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려 궁중비사] 5. 三國의 統一

鶴山 徐 仁 2007. 2. 28. 19:39
팔만대장경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발흥하자 신라의 국운은 나날이 기울어 갔다.
 
신흥 양국 사이에 끼어 항상 위협을 당하는 터인데, 왕과 여러 신하들은 국방에 전념하지 아니하고 사치와 유흥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려 태조 십년(西紀 九二七) 구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향해 대거 진격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후백제군은 근품성(尙州)을 쳐서 불태우고, 고울부(氷川)를 함몰하고,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곧 사람을 고려로 보내어 원군을 청했다. 고려 태조는 즉시 시중 공훤(公萱), 대상 손행(大相孫幸), 정조 연주(正朝聯珠) 등의 중신을 불러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화호(和好)한지 오래이거늘 이렇듯 위급함을 알리니 어찌 구원치 않겠는가."하였다. 
 
그런 즉, 공훤도 "견훤이 신라를 짓밟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곧 견훤의 세력을 키워주는 꼴이 되므로 하루 바삐 진격하여 견제해야 될 줄로 압니다." 이렇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공훤 등에게 일만 대군을 주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다.
 
신라 서울 근교에 포진한 후백제군은 신라측의 동정을 엿보기 위하여 잠시 공격을 멈추고 있었다. 
 
어리석은 경애왕은 이에 마음을 놓고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아가 주연을 베풀고 질탕하게 놀고만 있었다.
 
이 첩보를 접한 견훤은 전군을 독려하여 노도처럼 진격해 들어갔다.
 
경애왕은 대경실색하여 왕비와 함께 서울 남쪽에 있는 이궁(離宮)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그리고 그의 시신과 궁녀들은 모두 적병에게 잡히고 말았다. 삽시간에 경주는 후백제군의 천지가 되어버렸다. 
 
견훤은 장졸들을 시켜 마음껏 약탈을 감행케 하였으며, 나중에는 이궁에 숨은 경애왕까지 수색하여 앞에 꿇어앉히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신라 왕비를 능욕하고 수하 장졸들로 하여금 왕의 빈첩(嬪妾)들을 범하게 하였다.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왕의 아우 김부(金傅)를 세워 대신 왕으로 삼았으니 이가 곧 경순왕(敬順王)이다.
 
한편 태조는 고려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신라 서울이 후백제군에게 짓밟혔다는 보고를 받자 크게 노했다. 
 
곧 사신을 신라로 파견하여 조제케 하는 한편 친히 정기(精騎) 오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大邱부근)에서 후백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적군에게 포위되어 겨우 목숨만 건졌다.
 
이렇게 되니 신라는 이제 명목만의 국가이고 반도(半島)는 고려와 후백제 양대 세력으로 갈라진 셈이었다. 그 후 고려는 후백제를 상대로 여러 해를 두고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혹은 화친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시운은 드디어 고려 태조 앞에 찾아들었다. 후백제의 왕실에서는 부자(父子)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원래 견훤은 많은 처첩(妻妾)을 얻어 아들 십여명을 두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특히 용력(甬力)이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많으므로 그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니 금강의 형이 되는 신검(神劒)·양검(良劒)·용검(龍劒)등이 불만을 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신검과 양검 등은 은밀히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고려 태조 십팔년 삼월 견훤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을 파견하여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이 스스로 대왕(大王)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견훤은 유폐된 금산사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 해 육월, 그곳을 탈출하여 나주(羅州)로 간 다음 고려에 망명할 것을 청했다. 
 
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장군 유금필(庾金弼) 등을 파견하여 견훤을 맞게 하였는데 구선(軍船) 사십 척이나 동원하는 대영접이었다.
 
견훤이 서울에 당도하자 태조는 견훤을 상부(尙父)로 존칭하고, 남궁(南宮)에 거처하게 하였으며, 그의 벼슬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양주(楊州)를 주는 한편, 노비(奴婢) 사십 명과 말 열 필을 딸리게 하였다. 
 
망명객으로서는 지극히 융숭한 대접이었으니 이런 점이 또한 왕건이 중심(衆心)을 얻는 장점의 하나일 것이다.
 
견훤의 망명은 결국 후백제의 힘을 크게 꺾는 결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후백제를 정벌할 대의명분을 얻게 된 셈이었다.
 
왕건의 최종 목표는 삼국의 통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만사(萬事)를 강행(强行)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가 혁명을 일으켜 자기 주인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할 때에도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의 통일도 그러한 방법으로 추진시켰다.
 
그 해 십일월, 신라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고려 서울인 개경(開京)으로 향했다. 신라의 사직을 고려에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개경에 당도한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글을 올렸다.
 
<본국은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천운(天運)이 이미 다하여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움으로 차라리  대왕께 나라를 바치고 한 신하가 되기를 원하옵니다.>
 
이러한 내용의 글이었다. 
 
물론 경순왕이 이런 글을 바치기에 이르기까지는 가지가지 비극도 있었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압력도 가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어디까지나 고려왕이 신라국을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신라왕이 고려왕에게 나라를 바치는 형식을 취하게 하였다.
 
이제는 다 익은 음식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도 왕건은 쉽게 수저를 대지 않았다.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왕건의 진의를 잘 알고 있는 여러 신하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 해 십이월,  여러 신하들은 왕에게 상주하였다.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사온 즉 어찌 신라왕의 간청을 물리칠 수 있겠사옵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꺼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은 마침내 천덕전(天德殿)으로 나와서 백관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짐은 신라와 더불어 동맹하여 장차 두 나라가 영원토록 화목하게 사직을 보전하려 하였는데 지금 신라왕이 굳이 신례(臣禮)할 것을 청하고, 경들 또한 그를 옳다 하므로 짐의 마음 비록 부끄러운바 없지 않으나 중심(衆心)을 어길 수 없어 이를 쫓겠노라."
 
그리고는 곧 신라왕으로부터 정견(庭見)의 예를 받으니, 모든 신하들의 이를 경하하는 소리 궁성을 뒤흔들 지경이었다.
 
이에 왕은 신라왕을 정승공(政丞公)으로 삼아 태자의 윗자리에 앉히고, 세록(歲祿) 천석을 주고 궁을 새로 지어 주고 신라 서울이었던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리고는 유씨부인 소생인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를 그에게 출가 시켰다. 김부는 이미 나이 중년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들어 강자(强者)에게 바칠 만한 뱃심 없는 위인이었으며 또 그의 처지가 의욕적인 소망을 품을 아무것도 못되므로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자 거기 빠져버렸다. 
 
이것 또한 그러한 미인계로 김부의 마음을 묶어 놓자는 왕건의 고등술책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비를 내몬 후백제 신검 등의 잔당들뿐이었다.
 
태조 十九년(西紀 九三六) 육월, 견훤이 태조에게 "노신(老臣)이 멀리 내투(內投)하여 성화(聖化)를 입었사오나 도적 같은 자식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사온즉 이를 멸망할 군사를 나누어 주시오."하고 간청했다.
 
이에 왕은 태자 무(武)와 장군 박술희(朴述希)로 하여금 일만 대군을 거느리고 먼저 천안부(天安府)로 진격시켰으며, 그해 구월에는 왕이 친히 삼군을 거느리고 일선군(一善群=善山)으로 진격하니 신검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마주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신검 등은 마침내 고려군에게 대패하고 신검은 아우 양검, 용검과 함께 항복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왕건은 그의 숙망이던 삼국의 통일을 성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