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신라 궁중비사] 19. 滅亡의 徵兆들

鶴山 徐 仁 2007. 2. 27. 08:56
첨성대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三國)의 하나로 맨 늦게 발전하기 시작해서 서서히 나가던 신라가 중기(中期)에 와서 마침 삼국을 통일하고 대신라를 건설하고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동방천지에 자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무상(無常)해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이후 제五十六대의 경순왕(敬順王)으로 망했는데 위대한 신라 왕조도 일천년을 채우지 못한 구백이십이년으로 허무하게 끝났던 것이다.
 
신라 말기의 왕조에는 영특한 왕도 나지 않았고 위대한 인물의 신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국운이 쇠망하기 시작하는 동시에 북쪽에서는 궁예(弓裔)가 반란을 일으켜서 신라를 위협했고 그의 부하로 있던 왕건(王建)이 마침내 송도(松都)에 고려(高麗)라는 왕조를 수립했다. 또 서쪽에서는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점령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자결(自決)토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제 신라왕궁의 비사(秘史)를 끝내는 대목에서 망국의 경위를 살피기로 하자.
 
노대국(老大國) 신라 말기의 왕대(王代)에는 여러 가지의 흉한 징조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불치(不治)의 노환자(老患者)가 꾸는 악몽의 연속과 같았다.
 
제五十二대 효공왕(孝恭王) 광화(光化) 십오년에는 봉성사(奉聖寺)에까지 소동이 일어났다. 봉성사 외문(外門) 이십일간에 까치가 떼로 몰려와서 밤낮으로 울었다.
 
제五十三대 신덕왕(神德王) 사년에도 영묘사(靈廟寺) 지붕에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와서 밤낮으로 울었다. 그리고 오월에 서리가 내리고 육월에는 참포(斬浦)의 강물이 바닷물과 맞부딪혀서 사흘 동안이나 노도격랑(怒濤激浪)으로 싸웠다.
 
제五十四대 경명왕(景明王) 정명(貞明) 오년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壁畵) 속의 개가 사흘 동안이나 짖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월에는 황룡사(皇龍寺)의 탑 그림자가 금모사지(今毛舍知) 집 뜰에 한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다. 그리고 그해 시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끊어졌고 벽화 속의 개가 나와서 황룡사 뜰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림으로 들어갔다.
 
제五十五대 경애왕(景哀王)은 역대 선왕들 때부터 이변(異變)이 잦아서 민심이 흉흉했으므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큰 불공을 올렸다. 동화(同化) 이년 삼월 십구일에 황룡사에 백좌(百座)의 설경(說經)을 베풀고 전국에서 유명한 선승(禪僧) 삼백명을 초청해서 환대했다. 그리고 경애왕이 친히 분전에 향을 피우고 치성을 올렸다. 이것이 신라에서 시작된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였으나 불교 신라로서 마지막 대제전(大祭典)의 영험도 망국의 운수는 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천성(天成) 이년 구월에 경애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비빈(妃嬪)과 왕족들과 함께 단풍놀이 연회로 세상을 잊고 중흥(中興)에 취해 있었다.
 
“역적 견훤(甄萱)의 반란군이 비록 고울부(高鬱府)를 점령하고 행악을 하지만 고려(高麗) 구원병 일만명이 곧 경주로 올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경애왕은 이렇게 자위(自慰)를 하면서 마음 놓고 잔칫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귀신도 모르게 잠복해 왔던 견훤의 반란군이 전격적으로 왕족의 연회장을 기습했으니 일망타진(一網打盡)된 왕족의 면목은 국민 앞에 여지없이 되었다. 이 봉면은 체면문제가 아니라 왕 자신의 비참한 자멸의 술자리였던 것이다.
 
“이 용열하고 죄 많은 자야. 지금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너는 나의 의거(義擧)를 고려 왕건의 군대에 맡기고 이런 주색에 빠져 있으니 하늘이 너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하늘을 대신해서 너의 죄를 다스리려고 나타났다. 너도 명색이 왕이었다면 네 체면을 세워 주려는 내 호의를 받아라. 호의는 다름 아니라 네 손으로 자결하라. 만일 자결도 못할 비겁한 자라면 능지처참해서 거리로 끌고 다니며 장안의 구경거리로 삼겠다.”
 
경애왕은 역적에게 이런 모욕의 호령을 당하고 하늘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고려 왕건의 구원병이 당장 땅에서 솟아나지도 않았으므로 왕은 마침내 자기 칼로 목을 찌르고 엎으러져 죽었다. 역적 견훤의 칼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결시킨 뒤에 왕궁에 침입해서 금은 보화를 약탈하고 왕족과 귀족들의 부녀자를 잡아서 능욕하고 부하들에게는 승리의 선물로서 능욕하게 하는 무도한 행패를 부렸다. 견훤은 자기가 신라의 왕위를 찬탈하고 궁전의 주인이 되고 싶었으나 곧 구원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진주해 올 고려의 왕건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경애왕의 아우 김부(金溥)를 장차 자기의 괴뢰로 삼으려고 왕으로 삼았다.
 
김부는 형왕(兄王)의 원수인 견훤이 은혜나 베풀 듯이 시켜 주는 왕위기 탐탐치 않았으나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이 왕의 자리를 빼앗고 앉지 않은 것이 천의(天意)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견훤이 시키는대로 왕이 되었다. 빨리 고려군이 응원해 오면 견훤을 소탕하고 형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굴욕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