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등극한 즉시로 조서(調書)를 내렸다. <지난날의 궁예는 각 고을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일어나 도적의 무리들을 토평(討平)하고, 강역(彊域)을 넓히었으나, 아직 해내(海內)를 병합하기도 전에 혹독한 폭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간악한 거동으로 왕도(王道)를 그르치고, 허황한 위세로써 술책을 삼고 번거롭고 과중한 공부(貢賦)로서 만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으며 굉거란 궁궐을 짓느라고 노역(勞役)을 일으킨 탓으로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기에 이르렀느니라. 뿐만 아니라, 존호(尊號)를 절칭(竊稱)하고 처자를 참살하였으니 이는 천지신명이 용납지 않을 바라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짐은 제공(諸公)의 추대하는 뜻을 받아 등극하였으므로 이제 백성들과 더불어 순풍양속(醇風良俗)을 기르고 청신한 정사(政事)를 베풀고자하여 군신(君臣)이 뜻을 합하여 고기가 물과 더불어 노는 듯,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어울리는 듯 함께 즐기기를 바라노니 내외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짐의 뜻을 헤아릴 지어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사례하여 아뢴다.
"신등(臣等)은 지난날, 궁예 치하에 혹독한 박해를 받았사오며, 무고한 백성들은 포악한 정사로 도탄에 빠져 있었사오나 이제 천행으로 영명하신 성군을 모시게 되었사오니 어찌 힘을 다하여 성은을 보답치 아니하겠사옵니까."
그 후 왕건은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맡겨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관직을 내리었다. 한찬 김행도(韓粲金行濤)를 광평시중(廣評侍中)으로,
한찬 금강(黔剛)을 내봉령(內奉令)으로, 한찬 임명필(林明弼)을 순군부령(徇軍部令)으로, 파진찬 임희(波珍粲林曦)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소판 진원(蘇判陣原)을 창부령(倉部令)으로, 한찬 염장(閻 )을 의형대령(義形臺令)으로, 한찬 귀평(歸評)을 도항사령(都航司令)으로, 한찬 손향(孫향)을 물장성령(物藏省令)으로, 소판 진경(秦勁)을 내천부령(內泉部令)으로, 파진찬 진정(秦靖)을 진각성령(珍閣省令)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품성이 단정하고, 만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여 창업 시초에 많은 공훈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밖에 사무에 숙달하고 청렴 결백하며 근면 민첩한 인재들을 가려 뽑아 정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등극한 이듬해인 태조 二년(AD 919) 정월, 도읍을 송악(松嶽=開城)에 정하여 궁궐을 짓고 삼성(三省), 육상서관(六尙書官), 구사(九寺)를 설치하였다. 또한 시장을 마련하고 왕성을 오부로 나누어 육아(六衙)를 설치하였으니, 바로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새나라의 서울로 정한 셈이다.
흔히 왕건의 개국은 포악한 궁예를 대신하고 만민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일사천리 아무 장해도 받지 않고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왕건이 등극한 후 육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일 안에 모반하는 사건이 네 차례나 일어났던 것이다.
첫 번으로 등극한 육월에 마군장군 환선길(馬軍將軍桓宣吉)이 역모한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 선길은 그 아우 향식(香寔)과 더불어 개국에 공이 있었으므로 태조는 그를 심복으로 삼고 정병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왕건이 등극하여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자 심중에 질시의 감정이 동하는 것을 금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그의 처가 뒤숭숭한 그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요."
"무엇이 알 수 없다는 거요, 부인?"
"저는 상공의 힘과 재주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생각해요. 아니 저뿐 아니라 상공이 거느리시는 여러 장졸들도 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데 어째서 남의 신하가 될 뿐 아니라, 조정의 중요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시고 몇몇 군사들만 거느리시는 것이어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동하던 선길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자 마침내 뜻을 정했다. 어쩌면 왕건이 거사할 때 유씨부인의 권고를 따른 전례를 흉내냈는지도 모른다. 모반의 뜻을 정한 선길은 은밀히 휘하 장졸들과 결탁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태조가 전상에서 학사(學士) 몇몇과 정사를 의논하고 있는 데 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때는 왔다!"
선길은 곧 휘하 장졸 오십명을 거느리고 내정으로 돌입하여 불문곡직 태조의 목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선길의 얼굴을 가리키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꾸짖었다.
"네 이놈, 선길아! 내 비록 너희 힘을 빌어 임금이 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는 다 천명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거늘 너는 감히 천명을 어기려 하느냐?"
