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인 무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와의 소생이다. 그는 신라 신덕왕(新德王) 원년(西紀 九一二)에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는 기구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왕건은 일찍이 금성군(錦城=지금의 羅州)에 웅거한 후백제의 군사를 정벌한 일이 있었다. 그때, 태자 무의 모친 오씨는 그 관내 목포(木浦)에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재색이 절등하고 남달리 총명하여, 자기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사람들까지도 칭찬해 마지않았다. 오씨는 집안이 가난한 때문에 항상 길쌈을 하여 가계를 도왔다.
어느날 오씨는 집 앞 우물에서 자기 손으로 뽑은 실을 빨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오색 구름이 내려오더니 그 우물 위를 빙빙 돈다.
"저게 웬일일까?"
"무슨 변이 일어날 징조가 아닐까?"
사람들이 놀라 수근거리니까, 해박한 한 노인이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큰 경사가 일어날 징조야. 예로부터 큰 경사가 일어나려면 저렇게 오색구름이 떠돌게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런 경사가 일어날까요?"
"말할 것도 없이 그 구름 아래 있는 오씨 집안이지. 그리고 그 집 딸이 실을 빨 때 생긴 일이니까 아마 그 색시한테 세상에 깜짝 놀랄 만한 좋은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지."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우물을 완사천(浣紗泉)이라 부르고, 오씨집 규수를 더욱 각별히 대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가서 오처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목포 바다에서 큰 용이 나오더니 자기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네.’
오처녀는 그 꿈이 어떠한 꿈인지 부모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부모들도, 그리고 유식하다는 동네 노인들도 제대로 해몽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꿈이 상서로운 꿈이라는 결론만은 내리게 되었다.
오색구름의 사건과 용꿈을 꾼 사건은 오처녀에게 야릇한 자존심을 갖게 했다.
‘나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반드시 큰 행운이 닥쳐올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모든 언동을 신중히 하게 되었다. 비록 살림은 구차했으나 재색이 절등한 처녀라 나이가 들자 혼담이 빗발치듯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 적마다 모두 한 마디에 거절했다. 어떠한 큰 행운이 닥쳐올는지 모르는데 보잘 것 없는 시골 총각에게 시집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처녀는 뜻 깊은 완사천에서 빨래를 하며 멀리 목포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나를 데려갈 분은 저 바다에서 오실는지도 몰라. 찬란한 갑옷을 입고 금으로 장식한 용마를 빗겨 탄 대장군이나 왕자님일는지도 몰라.’
이러한 공상을 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처녀가 기다리던 행운은 드디어 찾아왔다.
그날도 오처녀는 완사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포구쪽으로부터 몇몇 장졸을 거느린 늠름한 장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장군의 모습을 바라보자 오처녀는 어쩐지 가슴이 설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이제 임박하였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연 그 장군은 오처녀의 곁에 오더니 말을 멈추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런 시골에도 저렇듯 어여쁜 처녀가 있을까?’
장군은 부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이 처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처녀는 귀뿌리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그러나 못들은 체 빨래만 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군이 한 병졸에게 무엇인지 속삭인다. 얼마 후 병졸은 오처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우리 장군께서 피곤하시어 잠시 쉬어 가시고자 하는데 처녀의 집은 어디요?" 하고 물어 보았다.
"소녀의 집은 바로 이곳이온데 너무 누추해서요."
하면서도 우물 앞 초가집을 가리겼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장군이 직접 말을 건네왔다. "전진 속을 왕래하는 몸인데 어찌 반드시 고대 광실을 바라겠소? 비바람만 가릴 수 있는 곳이라면 족하니 좀 쉬어 가게 해 주오."
그러나 남달리 큰 꿈을 품고 있는 처녀는 호락호락하게 응하지 않았다.
"저, 죄송하오나 장군은 어떠한 분이시온 지요?"
"나는 바로 태봉국(泰封國) 한찬해군대장군(韓粲海軍大將軍)으로 있는 왕건이란 사람이요." 그 말을 듣자 처녀의 두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이제야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생각한 것이다.
태봉국의 왕건 장군이라 하면 장차 천하를 호령할 대인물이라는 소문을 처녀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시오면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드시어요."
처녀는 왕건을 자기 집으로 인도했다.
뜻하지 않은 귀빈을 맞아 처녀의 부모들도 크게 기뻐하였다. 가난한 살림이나마 정성을 다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왕건이 처녀의 집에 묵기로 한 것은 물론 딴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왕건의 나이 서른 다섯 살, 이미 유씨부인까지 있는 터였지만 여색(女色)에는 결코 담담치 않았다.
처녀가 음식상을 가지고 들어가자 그 온화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점잖게 물어 보았다.
