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18. 王이 되려면 먼저 公主를

鶴山 徐 仁 2007. 2. 27. 08:54
첨성대화랑 김응렴(金應廉)은 각간(角干) 김계명(金啓明)의 아들로서 조상은 왕족이었다.
 
그는 덕행이 높은 삼선설(三善說)의 인연으로 부마(駙馬)가 되었고, 나중에는 제四十八대의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화랑시대 김응렴의 삼선설과 삼복설(三福說)은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했다.
 
제四十七대 헌안왕(憲安王)은 어느 해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에 문무백관을 국화로 유명한 임해전(臨海殿)에 소집해서 연중행사의 관국연(觀菊宴)을 베풀고 임금과 신하들이 한자리에 가을을 즐겼다. 이 연회에는 십오세의 미소년 화랑 김응렴도 참가했다.
 
여러 백관들은 김응렴을 귀엽게 여기고 여기저기서 불러 음식을 권했다. 술잔까지 권하면서 노래도 청했다. 김응렴은 노장들 자리에서도 노래나 시조에 능수능대(能手能對)했다.
 
헌안왕도 김응렴의 의젓한 태도를 기특히 여기고 친히 앞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화랑이 되어서 수학유람차 천하를 두루 다니느냐?”
 
“예, 명산 대천과 고적을 대개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물정도 두루 살폈느냐?”
 
“예, 빈부 귀천의 여러 풍습과 선악의 인심도 견문하고 깨달은 점이 적지 않습니다.”
 
“나쁜 풍습도 보았겠지만 네가 본받을 만한 선행(善行)도 보았느냐?”
 
“예, 제가 특별히 감명 받은 세 가지 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김응렴은 왕의 하문(下問)에 명확한 대답을 올렸다.
 
“허허, 세가지 선행(善行)은 무엇 무엇이냐? 말하자면 네가 보고 느낀 삼선설(三善說)이구나… 참 영리하고 의젓한 소년이로구나. 역시 국선(國仙=화랑의 별칭)으로 뽑힌 소년은 다르지 않소?”
 
왕은 옆에서 같이 귀엽게 보고 있는 왕후에게 속삭였다. 왕후 흔명부인(昕明夫人)은 왕자가 없었으므로 이런 아들을 하나 두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첫째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언행이 지극히 겸손해서 결코 남의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고 남을 존경하는 태도를 보고 본받을 인격이라고 감동하였습니다.”
 
“음, 다음에는?”
 
“세도와 영화를 가진 사람으로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인품에 감동하였습니다. 만인은 모두 신불의 앞에 서면 평등한 사람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경건하게 믿는 모양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하였다. 그 선한 것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총명에 놀랐다.
 
“또 하나는 부유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사치로운 생활을 하지 않고 검약한 금품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보고 감사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특히 감동한 것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얘기에서 스스로 지도자로서 배울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장차 화랑으로서 큰 인물이 될 그릇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엇인지 왕후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왕은 저쪽 자리에 앉아서 자기 아들이 혹 실례 되는 말이나 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응렴의 부친 각간 김계명을 불렀다.
 
왕은 그들 부자들 번갈아 보면서, “김각간, 아다시피 나에게 왕자가 없고 공주가 형제 있는데 공주와 성혼시켜서 응렴을 부마로 삼고자 하는데 경의 뜻이 어떠하오?”
 
응렴은 수줍어서 고개를 숙였으나 부친은 공손히 배례하고, “황공하온 분부 소신의 가문에 더없는 영광이옵니다. 다만 미련한 소신의 자식이 부마될 자격이 있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건 경의 사양의 말이고… 응렴아, 너의 생각은 어떠냐?”
 
넌지시 응렴에게 물었다.
 
“…”
 
“왜 대답이 없느냐? 공주가 네 아내로 부족하냐? 부족하면 화랑답게 대답하라. 왕이라고 어찌 인륜대사를 명령으로 정하랴.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하니 꺼림없이 대답하라.”
 
“너무 황공하올 뿐이며 이런 문제는 부모가 정하실 성질이라 저로서는 무어라 봉답할 수 없습니다.”
 
“허허허, 옳은 말이다. 네 부친은 지금 찬성했으니 집에 돌아가서 네 모친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예….”
 
응렴은 부끄러운 듯이 왕과 왕후 앞에서 물러나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응렴의 부친은 응렴과 함께 부인과 상의 했다. 부마가 된다는데는 모두 감격했으나 두 공주 가운데서 맏공주를 택하느냐 둘째 공주를 택하느냐가 문제였다. 그것만은 신랑집에서 선택할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께서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면 아우 공주를 며느리로 맞으십시다.”
 
모친이 남편에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그야 며느리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하지만 장래의 길흉 문제도 알아볼겸 흥륜사(興輪寺) 스님께 여쭈어 보고 정합시다.”
 
“참, 그러는 것이 좋아요.”
 
