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3, 오후 5시 40분 발 경주행 KTX에 몸을 실었다.
깊어가는 가을 따라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신라의 신비, 그 영원의 미소(흥륜사 발굴 신라인의 미소,일본인 소지))를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
금요일이라 여러가지 일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대략이나마 처리하느라 그 시간밖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 흔해빠진 경주 여행 왜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첨성대 안압지 반월성 천마총 계림 석빙고 불국사 석굴암 포석정 등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또 여러번 보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경주 남산 동북면 부처계곡에 있는 소위 <감실 부처>와 탑골 계곡에 있는 마애불과 석불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신라천년 사직을 생각하면, 웬지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나의 경우, 남들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륜사 유지에서 발견된 신라 천년의 미소라는 와편 조각에 조각된 여인의 얼굴이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얼굴로 생각되어지고, 또 남산 부처골의
<감실 부처>가 역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서 환생하신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 사실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신라 전문 사학자들의 글을 여러군데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두 조각된 여인의 얼굴이 선덕 여왕이라는 명문은 어디에도 없다.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하건데 선덕여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일 뿐이다.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감실부처>의 여인상을 경주 사람들은 그저 <할매부처>라고 부른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미인인데다가 키가 크고 활달하면서도 정이 깊었고 그리고 다소곳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여왕은 죽을 때 자신의 시신을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결국 드넓은 경주벌의 한복판에 위치한 낭산의 남쪽 부분이라고 추단되었고, 결국 그곳에 묻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그 대업을 수행한 문무왕이 낭산 아래 남쪽에 자신의 무덤과 사천왕사를 건축하였다. 사천왕사의 질펀한 유지가 보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33개의 하늘로 나누고, 그중 도리천은 중심적인 하늘로서 서방정토로 불리워지는데 아미타볼이 관장하는 세계이며, 그 남쪽에 사천왕천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 교설에 비추어 여왕은 경주의 도리천이라고 믿어지던 낭산 아래 남쪽에 자신의 묘터를 지정했고, 문무왕이 그 남쪽애 사천왕사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감실 부처가 들어선 남산 동북쪽 부처골은 여왕의 묘터에서 서쪽으로 한 500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은 곧바로 여왕의 사후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덕만 공주는 마흔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자신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아들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55세쯤 타계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여자왕을 반대하는 칠숙의 반란이 있었고, 죽을 때에도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의 난 중에 죽었다.역전의 용장 대장군 김유신도 이 비담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으로 고초를 껶었다. 간신히 비담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경주에 갈 때마다 나는 위에 든 유명 관광유적들만 돌아보았다. 정말로 보고 싶은 신라의 미소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번 가을, 나는 과감하게 여타 잡사들을 뒤로 젖히고 경주행을 결행했다.
도착 다음날 새벽부터 경주 남산 동북쪽 부처골 감실부처를 찾지 못해, 할 일 없이 남산을 종주하였다. 즉 통일전에서 포석정까지 그 험한 등산코스를 온종일 걸려 걸었다. 몸이 녹초가 되었다. 나는 경주 남산이 서울 남산처럼 조그만 산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 산은 해발 490머터의 엄청난 산이었다.122개의 절터와 54개의 부처상과 62개의 탑을 간직하고 있다는 그야말로 자연의 불교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소략한 소개서만을 믿고 덤볐던 내가 잘못이었다.
이러한 불교의 유적들은 남산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 아니고, 40개 정도가 되는 계곡에 무리지어 비교적으로 지상에 가깝게 분산되어 있었다. 첫날 나는 산의 정상에 있는 금오산 정상 삼층석탑과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 절터의 유지만을 보았고, 죽을 고생을 하고 산을 헤맨 끝에 간신히 퇴로를 뚫어 포석정으로 나왔다. 이 길은 부흥사라는 고찰로 오르는 산길인데 경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길이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헤맨 결과 점심까지도 먹지 못했다. 나는 포석정 앞에 있는 잔치국수 집으로 들어가 두 그릇을 비웠다. 풋고추에 잔치국수를 말아 먹으니 그것도 별미였다. 천년 미인의 그 영원의 미소를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일평생 벼르다가 이제 왔건만 이제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나는 단련된 몸이지만 동행한 가족이 녹초가 되었다.불국사 앞 숙소로 기어들어와 녹아떨어졌다.
다음날, 불국사를 천천히 보고, 정오쯤 다시 도전하여, 결국 남산 동북쪽 부처골에 있는 감실 부처를 만났다. 아,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하며 영원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허물을 탓하지 않고 끝없는 사랑으로 나를 부드럽게 안아줄 듯한 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신라 여인의 그 영원의 미소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영원한 여인의 아름다운 미소 바로 그 자체였다.
