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부터 다른 첩들보다 한층 더 김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 양반 나이는 젊지만 녹록치 않은 분야. 지금은 저렇게 아무에게나 굽신거리지만 때만 오면 크게 될 분일 거야.’
이렇게 생각한 안심은 김준과 접촉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절에서 크게 불공을 드리는 일이 있어서 집안이 거의 비다시피 되었다. 그런 참에 김준이 마침 안심의 방 앞을 지나간다. 절호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안심이 놓칠 까닭이 없었다.
"저, 잠간 나 좀 보시어요."
안심은 나지막이 불렀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김준은 누구에게나 하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않고 육중한 체구를 굽신거리며 안심에게로 다가갔다.
"하도 심심해서 그래요. 항상 떠들썩하던 집안이 조용해지니까 몹시 하루 해가 지루한데요. 잠간 들어오셔서 재미나는 얘기나 들려 주세요."
김준은 성큼성큼 안심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호젓이 한방에 앉게 되었지만 평소에 어디나 수시로 드나드는 버릇이 있는 김준이므로 별로 어색할 것도 없었다. "무슨 얘길 하란 말씀입니까?" 하면서 안심을 건너다 보던 김준은 안심의 표정에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달리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잔잔한 추파를 보내고 있는 폼은 여느 때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눈초리 깊숙한 곳에 물결치고 있는 것은 좀 더 쉽게 잡아낼 수 없는 아득한 것이며 지극히 벅찬 것인 것처럼 느껴진다. 김준은 자기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려는 것을 느끼고 안심의 눈속에 물결치고 있는 것의 의미를 포기하려고 계산하고 있는데, 안심이 살포시 일어나더니 "술이나 한잔 드시겠어요?"한다.
"글쎄요…"
김준은 가타부타 분명한 의사를 표시를 하지 않고 안심의 눈치만 살핀다. "왜 겁이 나시어요?" 하면서 안심은 소리없이 웃는다. 그 말에 김준은 비로소 안심의 진의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 여자가 나를 유인하러 드는구나.’
그러나 뒤이어 또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를 유인해서 어쩌자는 걸까?’
망설이고 있었다.
"워낙 담이 크신 분이니까, 겁나지 않으시겠죠?"
안심은 이런 말을 한다. "담이 크지 않아도 겁날 거야 없죠. 나쁜 짓을 하지 않을 바에야…"
이쯤 응수하고 또 눈치를 살펴 보았다. "그럼 나쁜 짓이라면 겁이 난단 말씀이어요."
안심의 말은 차츰 정통으로 접근하는 듯싶다.
"나쁜 짓도 나쁜 짓 나름이죠."
김준은 약간 대담한 말을 던지며 안심의 촉촉한 두 눈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어떤 나쁜 짓이면 겁이 안 나시어요."
"그야 뻔하죠.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그렇구요?" "둘이 뉘우치지 않을 일…"
"또요?" "장차 크게 이로울 일…"
"그것 뿐이어요?" "그것 뿐이죠."
"그렇다면 나쁜 일 좀 할까요?"
"좋소이다."
한마디 하고 김준은 안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안심은 손목을 잡힌 채 여전히 눈웃음만 치더니 말했다.
"내가 생각하던대로 대단한 분이군요."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김준의 입가에는 이제 자신이 만만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진양후께서 가장 총애하는 첩의 손목을 잡으셨다가 그 첩이 소리라도 지르면 당신은 어떻게 되실 줄 알고 계시겠죠?"
"그야 당장에 모가지가 달아나겠지만 아마 소리를 지르진 않으실 겁니다."
"그러세요? 그렇지만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아요? 내가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른다면…"하면서 안심은 별안간 한쪽 손으로 방문을 열어 젖히려 한다.
정말로 소리를 지르겠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할 뿐이지."
김준은 안심의 손목을 잡았던 손에 힘을 주어 나꾸어 들이더니 한편 손으로 가는 목을 휘어감아 끌어 당기고는 수염이 무성한 입으로 안심의 붉은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되자 금방 소리를 지를 것 같던 안심은 오히려 가는 팔을 김준의 목에 감고 쌔근거린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맺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불장난이거나 욕정에 못 이겨 취한 행동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각 계산이 있어서 한 행동이었다.
