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 대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성호 이익…서얼·농민·노비의 등용 주장하고 중화주의 거부한 조선후기 철학의 혁명
▣ 이덕일 역사평론가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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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이익은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지식인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의 삶을 살았다. 이익의 초상.(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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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릴 수 없이 형장을 맞다 죽어간 형
“춘궁(春宮·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金春澤)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이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일개 유학(幼學)에 지나지 않는 이잠을 친국(親鞫)하면서 분개했다.
“죄인이 지극히 방자하다. 내 앞에서도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이러한 놈은 내가 참으로 처음 보았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라.”(<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숙종은 이잠을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나장(羅將)이 신장(訊杖)을 가볍게 친다는 이유로 가두라고 명할 정도였다. 이잠은 묶은 것을 풀어주면 실토하겠다고 청했지만 거부당한 채 형장(刑杖)만 열여덟 차례 맞다 장사(杖死)했다. 한 번 형신에 약 30대씩이니 이잠이 맞은 대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경종 때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잠이 ‘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春宮)을 위하여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그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고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훗날 경종독살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저군(儲君)이라 불리는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것도 반역이란 점에서 이잠의 상소는 남인 당론을 뛰어넘는 우국충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스스로 노론의 정견을 가지면서 세자의 충신이었던 이잠은 숙종의 역적이 되어 죽어갔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스물여섯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주했다. 성호(星湖)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廣州)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집에 장서 수천 권이 있어서 때로 이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게 되었다”라고 공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전한다. 게다가 벼슬길이 막힌 채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성호 농장(星湖之莊)에서 몸소 경작(耕作)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士)가 때를 얻지 못하면 농(農)으로 돌아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는 데 힘쓰고, 또 그 지식은 후생을 가르치면 족하다”(<향거요람서>(鄕居要覽序))라고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농포(農圃) 일무(一畝)를 가꾸어 내 손으로 남과(南瓜·호박)를 심어 누렇게 익는 것을 기다려 수장(收藏)했다가 겨울철에 지져서 돼지국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면 그 맛이 달다”라는 글도 남겼다. 농경에 종사하면서 그 시대 사대부들이 천시하는 노동의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變革)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인재들만이 극심하게 편중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균전제를 주장했다. 그의 균전법(均田法)은 일종의 한전법(限田法)으로서 일정 규모 이상 농토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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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은 당쟁의 본질을 이해관계라 보고,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호사설>(맨 위)과 이익의 간찰.(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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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근원은 이해관계다”
이익은 집권 노론의 정치 보복으로 부친과 형을 잃었으나 남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익은 부친과 형의 정견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인들의 정견은 노론보다 객관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익은 남인의 자리라는 현상을 뛰어넘어 부친과 형을 죽인 당쟁의 본질에 천착했다. 당쟁의 본질에 천착하다 보니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맹자(孟子)가 왕도를 논한 것을 보면 ‘보민’(保民)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주는 것은 아니다.”(<유민환집>(流民還集))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생각이 실천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치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은 그의 정치 평론은 마치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말하는 듯 생생하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말이 불손하다’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는 등의 여러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대개 이(利)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당쟁의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붕당(朋黨)의 화도 그 근원을 따지면 벼슬하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 이로써 죄를 얻어 멀리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안 되어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높은 지위로 뽑아올리니, 마치 자벌레가 제 몸을 한 번 굽혀서 한 번 펴기를 구하는 것처럼 죽을 경우를 겪어도 꺼리지 않는 이가 있다.”(‘귀향’, <성호사설> 제23권)
당쟁이 치열하다 보니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지고 오직 자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고 서학도 수용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서 굳이 자기 당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황패(?遂·黃覇·중국 한나라 때 명 목민관들)처럼 여기지만 자기의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당습소란’(黨習召亂), <성호사설> 제8권)
△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이익이 세운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이익 사당.(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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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당론’(黨論))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친척당)과 사돈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薦拔?畝), <성호사설> 제10권)
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둘째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정현을 헤아렸다’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들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만년에 흉년 계속되며 어려움에 처해
그는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중국명·陸若漢)가 정두원(鄭斗源)에게 준 각종 과학서적과 망원경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우리에게 준 물건들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천문(天問)과 직방(職方)은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밖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 속에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익은 안정복(安鼎福)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인(東人·조선인)이 동사(東史·조선사)를 읽지 않고, 거친 상태로 내버려두어 자고(自古)로 이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 그 규제(規制)와 체세(體勢)는 스스로 중국사와는 다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중국인이 되기 위해 광분하던 소중화 시대에 ‘동국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상의 주체성은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때 열심히 농사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20세가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83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의 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