“그럼, 응렴이 네가 스님을 찾아 뵙고 여쭈어 보고 오너라.”
 
“예…”
 
응렴은 모친 의견대로 둘째 공주와 결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둘째 공주는 신라 제일의 미인이란 평판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륜사 스님을 찾아가는 길에도 부친의 신중론이 원망 스러웠다. 스님이 만일 둘째 공주와는 궁합이 맞지 않으니 맏공주와 결혼하라는 말이 나올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흥륜사 스님은 응렴의 공주와의 혼담을 듣고 우선 축하한 다음에 한참 공주들의 나이와 응렴의 나이를 비교하고 생각하다가,
 
“맏공주는 용모가 미인은 아니지만 부덕(婦德)이 높으며 그 분과 결혼하면 장차 삼복(三福)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아우 공주와 결혼하면 장차 삼화(三禍)가 있을 것이니 미(美)보다는 덕을 취하시오.”
 
응렴은 순간 실망했으나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물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삼복은 무엇 무엇입니까?”
 
“첫째는 왕과 왕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서 총애를 더 받을 것이오. 왕께서 두 공주 중에서 자유로 택하라 하신데는 부왕으로서 딱한 고충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미인이 아닌 맏딸을 먼저 보내고 싶으시면서도 차마 말씀 못한 사정을 살펴드리고 맏공주를 택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리고 맏공주가 얼마나 감격하고 현처(賢妻) 노릇을 하시겠소?”
 
“예, 그 점을 저는 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일에 맏공주의 용모가 아우 공주만 못해서 결혼을 뒤로 미루게 되면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그 슬픔은 왕실 전체의 슬픔이 되겠으니 충성된 신하로서는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소?”
 
“예, 알겠습니다. 다음의 복은 무엇입니까?”
 
“겸손한 덕에는 만복(萬福)이 따르는 법이요. 지금 왕실에는 태자가 안 계신데 부마 중에서 왕을 삼는다면 우선 맏사위가 우선권을 갖게 되겠고 더구나 미인 공주를 사양한 덕으로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게 된 맏부마가 틀림없이 왕위를 이어 받을 것이요.”
 
응렴은 너무 황송한 복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 만일 그 때까지 미인인 둘째 공주가 미혼 중이면 그분마저 차비(次妃)로 맞을 수 있으니 이것이 맏공주와 결혼하면 얻을 수 있는 삼복설(三福說)이요.”
 
응렴은 스님의 권고대로 맏공주인 문자공주(文資公主)와 결혼할 결심을 했다. 그 당시의 신라 왕실에서는 한 집의 딸 형제를 정비(正妃)와 차비로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응렴은 자기의 삼선설로 맺어진 인연을 흥륜사 스님의 삼복설에 따라서 맏공주인 문자공주와 결혼하기로 정하고 대궐로 들어가서 그 뜻을 아뢰었다. 이에 대해서 왕과 왕비는 매우 기뻐하면서 응렴을 칭찬했다.
 
“우리가 간택한 부마는 보통 경박한 미소년이 아니다. 응렴인들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가 싫을 리 있겠느냐? 겸양의 미덕과 인륜의 질서를 지켰을 뿐 아니라 왕실의 체면까지 세워주었으니 실로 기특한 마음씨다.”
 
왕실에서는 곧 혼인 준비를 하고 응렴을 맏사위로 삼았다. 맏사위가 된 응렴을 왕자처럼 총애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헌안왕은 재위(在位) 불과 오년 만에 병으로 승하했는데 그때에 유언했다.
 
“나는 경들의 충성에 보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오…”
 
군신들이 울음을 터뜨리자 왕은 쓸쓸한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슬퍼들 마오. 나보다 덕이 많은 신왕을 맞아서 나라가 크게 일어날 것이니 한결 같은 충성으로 신왕을 보필하기 바라오. 마침 세자가 없으므로 부마 김응렴에게 왕위를 계승시킬 생각이오. 응렴은 아직 연소하지만 신라 화랑의 모범으로 세상이 다 인정하므로 장차는 영명(英明)한 임금이 되리라고 믿소.”
 
유언을 마치고 승하한 헌안왕의 뒤를 이은 김응렴이 제四十八대 경문왕(景文王)이다.
 
문자공주와 결혼한 덕으로 왕이 된 응렴은 마침내 삼복설의 마지막 셋째 복까지 맞는 몸이었다.
 
경문왕으로 등극한 삼년째의 겨울에는 복사꽃이 궁중 비원에 만발했다.
 
재봉춘(再逢春)의 서조(瑞兆)다. 나라에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이다. 겨울의 궁중 비원에 복사꽃이 만발했다는 소문만 듣고도 세상에서는 왕실의 경사를 빌며 기다렸다.
 
경문왕은 흥륜사 스님이 예언한 삼복설을 상기(想起)하고 미인으로 유명한 왕비의 아우를 둘째 왕비로 삼아서 염복(艶福)까지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