안심이 김준을 유인한 것은 다른 종이나 첩들처럼 김준의 준수한 풍채에 마음이 동한 때문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겸손한 체하면서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있는 야망에 마음이 끌린 것이었다. 물론, 지금 최이의 총애를 받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첩은 첩이다. 어엿한 세도가의 본부인으로서 행세하고 싶은 것이 안심의 소망이었다.
이미 권력이 극에 달하고 모든 제도가 완비된 최이의 첩으로서는 비록 최이가 원하더라도 첩을 본부인으로 고쳐 앉힐 가망은 없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고개를 드는 강자(强者)와 결합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아직 주위 사람들에게 얽히지도 않고 그다지 체면도 중요시할 필요가 없는 젊은이와 결합한다면 그 젊은이에게 본부인이 있더라도 비켜놓고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다가 그 젊은이가 권세를 잡는다면 떳떳한 세도가의 본부인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안심은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을 찍은 것이 바로 김준이었던 것이다.
김준이 안심의 유인에 스스로 말려 들어간 것은 역시 엉뚱한 계산 하에서였다. 자기의 힘을 기르려면 무엇보다도 배경이 되는 최이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최이의 총애를 받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나이와 사나이 사이에 오고 가는 이해관계와 정분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밀접한 접근하려면 인간적인 약점까지도 남김없이 드러내는 여자의 힘이 필요하다.
다른 권신들의 예로 보면 자기 혈친을 권세가에게 들여보내어 그러한 길을 트기도 하지만 김준에게는 마땅한 혈친이 없다. 그러므로 이미 최이의 총애를 받는 자들 중에서 가장 목적을 달성하기 적합한 여자와 접근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안심의 유인을 받았으니 응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이해관계가 서로 들어맞은 김준과 안심은 있는 꾀를 다 짜서 최이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다. 기회 있을 적마다 안심은 김준의 인품과 재주와 충성심을 최이의 귀에 속삭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계산대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부터 남을 믿지 않던 최이는 안심이 갑자기 김준을 칭찬하기 시작하자 그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계집이 이렇게 야단하는 걸 보니 혹시 김준하고 내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일찍이 최이는 동화(桐花)와 최준문(崔俊文)으로 말미암아 그와 비슷한 일로 더운 물을 켜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안심이란 계집은 동화란 계집과 비슷한 데가 있고 김준이란 놈은 최준문이란 놈과 비슷한 데가 있단 말야.’
최이는 은밀히 사람을 놓아 두 사람의 비밀을 탐지하게 했다. 아무리 은밀히 하는 일이라도 남녀의 정사란 캐어내려고 하면 감추기 어려운 법이다. 그날도 집안이 조용한 틈을 타서 김준과 안심이 밀회하고 있는데 최이가 보낸 여종이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이 발각되자 김준은 독특한 웃음을 웃으며 "얘,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지 않니?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인데…"하고는 많은 금품으로 매수하려 했다.
그러나 여종에겐 최이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달려가 최이에게 고해 바쳤다. "과연 그 년놈들이 내통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듯 은혜를 베풀었는데 주인을 배반했단 말이지?"
길길이 뛰며 노한 최이는 처음엔 남녀를 때려 죽일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일국의 정사를 장악하고 있는 처지이며 인신(人臣)의 극에 이른 지위에 있었다. 공연히 떠들어대면 자기 집안의 수치를 드러내는 셈이 되고 가혹한 형벌을 주면 도량이 좁다는 비난을 받기도 쉽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김준을 멀리 귀양을 보내고 안심은 집에서 쫓아냈다. 이렇게 되니 김준과 안심의 계교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나 그만 일로 자기의 야망을 포기할 김준이 아니었다.
일단 귀양살이를 하기는 했지만 박송비, 송길유 등 심복의 힘을 빌어 몇 해 아니 가서 풀려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다시 암약을 하기 시작했다.
최이에게는 원래 본처 소생의 자식이 없었다. 다만 서련방(瑞蓮房)이란 첩의 몸에서 난 만종(萬宗), 만전(萬全) 두 아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첩들의 자식을 후사로 삼는다는 것을 최이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날 동화나 안심에게 덴 때문도 있을 것이다.
