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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20. 新羅의 最後

鶴山 徐 仁 2007. 2. 27. 08:57
첨성대이래서 왕이 된 김부는 제五十六대의 경순왕(敬順王)이로서,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형이던 경애왕이 없어진 후에는 신라의 대신들도 아우 김부를 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록 견훤이 괴뢰로 세웠어도 별다른 경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순왕은 지혜가 있고 침착했으므로 기왕 기울어서 망하는 신라의 최후를 백성의 피를 강요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온하게 처리하려 했다.
 
최후의 신라 왕으로서 새로 일어난 고려의 태조(太祖) 왕건에게 자진해서 양국(讓國)한 애화(哀話)의 일단은 다음과 같다.
 
왕을 죽이고 신하들을 서당(西堂)에 모아 놓고 당면한 왕실의 비극과 비상시국의 수습을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대신들은 김부의 신왕 즉위를 찬성하고 성왕의 국상을 통곡 속에 거행했다. 고려의 왕건은 사신을 보내서 경애왕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경주로 진주했다.
 
경순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 밖까지 나가서 고려 태조를 영접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큰 환영잔치를 베풀어서 신라를 도와주는 호의에 감사의 성의를 표했다.
 
경순왕은 고려태조 왕건에게 “과인이 부덕하여 견훤의 반란을 막지 못하고 선왕이 참환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태조의 응원으로 역적은 일단 후퇴했으나 앞으로 이 어지러워진 나라를 어찌 수습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태조는 선왕과의 우의를 계속 베풀어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과인의 응원병 출동이 늦어서 이런 불의의 화를 입으신 귀국 왕실에 대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론 견훤 등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과인의 미력을 아끼지 않을 테니 과상(過傷)하시지 마십시오.”
 
왕건이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으므로 경순왕이하 백관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여러 달 동안 서울에 머무르면서 반란군을 평정해 주고 고려로 돌아갔다. 견훤은 야수같이 침범해 왔으나 왕건은 은인 같이 와서 도와주고 아무런 요구도 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백성들까지 왕건의 덕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그는 새나라를 창건(創建)할 만한 왕기(王氣)를 담은 덕있는 대기(大器)로서 신라의 왕실과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의 시운을 맡은 경순왕의 이력으로는 나라를 구하기 어려웠다. 사방의 국토는 적들에게 침식을 당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언제 나라가 망할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경순왕은 비상한 각오를 하고 군신들을 대궐로 불러 들였다.
 
“내가 뜻하지 않은 왕위에 올라서 부족한 힘으로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했고 여러 신하의 충성도 비상하나 하늘이 아마 신라의 종말을 고하게 하시는 모양 같소….”
 
경순왕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며칠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생각한 끝에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물려주면, 우선 백성이 편하게 살 것 같소. 이 중대한 문제로 나 자신은 종묘(宗廟)에 대한 죄인이 되려고 각오했소. 다만 신라의 귀족 및 여러 신하들은 양국(讓國)한 후에도 전관예우(前官禮遇)를 태종에게 당부하겠으며 태조의 인덕으로는 제공(諸公)들을 잘 대우하리라고 믿소…”
 
신하들은 왕의 비장한 마지막 말에 대해서 모두 통곡을 하고 한동안 아무런 의견도 말하지 못했다.
 
이윽고 회의가 진전됨에 따라서 왕의 의견대로 고려에 합병하자는 논과 신라의 주권을 지키자는 양론으로 갈렸다. 이때 왕 다음 가는 발언권을 가진 태자가 비장한 결심을 피력했다.
 
“한 나라의 존망은 천운이요, 인력을 다하여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끝까지 싸우고 건설해 보다가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국운에 순(殉)해서 옥쇄(玉碎)할 것이지 어찌 건국 이래 번영해 온 천년의 사직(社稷)을 가볍게 남의 나라에 물려 주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충을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라의 형편은 노쇠한 몸에 백공천창을 입은 격이다. 명분을 지키다가 옥쇄하면 몇 명의 충신이 청사(靑史)에 빛날 수는 있다. 그러나 망하는 나라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몇 명의 충신의 이름을 사기 위해서 무고한 군대와 수만명 백성의 피를 흘려야 하겠느냐? 그러고라도 얻는 것이 있으면 모르되… 기왕 망하는 국운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을 더 이상 괴롭힐 수는 없다. 옥쇄라 하지만 욕된 망국보다는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양도가 나으리라….”
 
