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17. 元聖王의 登極夢

鶴山 徐 仁 2007. 2. 27. 08:53
첨성대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소위 통일신라 시대가 와서 한반도에는 비로소 통일된 민족이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로 갈려서 동족끼리 피를 흘리고 싸우던 민족의 비극은 그 몇 백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전쟁의 피해를 면한 평화시대가 온갖 문화의 꽃을 피웠으나 문화가 난숙해짐에 따라의 문약(文弱)의 폐단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진흥왕(眞興王) 때에 시작된 신라의 화랑제도(花郞制度)도 점점 쇠퇴해졌다. 화랑제도는 마치 삼국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생겼던 모양으로 그 전성기에 통일 위업을 이룩하고 그 목적이 달성되자 차차 그 열이 식어진 듯하기도 했다.
 
통일사업의 대부분은 무열왕 김춘추 시대에 그 기초를 확립했고 형식적인 결실(結實)은 그 아들 문무왕 시대에 완수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일곱 대의 왕을 거쳐 오는 동안에 왕실에서도 기강이 문란해서 마침내 왕위쟁탈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悲劇)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건국 이래 중고(中古)시대까지도 왕위에 대한 쟁탈 소동이 거의 없었다. 왕위는 덕 높은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하는 대전제(大前提)에서 왕족끼리도 서로 덕있는 인물에게 사양하는 아량과 미덕이 전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초기에 박, 석, 김(朴昔金) 삼씨가 왕이 되었던 것도 그것이 신화적(神話的)이긴했지만 <덕있는 자가 임금이 된다.>는 원칙하에서 사양하는 정신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제三十七대 선덕왕(宣德王)에게 태자가 없었던 것을 기회로 종래의 덕있는 자가 임금이 된다는 원칙은 무너지고 모략에 의한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종전의 관례에 의하면 태자가 없을 때에는 덕있는 왕족이나 덕 있는 대신 가운데서 다음 왕이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임금의 자리는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과 각간(角干) 김경신(金敬信) 둘 중의 하나가 앉게 되리라는 것이 일반의 관측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족의 혈통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확실한 후보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주원과 김경신은 서로 왕이 되려는 경쟁만 했지 양보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상재 김주원은 각간 김경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어서 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김경신은 왕운(王運)이란 거룩한 천기(天機)에 속해 있기 때문에 관위의 일계급쯤 높고 낮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경쟁의식을 일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낮에 골몰했던 생각은 으레 밤에 꿈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김경신은 어느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는 자기의 뜻과는 전연 반대로 고관의 감투를 벗어 버리고 풍류객이 되어서 십이현금(十二絃琴)을 안고 천관사(天官寺)의 천관정(天官井)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꿈을 꾸었던 것이다.
 
‘허어, 내가 아무래도 왕이 될 운이 없나보다.’
 
그는 크게 실망했으나 이런 실망의 꿈을 누구에게도 알리고는 싶지 않았다. 꿈 하나로 왕의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심중은 점점 우울해져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짜증을 내다가는 자기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알고 돌이켰다. 평판이 나빠지면 왕이 될 가망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 꿈이 정말로 악몽(惡夢)이다.’
 
세도를 버리고 풍류객이 된 꿈 자체는 흉몽이라고 할 수 없으나 왕이 못된다는 의미에서는 저주할 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꿈이 왕이 못될 징조라는 판단을 내릴까 두려워서 해몽가(解夢家)에게도 물어보기를 꺼려했다. 나쁜 꿈이라면 액운을 방지하는 무슨 방법이라도 문복가(問卜家)에 물을 겸 유명한 문복가를 불러서 상의 했다.
 
“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장래의 길흉을 정직히 해몽해 주게. 그러나 이런 내 꿈 얘기를 다른 사람에 알려선 안 되네.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복채를 후하게 줄테니 맹세하겠나?”
 
“대감님, 안심하십시오. 길흉간에 꼭 맞도록 풀어 드리는 동시에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그대신 만일 흉한 점괘가 나오더라도 노하시지 마십시오.”
 
“그야 왜 노하겠나. 내 꿈이 나쁘다고 해몽가를 탓하겠나.”
 
