 세력은 한층 더 떨쳤으나 그 반면 뜻있는 자들은 그의 간계로 공로 있는 장수들을 죽였다하여 미워하고 있었다.
김용은 그것이 두려웠다. 정세운 등 네 장수를 죽인 것이 순전히 자기 모략 때문이란 것을 왕이 안다면 얼마나 괘씸하게 여길 것인가? 그래서 그 기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가의 조카 김림을 죽여버렸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원나라에 가 있던 최유(崔濡)란 자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정변을 일으키자고 유인했다. 공민왕을 없애버리고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최유도 원래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가까이 모시던 충신이었으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내린 벼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다가 죄를 짓고 원나라로 도망가 있던 자였다.
그러므로 그곳에 머물러 있던 고려인 불평분자들과 결탁해서 여러 가지로 원조에 공민왕을 모함하는 한편 원순제의 제이황후인 기씨를 움직여 공민왕의 폐위를 도모했던 것이다.
기황후는 자기 오라버니인 기철 등이 본국에서 피살된 것을 미워하던 터이므로 즉시 순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위하는 공작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게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본국에서 호응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최유는 김용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인한 것이다.
최유의 유인을 받자 김용은 은근히 기뻐했다. 공민왕만 없애버리고 새임금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다면 정세운 등을 모살한 허물이 드러나더라도 염려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 십이년 삼월, 김용은 그의 심복인 김수(金守), 조련(曹連) 등 오십여 명을 모아놓고 밀회한 끝에 밤이 이슥하자 갑자기 행궁을 습격하게 했다.
김용의 심복 김수 등은 흥왕사(興王寺)에 이르러 문지기를 베고 달려 들어가 위사(衛士)들을 죽이고 곧 침전에 이르렀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공민왕은 대경실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강달(李剛達)과 안도치(安都赤)라는 두 환관이 급히 달려 곁으로 다가왔다.
"상감, 급히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이강달이 왕에게 등을 대며 업히라고 재촉했다.
"피하다니, 어디로 피한단 말이냐?"
왕이 망설이니까 이강달은 다시 말했다.
"태후마마의 밀실로 피하시면 역적의 화를 면할 수 있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이강달은 왕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는 안도치를 돌아보며 일렀다. "뒷일은 잘 부탁하네."
안도치는 그 용모가 왕과 비슷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왕을 대신해서 역적들의 칼을 받으리라 마음먹고 왕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침상에 올라가 누웠다.
얼마 후 과연 역적들이 밀려 들어왔다. 역적들은 침상에 누워 있는 안도치를 보고 말했다.
"임금이다."
"저기 바로 임금이 누워있다."
소리치고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며 난자했다.
"만세! 대성공이다."
역적들은 안도치의 시체를 높이 들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자 뒤미처 김용이 들어왔다. 부하들이 죽였다고 떠드는 안도치를 보자 김용은 크게 놀랐다. 그는 항상 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며 안도치와도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일을 그르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왕을 놓쳤으니 속히 찾아야 하는데 왕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풀어 궁중 요소 요소를 수색케 했다. 김용의 부하들은 끝내 왕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닥치는 대로 궁중에 있던 신하들을 참살했는데 그 중에는 우정승 홍언박(洪彦博)도 끼어 있었다. 바로 이때 여러 대신들은 묘련사(妙蓮寺)에 모여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가 행궁을 역적들이 습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모아 역적을 치러 행궁으로 향했다.
이 정보를 듣자 김용은 또 한 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의 부하들은 겨우 오십여명이다. 대신들이 거느리는 수백명 관군과 마주 싸운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위기를 당하면 간교한 꾀를 자아내는 것이 김용의 장기였다. 일이 실패한 것을 깨닫자 부하들을 버려두고 혼자 탈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러분, 역적들이 행궁을 습격했소. 속히 그곳으로 가서 역적들을 토벌하시오. 나는 따로 군사를 모아 뒤미처 가겠소."
이렇게 외쳤다.
김용의 의도는 관군을 행궁으로 보내어 자기 부하들과 싸우게 하고 그 동안 자기는 따로 군사를 모아 그 뒤를 침으로써 관군을 협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군을 거느리고 있던 정승 유탁(柳濯)은 김용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그래서 군사를 그 곳에 머물게 하고 동정을 살피고 있으려니까 지휘자를 잃어버린 김용의 부하들이 하나 둘 흩어져서 김용을 찾기 시작했다.
김용의 입장은 대단히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문객 화지원(華之元)에게 눈짓을 해서 눈에 띄는 부하들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베어 죽이게 했다.
이번 반란의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관군의 손에 사로잡힌 부하들까지도 국문하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이렇게 되니 아무리 입을 씻고 딴청을 해도 여러 사람의 의심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왕도 마침내 김용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나머지 그를 밀성(密城)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대호군 임견미(林堅味), 호군 김두(金斗)를 보내어 계림부로 압송하고 안렴 이보림(李寶林)과 더불어 김용의 죄상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 지경이 되어도 김용은 어디까지나 자기 죄를 은폐하려고 들었다.
"내 이미 팔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원하는 일은 이루지 못한 것이 없는데 어찌 감히 상감을 범할 생각이 있었겠소. 다만 홍시중을 없애려고 거사했을 뿐이요."
이렇게 변명을 했다.
그러나 임견미 등은 그 변설에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감의 복장을 하고 침전에 누워있던 안도치를 죽인 것은 무슨 까닭이지?"
날카롭게 따져 묻자 뻔뻔스러운 김용도 더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견미 등은 김용의 목을 베어 서울로 보낸 다음 그 무리 십여명도 역시 목을 베고, 나머지 수십명은 멀리 유배시켰다.
김용의 반란과 죽음은 공민왕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내가 가장 믿고 아끼던 자가 나를 배반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다니 장차 누구를 믿어야 옳단 말이냐?"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공민왕이 한탄한바와 같이 모처럼 좋은 포부를 품고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하게 된 것은 어진 신하를 만나지 못했고 또 현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안목이 없었던 때문이었다.
김용의 정변이 실패한 후에도 그와 내통했던 최유는 공민왕을 폐출할 뜻을 버리지 않았다. 기황후를 통해서 한층 더 심한 공작을 전개했다.
원나라 순제도 공민왕의 반항적인 태도를 불쾌히 여기고 있던 때였으므로 황후와 최유 등의 진언을 들어 마침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으려고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그 뜻을 전하는 한편 왕의 인(印)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원조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사신에게 폐립의 이유를 꼬치꼬치 따진 다음 군대를 사열하고 무기를 구경시켜 폐립을 강행한다면 무력으로 맞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신이 돌아가서 공민왕의 태도를 보고하자 그때 좌정승의 위관(僞官)에 임명되어 있던 최유는 원제에게 요양(遼陽)의 군사 일만을 청하여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했다. 무력으로 자기 야망을 채워 보려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려측에서는 최영, 이성계 등 장수를 보내어 이를 맞아 크게 격파하니 적군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 겨우 십칠기였다고 한다. 군사적 압력으로도 실패한 원나라 순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공민왕의 왕위를 회복케 하고 최유를 잡아 압송하여 극형에 처하게 함으로써 고려측의 감정을 겨우 달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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