“부왕의 뜻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소자는 고려왕의 호의로 구차한 신부귀족(新附貴族)의 대우를 감수(甘受)할 수 없습니다. 아주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 버리겠습니다.”
 
“네 뜻을 나도 알겠다. 너도 내 뜻을 알겠다니 너는 네 뜻대로 하여라. 나는 어쩔 수 없구나.”
 
왕은 또 눈물을 흘리면서 끝을 맺고 마지막으로 시랑(侍琅) 김봉휴(金奉休)에게 명했다.
 
“고려 태조에게 양국(兩國)의 왕실과 국민의 장래를 위해서 양국(讓國)하겠다는 국서(國書)를 초안해 올려라. 내가 보고 날인하여 곧 고려에 사신을 보내겠다.”
 
이리하여 신라는 고려에게 자진 합병을 원하게 되었다.
 
태자는 그런 국론(國論)이 결정되자 태자의 용포(龍袍)를 마의(麻衣)로 갈아입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 열매를 따서 먹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애처로운 마의태자의 일화를 남겼다. 태자가 금강산으로 숨어 버리자 아우 왕자도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승명(僧名)의 중이 되어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 태조는 신라 경순왕의 양국친서(讓國親書)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신라의 왕족과 귀족과 고관들을 환영했다. 이때의 왕 일행의 행차는 망국행렬로서는 너무도 호화로운 광경이었다. 향차(香車)와 보마(寶馬)의 행렬이 이십리나 길게 행진해서 북으로 향했는데 그것은 마치 고려의 신랑집으로 가는 신라의 신부 행렬도 같아서 연도에 도열해서 구경하는 백성들은 감개가 무량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일행을 송도 교외까지 나와서 환영하고 대궐 동쪽의 정승원(正承院)에 들게 해서 왕족의 대우를 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경순왕의 비(妃)로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관위(官位)는 태자보다도 높은 정승(正承)을 봉하고 봉록을 일천석 내리는 동시에 경주일대를 그의 식읍(食邑)으로 정해 주었다.
 
왕건으로서는 경순왕에게 최대의 대우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다른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모두 상을 내리고 고관에 등용하는 아량을 베푸는 동시에 고려 왕업(王業)의 기초를 튼튼히 했던 것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자기의 제五十六대를 최후로 九二十二年의 왕조(王朝)의 전통을 국토와 함께 고려에 양도한데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著者)는 사론(史論)의 말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라의 박씨(朴氏) 석씨(昔氏)는 모두 알(卵)에서 나고 김씨(金氏)는 금궤에 담겨서 하늘로부터 강하해 왔다 하며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 하니 이는 해괴한 말로서 믿을 바 아니나 지금 이것을 사실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윗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검박하고 남에게는 너그럽고 설관(設官)과 행사가 간략하여 중국(中國)을 섬기고 사신이 연락부절하였다. 항상 자제들을 중원(中原)에 보내서 숙위(宿衛)케하여 수학(修學)하게 하였다. 그래서 옛 성현의 교화를 본받아서 거친 풍습을 고치고 왕사(王師)의 위령을 빙자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신라의 군현(郡縣)을 삼았으니 그 시절에는 진실로 성대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도(浮 =佛道)의 법을 받아 들여서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고 절과 탑을 세우고, 백성으로 하여금 중이 되게하여 군사와 농사가 피폐해지고 나라가 날로 쇠약해졌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런 시절에 있어서 경애왕은 주야로 음황(淫荒)하여 궁인좌우(宮人左右)와 포석정(鮑石亭)에서 술을 즐기며 견훤이 가까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그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더 하랴. 경순왕이 우리 태조께 귀순한 것은 가상한 일이다. 만약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왕사를 대항하다가 역궁세진(力窮勢盡)하기까지 이르렀다면 그 가족이 자멸되었을 것이요.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큰 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나라를 들어서 바쳤으니 그는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에게 대한 덕이 또한 크기 이를데 없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에서 송(宋)나라로 들어온 것도 소자첨(蘇子瞻)이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신라의 공덕은 그것보다도 훨씬 크다.>
 
이상의 사론은 물론 고려의 입장에서 평한 것이지만 일리가 없지 않은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