“그럼 꿈을 말씀해 보십시오.”
 
김경신은 꿈얘기를 자세히 들려주고 문복가의 해명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감투를 대감 머리에서 벗으신 것은 벼슬에서 파면될 징조입니다.”
 
“음…”
 
김경신도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도 그런 해몽은 이미 골백번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몽가의 입으로 단정적인 선언을 받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
 
“거문고를 안으신 것은 거문고 판과 비슷한 큰칼[刑具]을 쓸 징조입니다.”
 
“으음…”
 
김경신은 신음했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흉괘(凶罫)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속에 들어가신 것은 옥에 갇힐 운수입니다.”
 
“….”
 
김경신은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았다.
 
“대감님 황송합니다. 제 해몽에 실망하셨을 줄 아오나 앞으로 조심하시면 모르고 계신 것보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실 것입니다.”
 
해몽가는 그런 말로 김경신을 위로하고 미안한 듯이 돌아갔다. 김경신은 충격적인 흉한 해몽으로 완전히 실망하고 그날부터 조정에도 출근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리고 병이 중하다는 핑계로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상한 꿈 때문에 상심하고 있다는 비밀은 집안 여자들의 입에서 새어나가고 말았다. 이런 소문을 전해 들은 도술가 여삼(餘三)이 해몽을 다시 해주고 큰 보수를 받으려고 밤중에 찾아갔다.
 
“대감님 꿈은 좋은 꿈인데 전번 해몽가가 어떤 사람에게 매수되어서 거짓 해몽으로 대감께서 임금되실 대운(大運)을 잃도록 저주하고 갔습니다. 제가 사리에 맞는 해몽을 해 드리면 대감께서도 안심하시고 심화병을 상쾌하게 씻어 버리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인은 이 말에 솔깃해서 이불을 쓰고 누운 남편을 졸라댔다.
 
“이번 도술가는 풍채로나 언변으로나 전번 해몽가보다 권위가 있어 보입니다. 한 번 만나서 해몽을 들어 보시는 것이 좋아요. 공연히 길몽을 흉몽으로 믿고 대운을 잃지 마세요. 나는 대감이 왕이 되시지 못하는 것보다도 울화증으로 고생하시는 것이 더 딱합니다.”
 
“그럼 만나보지만 전번 해몽이 아주 이치에 맞는데 그 꿈이 어떻게 좋게 해몽이 될 수 있겠소?”
 
“좌우간 만나보세요.”
 
도술가 여삼은 하기 어려운 면회허락을 받고 김경신의 방으로 들어오자 면회를 애걸하던 때와는 달리 갑자기 뽐내기 시작했다.
 
“죄송하오나 마님께서도 나가 주십시오. 대감님께만 여쭙겠습니다.”
 
부인은 작가 가까스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건방진 수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거짓말로라도 좋은 해몽을 해서 남편을 위로시켜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걸면서 방을 피해 나왔다. 부인이 나간 뒤에 여삼은 주인에게 말했다.
 
“소인은 대감께서 공연한 심환(心患)으로 괴로워하시는 것을 풀어 드리려고 밤중에 찾아뵈었습니다.”
 
“고맙소. 내 꿈을 다시 해몽해 주겠다는 호의가 고맙소.”
 
“네, 그 천하에서 다시 없는 대길몽(大吉夢)을 축하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나는 그 흉몽 때문에 두문불출인데 대길몽이라니 어떻게 해몽하고 그런 말을 하오.”
 
“제 해몽대로 장차 귀하게 되시면 오늘밤의 제 사소한 호의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허허허. 내 고민을 풀어 준 공을 잊을 리가 있겠소.”
 
김경신은 도술가가 으레 장담하는 상투수단이라고도 생각했으나 그런 여삼의 다짐에 역시 기대를 걸고 다짐했다.
 
그러자 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공손한 절을 하고 정좌한 뒤에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얹었다. 주인 김경신도 마음이 좀 긴장되었다. 그리고 이 도술사가 전에는 흉몽으로 풀어 준 꿈을 어떤 길몽으로 풀어 주나 하고 귀를 기울였다.
 
“대감께서 감투를 벗었으니 머리에는 하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관으로 쓰셨으니 지상최대의 관 즉 왕관이 아니겠습니까?”
 