큰 바위를 파내어 감실을 만들어서 부처를 모신 것이 아니라, 감실를 만들면서 부처를 조각한 것이라. 대단한 힘이 들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여왕이 돌아가시고도 근 1300 여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왕은 경주 남산 부처골 감실부처로, 이 세상에 그 흔적을 들어냈으며, 분황사 3층탑으로, 그리고 첨성대로 그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나같은 중생들은 졸하고 난 후 무슨 재주로 자신이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여왕이 조성했다는 황룡사의 9층탑은 자장 대사가 만약에 이 탑을 세우면 세계의 9개의 나라가 조공을 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황룡사 9층탑은 완전히 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내가 찾아가는 경주 남산 동북 쪽 탑골에서 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황룡사 9층탑의 바위 조각을 참조하여 그 모조품이 경주박물관에 크게 축소된 채 재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애탑에 조각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인들은 이와같이 아무리 융성한 문화도 시간이라는 세찬 물살 속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예견 하에서, 아름다운 여왕도 그리고 국찰의 탑도 바위 위에 새겨놓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처음 대했을 때 그 흥분과 감격은 천년의 미소를 머금은 감실부처를 처음 대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인간 존재의 허무감과 그 존재감의 희미한 추적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런 정도의 조각 작업은 개인이 할 수 없었고, 나라에서 하는 것이었는데, 여왕 사후 7세기 초반에 여왕의 도리천에서 윤회를 가상하고 조각하였을 것이라는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 졌다. 석불이 조각되어진 연대가 7세기 초반이라면, 바로 여왕이 집권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사학자들은 낭산 북쪽에 있는 첨성대가 하늘을 관찰하는 관상대도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도 아니고, 일평생 홀로 산 외롭고 신비스러운 여인 곧바로 김덕만 여인(선덕여왕)이 꿈꾸고 그리던 도리천의 상징적인 건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첨성대의 단이 27개인데, 여왕이 신라 27대왕이기 때문에 첨성대는 곧바로 도리천에 가신 여왕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첨성대가 웬지 여성스러운 선을 가지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깝게 여왕 자신이 스스로 조성한 분황사가 있다. 신라 상중고 기 3대 사찰(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중에서 분황사만이 유일하게 그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분황사 3층와탑이 그것이다. 본래는 9층 탑이었으나 3층만 남아 있다. 신라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아주 귀한 존재이다.
감실 부처와 탑골의 마애불상과 황룡사 9층탑의 조상을 보고 가깝게 있는 여왕의 묘를 낭산 남쪽 기슭에서 찾아 보았다.
주말이라 관광객들이 경주 전역에 넘쳤으나 막상 여왕의 묘에는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짙게 들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마침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 너머, 그 거대한 모습을 들어낸 여왕의 무덤은 너무나 거대하고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나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오래 오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김유신이, 결혼도 하지 않고 김춘추의 아이를 가진 여동생 문희를 죽이려 하자, 여왕은 그 아이의 아버지를 불러오라 하여 이 처녀의 시체를 보지 않으려면 어서 결혼식을 서둘라고 명했다는 명석하고 따뜻한 여왕의 모습이 저 멀리 거대한 무덤 속에서 떠올라 보였다. 이 사실은 하류 진골이던 김유신가(김유신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신라에 복속되었기에, 김알지 후손과 구별하기 위해 신김씨라고 신라사에서는 말한다.)와 왕족이던 김춘추가를 맺어주려는 여왕의 계획된 연극이었다.
신라문화의 특징은 나의 관점으로는 크게 세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처럼 정복자들에 의한 피정복 왕국이 아니다. 소백과 태백으로 가려진 경주 일원 후미진 골짜기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왕국이다. 그래서 AD 500년 23대 지증왕이 등극할 때까지만 해도 왕이란 칭호를 쓰지 않고 그냥 마립간이라고 불렀다. 거사간,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은 한 부족의 추장의 이름이었다. BC57년에 건국되었으니 978년 역사에 근 삼분의 이를 왕국으로서 지낸 것이 아니었다. 지증왕, 법흥왕(23대,흥륜사 조성,불교공인), 진흥왕(24,황룡사 조성,정복왕),진지왕(25),진평왕(26,천사옥대),선덕여왕(27,분황사조성,황룡사 9층탑 조성,첨성대 조성), 진덕여왕(28), 태종무열왕(29,백제멸망시킴), 문무왕(30,고구려 멸망시킴,668년), 신문왕(31,감은사 조성),성덕왕(33,에밀레종), 경덕왕(35대, 불국사 석굴암 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 천년 사직의 황금라인이다.
신라 35대 왕인 경덕왕 이후로는 사실 뛰어난 왕이 없었다. 경덕왕 이후로도 21명의 왕이 즉위했으나 권력암투가 치열하였고 죽이고 죽는 비극이 속출하였다. 경덕왕 이후 150여년간은 신라사의 내리막길이고 암흑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두번째 신라문화의 특징은 골품제도이다.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7등급으로 전 백성을 갈라놓고 엄격한 차등을 두었다. 성골은 왕의 자식만을 가리킨다. 왕의 동생이나 삼촌도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이 된다. 진골은 왕이 될 수 없다.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대장군 김용춘의 아들이지만 어머니 지도부인이 3촌정도의 왕족이 아닌 귀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이었다. 진지왕은 24대 진흥왕의 두째 아들이지만 형인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즉위하였다.