어디 까지나 태연자약한 임금의 태도를 보고 선길은 몹시 당황했다. 제물에 겁을 먹은 선길 형제는 곧 군사들을 거느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제서야 태조도 급히 군사를 모아 추격을 시키니, 선길, 향식 두 형제는 마침내 잡히어 처형되고 말았다.
그달 안에 또 한건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 마군대장군 이흔암(馬軍大將軍伊昕巖)이 모반한 것이다.
이흔암은 원래 궁술과 마술에는 능하지만 별다른 식견은 없고, 유리한 일을 찾기에 바쁜 자였다고 한다. 일찍이 궁예의 신하로 있다가 웅주(熊州) 싸움에 공을 세워 그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후 왕건이 등극하자, 무슨 생각을 품었던지 군사를 버리고 상경했다. 이흔암이 들고 있던 집은 의형대령 염장(義形臺令 閻 )의 이웃집이었다.
염장이 보자니까 흔암의 집에는 밤이 되면 장정들이 드나들며 웅성거렸다. 개국 초이니 조그만 일에도 남의 의심을 사기 쉬운 법이라 염장도 흔암의 거동을 몹시 수상히 여겼다. 그래서 은밀히 태조를 뵙고 아뢰었다.
"흔암의 거동이 아무래도 수상하옵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처치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진(鎭)을 버리고 상경한 것만 해도 따지자면 큰 죄가 아니겠소?"
"그러하오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죽인다면 민심에 끼치는바 적지 않을까 하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고?"
"그의 거동을 좀 더 엿보는 것이 가할까 하옵니다."
"경이 그 일을 맡아 주겠소?"
"신이나 신의 가족은 흔암의 가족들이 잘 아는 터이므로 경계해서 본심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차라리 궁인 한 사람을 신의 집에 숨겨두어 엿보게 하는 것이 상책일까 하옵니다."
"경의 의견대로 시행토록 하겠소."
태조는 곧 궁인 한사람을 염장의 집에 보내어 숨게 했다. 그리고는 밤이면 흔암의 집을 배회하며 거동을 살피게 했다.
어느날 밤 여전히 흔암의 집에는 몇몇 장정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모의를 하는지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나왔다. 흔암의 처 환씨(桓氏)였다.
궁인이 행인을 가장하고 그 앞을 지나서 나무그늘에 숨어 엿보고 있자니까 환씨는 변소로 들어갔다. 궁인은 나무 그늘에서 나와 변소 뒤로 다가갔다. '환씨는 원래 말이 많다고 들었는데 혼잣소리라도 할는지 모를 거야.'
이렇게 생각한 궁인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후, 변소에서 나온 환씨가 하늘을 우러러보더니 과연 혼잣소리를 한다.
"어머나! 하늘엔 별도 많기도 하네. 그렇지만 우리 남편의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나도 저 하늘의 별을 볼 수 없게 되겠지."
이 말을 들은 궁인은 즉시 궁궐로 달려가서 태조에게 고해 바쳤다.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하늘의 별을 우러러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일이란 어떠한 일일고?"
"죽음을 각오한 일이니 필시 역모가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이에 태조는 즉시 이흔암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게 했다. 그리고는 백관(百官)을 모아 의논을 해보았다.
"경들은 이흔암을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한 신하가 나서며 "못된 풀은 떡잎부터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흔암이 아직 거사는 하지 않았사오나 역적 모의를 한 것만은 의심할 바 없사오니 일찌감치 죽여 화근을 없애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오."
그리고 만조 백관 모두다 이 말에 찬동하니 태조는 친히 흔암을 불러내어 심문하였다.
"네 원래 흉칙한 마음을 품었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안다. 인정으로는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지 않으나 천하의 법은 사사로이 어길 수 없는 것이로고."
이 말에 이흔암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것을 태조와 여러 신하들은 복죄(服罪)한 것으로 간주하고 거리에 끌어내어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었다.
태조는 이흔암 한 사람만 사형에 처했을 뿐 그 가족과 무리들의 죄는 묻지 않았으니,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하던 환씨에게만은 묘하게도 그 염려가 기우로 돌아간 셈이다.
이밖에 그 해 구월 순군리 임춘길(徇軍吏 林春吉)이 그의 고향인 청주 사람 배총규(裵悤規) 등과 더불어 모반하였다가 잡혀 죽었다.
또 시월에는 파진찬 진선(陣瑄)이 그 아우 선장(宣長)과 더불어 역모를 꾸미다가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개국 초부터 모반하는 자들이 속출하였으니 태조의 근심은 끊일 날이 없었으나 왕성한 의욕과 넓은 도량으로 어려운 고비를 잘 극복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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