“음.”
 
김경신은 귀가 번쩍 뜨였다.
 
“열두줄의 거문고를 품었으매 십이대 자손이 귀하게 되실 징조입니다.”
 
여삼은 한 술 더 떴다.
 
“음, 그도 그렇군.”
 
“그리고 대감께서 들어가신 천관사의 천관정 우물은 보통 우물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까 말씀한 하늘의 관을 쓰시고 궁전으로 들어가실 대문입니다.”
 
“음, 듣고 보니 그럴 듯한 해몽이오. 그러나 내 위에는 김주원이 있소. 그도 다음 왕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를 물리치고 내가 등극 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그의 왕운을 꺾는 예방으로 알천(閼川)의 용신(龍神)께 그를 저주하는 제사를 지내 두십시오. 그러면 만일의 경우에도 그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김경신과 왕위를 다투는 김주원의 집은 그 알천을 건너 이십리 밖의 교외에 있었다. 김경신은 새로운 희망으로 알천 용신에게 김주원의 왕운(王運)을 저주하는 제사를 크게 지내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다시 조정에 출근했다.
 
그런데 그 여름에 선덕왕은 재위(在位) 불과 오년만에 급한 병으로 갑자기 승하했다. 아직 태자를 책봉(冊封)하지 않았던 왕실과 대신들은 다음 왕으로 상재 김주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결정적이었다. 장안의 백성들도“이번에는 김주원 상재께서 새 임금으로 등극하시게 되었다.”하고 새벽부터 새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려고 궁전 앞으로 모여 들었다.
 
당시 신라의 왕실에서는 왕이 승하하면 즉시로 신왕(新王)이 등극하는 관례로 되어 있었다.  선덕왕은 지난 밤에 급히 승하했으므로 김주원을 추대하는 당파에서는 밤중에 알천 건너 김주원의 집으로 가서 기별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기 등극차 대궐로 급행했다. 그러나 알천에 물이 갑자기 불어서 건너는데 시간이 지연되었다.
 
왕의 돌연한 승하도 이상하지만 비도 오지 않은 알천에 큰 홍수가 난 것이 더 이상하다.
 
김주원의 일행은 일시를 다투는 등극 행차에 물로 막혀서 초조해 하면서 벼락 홍수를 원망했다.
 
알천 물은 서울(경주)에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이 붓는 수가 없는 예는 아니었다. 상류지방에서 비가 오면 그럴 때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이번 홍수는 상류에서 비가 온 때문도 아니었으며 보통 비로는 이런 큰 홍수가 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김경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가 용왕에게 김주원의 왕기를 꺾어 달라고 제사 지낸 영험이라 믿었던 것이다.
 
대궐 근처에 집이 있던 김경신은 재빨리 대궐로 들어가서 왕의 빈 자리 - 옥좌(玉座)에 앉고 용포에 왕관을 쓰고 등극을 선언하고 일찍 달려온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김경신의 선배요 제일 후보자인 김주원 상재를 제쳐놓고 염치없이 왕위를 새치기하고 들어앉았다. 그런 야비한 자를 몰아내고 김주원 상재를 신왕으로 모셔야 한다.”
 
이러한 사태에 김주원 일파에서는 당황해서 김경신 타도의 흉계를 꾸몄다. 그러나 이미 왕권을 잡은 김경신은 제三十八대 원성왕(元聖王)으로서 자리를 확보하고 김주원 지지자를 역적죄로 몰아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은 반대파도 곧 태도를 바꾸고 원성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미 시기를 잃은 김주원은 자기를 지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무마시키고 그전에는 하관이었던 원성왕에게 신하로서의 축하를 올렸다.
 
“경은 전왕께 바치던 충성으로 역시 상제로서 나라에 봉사해 주시오.”
 
원성왕은 최대의 아량을 베풀었다. 김주원도 하늘이 자기에게 때를 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종전대로 나라에 봉사했다.
 
“김주원 상재는 역시 사사로운 욕망에 구애치 않는 위대한 인격자다.”
 
사람들은 덕으로는 역시 왕이 된 김경신보다도 낫다는 암시를 하면서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