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무열왕과 김유신은 백제의 영토와 백성을 신라에서 통치하려고 했으나 소정방 장군은 그러한 신라의 뜻을 알면서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신라로서는 아직 고구려라는 적이 남은 이때 전리품을 다투려고는 하지 않고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를 쳐들어가는데 있어서도 당군이 주동적 역할을 하고 신라군이 응원하는 태세가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무인정치를 실시한 소정방은 이번 전쟁으로 고구려까지도 자기나라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래서 고구려 점령 시에는 되도록 신라군은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고 주동적인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대군의 선두에 서서 직접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으나 소정방이 그의 전공(戰功)을 시기하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군은 후방에서 주로 당군의 보급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당군이 평양 근처까지 육박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포위당하고 식량마저 떨어져서 전멸할 상태에 빠졌다. 당군은 신라군에 시급히 막대한 군량을 공급해 달라고 호소해 왔다. 이런 급한 호소를 받은 무열왕은 막대한 군량을 당군진지까지 운반할 용장을 누구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적진을 뚫고 군량을 나르는데는 용병(用兵)의 자유가 있는 전투부대 투입보다도 열배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동맹군 군대가 아사할 위기를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능히 용감 신속히 이 임무를 수행하겠느냐?”
이때 아무도 말하는 장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무엇을 결심한 듯 한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소신이 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소신도 김장군을 도와서 같이 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왕자 김인문이 따라 나섰다. 왕은 김유신의 용맹과 김인문의 지혜가 합쳐진다면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이 신라의 체모를 살리는 구료… 군량 이만석을 당군에 운반해 주오.”
김유신은 수만명 부하 장병 가운데서 가장 용감한 열기(裂起)와 병천, 두 장수를 군량운반의 선두 장군으로 기용하여 행장을 수습했다.
군량 수송을 하는 신라군은 엄동설한(嚴冬雪寒) 중에 지나친 강행군으로 많은 전사자와 동상자(凍傷者)를 내었으나 끝까지 싸우며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소정방의 부대는 평양성을 점령했으나 고구려군은 초토작전(焦土作戰)으로 성내의 식량과 가옥을 전부 불살라 버리고 나와서 당군이 성안에 들어간 뒤에 주위를 포위하고 당군을 굶겨 죽이려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이 평양에 접근했을 때는 평양성내의 모든 당군은 기아와 혹한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쇠퇴한 병력을 감추기 위하여 성의 주위에는 깃발을 높이 올리고 북과 피리의 군악을 울려서 성안의 군대가 사기왕성 하다는 위계(僞計)를 쓰고 있었다.
마침 대동강에 이른 김유신은 그날 밤이 새기 전에 군량을 평양성으로 보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던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수천명이 몰살당하고 후퇴했다. 그 뒤로는 감히 강을 건너 거려는 군사들이 없었다.
“많은 병사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와서 목적을 포기하면 전우의 영혼에 부끄럽다. 그뿐 아니라 남은 부대도 여기서 전멸당한다. 강을 건너가면 신라의 신의를 빛내는 동시에 너희들도 살지만 여기서 겁을 내고 주저하다가는 나라의 신의도 잃고 너희들도 개죽음을 당한다. 최후의 용기로 활로를 개척하자!”
김유신은 진두에 서서 질타했다.
이때 열기와 병천의 두 용사가 칼을 빼어들고 적국을 향해서 돌격을 감행하자 다른 군졸도 용기를 회복하고 진격을 개시했다. 김유신 장군은 그들 진두에 서서 대항하는 고구려군대를 차례로 몰살시키면 진격해 나갔다. 드디어 군량은 평양으로 반입되었고 소정방이 거느린 수만명 군대는 아사를 면했던 것이다.
“김장군, 장군과 무열왕은 동맹국의 신의를 훌륭히 지켰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구해 준 의인(義人)이며 은인(恩人)이오.”
소정방은 감격적인 치하를 했다. 이리해서 고구려도 완전히 항복했다. 그러나 소정방은 김유신에 대한 생명의 은혜도 일시적인 치하였을 뿐 그가 신라의 독립성과 민족성을 주장하는 충신이라는 것에는 처음부터 경계하였다. 앞으로 한반도를 당나라 마음대로 하려하는데 김유신과 무열왕은 눈의 가시같이 귀찮은 존재다.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 승전 후의 군정을 영속화하고 장차는 신라까지 직접 지배하려는 소정방의 야심을 채우는데 누구보다도 김유신이 방해물이었다.
형식으로는 나당연합군이었지만 소정방은 사실상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소정방에게 김유신은 국가체면 문제는 물론 작전상 문제 등으로 소정방과 여러 번 대립해 왔었다.
그들이 처음 격론을 한 것은 백제를 칠 때 진중에서 일어난 김문영(金文潁) 장군 문제였다. 소정방은 황산 벌판에서 적국의 저항이 치열해서 그것을 전멸시키기까지 시일이 걸렸으므로 당군과 합세할 기일을 부득이 며칠 지연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책임으로 김문영의 목을 베겠다고 호령했던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의 무책임하고 오만한 태도에 격분하여 과격하게 항의했다.