"면전에서 이렇게 말하는 건 뭣하지만 규수는 보기 드문 가인이니 물론 혼처도 이미 정해진 몸이겠구료.“
이 말을 듣자 처녀는 고개를 푹 숙이다가 좌우로 흔든다. "그건 놀라운 일인데. 이렇듯 아리따운 규수를 그냥 버려두다니…. 옳지, 좋은 자리를 지나치게 고르시는 모양이구료."
그제서야 처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고 보잘 것 없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 자고로 혼인이란 사람과 사람이 맺어지는 것이지, 집안과 집안이 맺어지는 것이겠소? 나 같으면 처녀의 신분이 지금보다 더 미천하고 보잘 것 없어도 기꺼이 청혼하겠소."
이 말에 처녀는 "진정이시어요? 장군님." 하고 왕건을 똑바로 응시했다.
왕건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받았다. "장부 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하오. 진정이 아니고 어찌 이런 말을 입에 담겠소?"
"그러하오나 소녀는 믿어지지 아니하옵니다."
다소곳이 숙이는 모습이 오히려 장부의 간장을 녹이는 듯하였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증거를 남겨두겠…"
왕건의 숨결이 거칠어지더니 잽싸게 처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그리고는 금침도 아닌 돗자리 바닥에 덮쳐 눕혔다. 처녀는 잠간 항거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시늉 뿐, 이내 사나이의 억센 품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특히 왕건의 욕정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처녀의 몸에서 자기 몸을 떼어 돗자리 위에다 사정(射精)을 하고 말았다.
의식적인 피임(避妊)을 한 것이다.
이런 마당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 왕건다운 신중한 처사라고 하겠다.
왕건에게는 이미 그때, 정실부인으로 유씨가 있었다. 아직 유씨의 소생은 없었지만 젊음이 다 간 것이 아니니 언제 득남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왕건이 별다른 야심을 품지 않았다면 유씨부인의 소생이 생기더라도 오씨가 임신하는 걸 꺼릴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때 이미 천하를 호령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정실부인이 아닌 여자의 몸에서 장자(長子)가 출생한다면 장차 왕통을 계승시킬 때 큰 화근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오씨의 가문이 너무나 미천하므로 그 피를 받은 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상으로는 지극히 달갑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오씨는 원래 총명한 여자였다. 보통 여자 같으면 그런 꼴을 당했을 때 수치와 분노로 바들바들 떨기가 일쑤였겠지만 오씨는 재빠르게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오씨는 왕건이 자리위에 쏟아놓은 정액을 얼른 삼켜서 왕건의 씨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은 너무나 상식 밖이므로 정액을 삼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음부(陰部)에 넣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야만 다소 과학적으로 수긍이 갈는지 모른다.
또는, 피임하려는 왕건에게 아양을 떨어 다시 정욕을 불태우게 함으로써 정상적인 정교를 맺었을 것이라고 보는 수도 있다.
그달부터 오씨에겐 태기가 있어 십삭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곧 무(武)다. 무는 비록 미천한 모친의 소생이며, 잉태할 때부터 기구한 시련을 겪었으나, 어려서부터 성품이 출중하고 용력이 남달리 뛰어났다. 그러므로 왕건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또 장자이기도 해서 꼭 태자를 삼고 싶었다.
그러나 외가가 미천하다는 허물을 내세워 여러 신하들이 반대할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곰곰이 궁리한 끝에 왕자가 입는 자황포(紫黃抱)를 허름한 상자에 넣어 오씨에게 주었다.
즉 네가 낳은 무에게 그 옷을 입히라는 뜻이니, 다시 말하면 무를 태자로 삼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오씨는 왕의 뜻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만사를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처리해야 했으므로 무엇보다 먼저 무를 태자로 삼도록 상주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
오씨는 몇 달 생각한 끝에 대광(大匡) 박술희를 은밀히 불러들였다. 박술희는 혜성군(慧城郡)사람으로 대승 득의(大乘得宜)의 아들이다. 성품으로 용맹하고 호방하여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지 거리낌없이 해치우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흔히 꺼려하는 육류(肉類)를 즐겨 먹었을 뿐 아니라, 두꺼비, 개구리, 개미같이 징그러운 것까지 서슴지 않고 잡아먹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궁예의 신하였으나 후에 왕건을 섬기고 군공을 거듭 세워 벼슬이 대광에까지 이르렀다. 오씨와 박술희가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그를 부른 것으로 보아 그의 성품이 큰일을 당부하기에 믿음직한바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박술희를 부른 오씨는 임금이 준 자황포를 보였다. "알겠소이다! 대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곧 그렇게 추진 할 뿐이외다."
박술희는 곧 왕을 뵙고 왕자 무로 태자를 삼을 것을 상주하니, 여러 신하들 중에는 불만을 품는 자도 없지 않았지만 그 호협한 기상에 눌리어 감히 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도 중의(衆議)를 따르는 형식 아래 무를 태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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