‘첩의 자식을 후사로 삼느니 차라리 사위에게 내 권세를 물려 주는 편이 낫겠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사위 김약선(金若先)을 은밀히 불러 자기 뜻을 전했다. 김약선은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로 최이의 사위가 되자 최이의 총애를 극진히 받았으며, 벼슬이 중추원 부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고종 이십이년에는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았으니 명실공히 최이의 후계자로서 부끄러울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위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비록 첩의 자식이지만 엄연한 두 아들이 있는 이상 불평을 품고 어떤 난동을 일으킬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두 첩의 자식을 절로 보내어 중을 만들어 버렸다.
김준은 이런 후계자들간의 알력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중이 되었지만 만종과 만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집 한간을 장만하고 안심과도 동거하게 된 김준은 어느날 안심의 방을 찾아가서 이런 말을 꺼냈다.
"말할 것도 없죠. 특히 만전이란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니까요."
"만일 약선을 쫓아내고 만전을 후계자로 삼게하는 게 공을 세운다면 우리도 셈이 펼 게 아닌가?"
"이를 말씀예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일이 모두 풀리게 될걸요."
"그것 참 그렇겠군!"
김준은 한참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것 봐. 자네는 원래 만전의 에미 서련방과 잘 아는 처지지?"
"그럼요. 내가 진양후의 총애를 받았을 때엔 같은 첩이지만 서련방은 샘을 내지 않고 나한테 잘 굴었구 나도 그 사람이 진양후의 아들을 낳은 걸 보고 잘 봐줬으니까요." "그렇다면 잘 됐군. 우선 서련방을 만나서, 자기 아들을 진양후의 후사로 삼는데 우리가 힘을 쓰면 단단히 보답하겠느냐고 다짐을 받아보도록 하게."
안심은 즉시 서련방을 찾아갔다.
서련방은 뜻하지 않은 제의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한 다음 안심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지만, 그런 어려운 일이 쉽게 성사할 수 있겠수? 일을 잘못 저질렀다가 약선이놈의 노여움을 사서 큰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마음 약한 서련방은 이렇게 걱정하기도 한다.
"아이 참, 형님두 별 걱정 다하시는구료. 이런 일을 누가 내놓고 한답디까? 형님네나 우리나 겉에 나타나지 않고 하는 수가 다 있단 말예요. 일이 탄로 나도 화는 다른 사람이 입게 할테니 조금도 염려 말아요."
안심이 서련방의 마음을 떠보고 나자 한편 김준은 따로 쌍봉사(雙峰寺)로 만전을 찾아가서 그 의향을 떠보았다. 만전도 역시 두 말 없이 찬동했다.
그리고는 묻는다.
"그런데 약선이놈을 없앨 계교란 어떤 계교요?"
그러나 김준은 야릇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런 건 모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아시면 일이 누설되기 쉽고 오히려 해가 되실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기 계책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 김준은 다시 안심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어떠세요? 만전이란 사람 좋아하죠?"
"좋아하구 말구… 그런데 이것 봐. 이번엔 자네가 또 좀 수고해야겠어."
김준이 이렇게 말하니까 안심은 곁눈질로 남자를 흘겨보며 앙탈을 부려본다.
"또 내가 움직여야 해요? 남들과 달라서 아무 보답두 받지두 못할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일 크게 보답을 받을 사람은 바로 안심일 텐데."
"정말이지?"
"암, 정말이지."
"그 말 잊으면 안 돼요."
"잊을 까닭이 없지. 그러니 수고 좀 하시게."
"이번엔 또 누굴 구슬리라는 거예요?"
"약선이 처를 좀 만나 줘."
"하필 또 왜 그 사람을 만나라구 그러슈?"
안심은 약간 상을 찡그렸다.
김약선의 처, 그러니까 최이의 딸은 대단히 거만하고 사나운 여자였다. 타고난 성품이 그런데다가 자기 딸이 태자비가 된 후부터는 그 태도가 한층 더 심했다. 당대의 세도가인 최이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딸인데다가, 한 나라의 왕태자의 장모란 귀한 몸이니 그럴싸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런 지위를 계산에 넣고도 만사가 지나칠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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