“장군은 황산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완강한 적의 대항을 마침내 전멸시키고 전쟁의 태세를 이미 유리하게 전개시킨 그 황산 전투를 치하하지는 않고 합군 기일을 다소 지연시킨 것만을 무자비하게 책하고 공 있는 장수를 죽이겠다는 것은 천만부당하오. 만일 김문영을 사형에 처하겠다면 그의 수령인 내 목을 대신 베시오. 소장군이 만일 그러한 태도로 우리 신라군을 대우한다면 군동맹도 당장 파기하겠소. 그 뿐 아니라 우리는 당군과 먼저 싸운 뒤에 백제군과 싸울 셈이요.”
김유신의 정의감으로는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도 두렵지 않았다. 김유신은 허리에 찬 보검의 칼자루를 잡고 결투의 자세로 당군의 장수들을 호령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당군의 장수 동보량(董寶亮)이 “김장군 말씀대로 황산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한 고통과 전공이 컸으니 김장군의 실수는 불문에 붙이는 것이 전우(戰友)의 정의일까 합니다.”라고 하여 소정방의 양해를 구해서 김유신과의 충돌을 무마시켰던 것이다.
소정방은 싸움의 공을 김유신에게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김유신을 항상 경원했다. 그러나 그의 공이 위대했기 때문에 당나라 고종 황제도 백제를 정복한 뒤에 김유신의 공을 높이 칭찬하고 백제 땅의 일부를 김유신의 식읍(食邑)으로 주겠다는 특지(特旨)까지 내렸다. 그러나 김유신은 나라를 위해서 싸운 공으로 사사로운 영지(領地)는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소정방은 군대를 한반도에 영주시키고 침략하려는 근성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신라에 대해서도 모든 제도를 당나라 식으로 고치라고 강요하는 동시에 그 전에 없던 내정간섭까지 하는 소정방은 마치 당나라에서 파견된 총독 행세를 하고 있었다.
무열왕은 이런 예상치 않은 중대 문제를 토의하려고 중신회의를 열었다.
“삼국통일을 하려는 데만 급해서 외국군을 국내로 청해 온 것이 잘못이었소. 우리가 동족의 피를 흘린 결과가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시켜주는 것이 된다면 어찌 본래의 통일 이상에 부합되겠소. 빨리 당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하겠는데 화전(和戰)간 좋은 방책을 강구 해야겠소.”
그러나 무열왕의 본심은 비록 승전은 했으나 백성이 전쟁으로 피로한 이 때 또 다시 당나라의 대군과 싸운다는 비상수단은 취하고 싶지 않았다. 일시의 민족적 감정이나 국가적 체면으로 옥쇄(玉碎)하려는 것은 도리어 나라와 백성의 근본까지 멸망시키는 경솔하고 위험한 결백성이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되도록 평화적으로 당군의 철퇴, 또는 당군의 내정간섭을 피하는 길로 낙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왕실의 주인이오 신라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일시적 민족 감정으로 통일 신라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우행(愚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충신 다미공(多美公)과 명장 김유신 장군은 감정적인 명분론(名分論)에 급해서 “당군과 일전(一戰)하더라도 소정방의 오만한 꼴은 보기 싫습니다. 그들이 비록 대군이지만 후속부대와 무기 군량의 보급이 없는 고립상태에 놓여 있으니 장기전으로 임하면 격파할 자신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군사적 견지에서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김장군의 실력과 충성을 나는 잘 아오. 그러나 그것으로 당나라와의 전쟁은 끝날까? 장군은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를 정복하고 개선 할 자신과 포부가 있소?”
무열왕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는 당나라의 침략을 막을 뿐이지 당나라까지 쳐들어 갈 야심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황제의 항복을 받지 못하면 열명의 소정방을 잡아 죽여도 당나라의 간섭은 막지 못하고 도리어 심한 압제를 자초(自招)하는 결과밖에 안 될 것이오. 참는 것도 용기니까 참는 용기로 소정방을 구실러 보내고 안으로 목전에 닥친 통일사업에 힘쓰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무열왕의 이런 의견에 대해서 강경론자인 김유신도 다미공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김장군도 다미공도 그 일전을 사양치 않겠다는 각오는 버리지 말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만반의 태세는 갖추는 것이 좋을 줄아오.”
무열왕은 주전론자의 체면도 세워 주는 동시에 그러는 것이 또한 필요했으므로 격려했던 것이다.
“대왕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이런 긴급회의의 결과는 곧 소정방의 치밀한 정보망을 통해서 그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신라와 싸우려면 당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사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소정방은 공연히 신라의 미움을 받기도 싫었으므로 개선장군으로서 당당히 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에 김유신은 다음 임금 문무왕(文武王) 때에야 고구려를 완전히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위업(偉業)을 완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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