그러나 태자 동륜의 아들 26대 진평왕이 삼촌인 25대 진지왕을 3년만에 내쫓고 왕이 된 것이다. 이 진평왕은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해, 슬하에 성골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니 할 수 없이 맏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다. 덕만이 죽자 아우 승만이 뒤를 이어 진덕여왕(28)이 되었다. 세째 딸이 바로 백제 26대 왕인 무왕에게 시집간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이다.
진덕까지 죽자 신라 왕계에 성골이 씨가 말랐고, 진흥왕의 두째아들 진지왕, 진지왕의 아들 용춘,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골품 제도 하에서 어쩔 수 없이 탄생한 여왕이었다.
신라문화의 세번째 특징은 불교문화라는 사실이다. 왕실과 문화재의 어휘 자체가 전부 불교 용어이다. 법흥왕이라는 말도 법을 일으키는 왕이라는 뜻인데, 법은 불교 12처 설의 법을 가리킨다. 법흥왕이 조성한 절이 흥륜사인데, 여기서 륜은 바로 불교의 윤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국가의 국찰인 황룡사도 역시 불국을 가리킨다. 특히 선덕여왕이 조성한 분황사는 향기나는 여왕의 절이라는 뜻인데, 흥륜사와 황룡사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유지만 남아있지만, 분황사의 경우 9층 탑 중에서 3층까지만 남아 있어서 그나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3만평의 거대한 국찰인 황룡사 바로 옆에 만평 정도의 분황사를 조성한 것은, 여왕도 아버지 할아버지같은 영웅들이 조성한 국찰 못지 않은 절을 지어낼 수 있다는 여왕 스스로의 다짐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중상고기의 왕들은(신라사의 황금라인의 왕들) 한결같이 자신들을 부처라고 생각하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구다마 싯달다의 피를 나눈 진종설을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불국사란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신라라는 나라는 곧바로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인 것이다.24대 진흥왕은 정복왕으로서, 석마모니를 가리키는 전륜성왕이라는 말을 자신에게도 하게 했다. 진흥왕은 자신의 세아들의 이름을 동륜 철륜 은륜으로 지었는데, 여기서 륜은 불교 교설의 윤회라는 어휘에서 따온 것이다. 철륜이 곧바로 진지왕의 이름이다.
재위 15년만에 급사한 선덕여왕의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여성부처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너무나 쇼크를 받고 급사했다고 보는 사학자도 있다.
왕은 사실 일생 독신으로 지냈을까, 나같은 범부는 세속적인 추측을 해본다. 삼국사기에는 그문제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에는 여왕이 음갈문왕(왕이 되지 못한 형제)과 결혼을 했다가 사별했단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른 귀족과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51대 진성여왕에게는 삼대목의 저자인 상대등 위홍이 사실혼에서 남편이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왕의 마음의 연인은 자장대사인 것같다. 여왕은 자장이 중국에 공부하러 갈 때 길을 열어주었고(여왕 5년), 그를 그리워하다가 여왕 12년에 당나라 고종에게 특별 청을 넣어 신라로 불러왔다. 자장은 여왕에게 분황사와 황룡사 9층탑의 조성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라고 한다. 국왕과 국사라는 위치에서 남녀간의 밀회는 어려웠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정신적으로 서로 연모한 것은 사실인 것같다.
천년의 미소를 머금은 신라여인의 모조품을 하나 사가지고 와서 서재의 벽에 걸어놓았다.아침에 눈을 뜨니 여인이 어서 일어나 소설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같아 알 수 없는 흥분과 행복을 아울러 느낀다. 아름다운 신라여인이여 영원하시라. 그대 있어 신라 천년은 영원하리라. 그 많은 정복의 영웅들과 전장의 대장군들은 망각속으로 가더라도 남산 부처골로 환생하신 그대의 모습은 영원하리.
나는 부여여행을 하고 가슴을 저미는 허무감에서 <공>이라는 소설을 써서(232매) 탈고한 적이 있다(<시에> 겨울호). 이번 경주 남산 여행을 하고 무슨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설레는 가슴을 쓰다듬어 본다.
깊어가는 가을 따라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신라의 신비, 그 영원의 미소(흥륜사 발굴 신라인의 미소,일본인 소지))를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
금요일이라 여러가지 일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대략이나마 처리하느라 그 시간밖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 흔해빠진 경주 여행 왜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첨성대 안압지 반월성 천마총 계림 석빙고 불국사 석굴암 포석정 등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또 여러번 보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경주 남산 동북면 부처계곡에 있는 소위 <감실 부처>와 탑골 계곡에 있는 마애불과 석불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신라천년 사직을 생각하면, 웬지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나의 경우, 남들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륜사 유지에서 발견된 신라 천년의 미소라는 와편 조각에 조각된 여인의 얼굴이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얼굴로 생각되어지고, 또 남산 부처골의
<감실 부처>가 역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서 환생하신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이 사실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신라 전문 사학자들의 글을 여러군데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두 조각된 여인의 얼굴이 선덕 여왕이라는 명문은 어디에도 없다.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하건데 선덕여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일 뿐이다.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감실부처>의 여인상을 경주 사람들은 그저 <할매부처>라고 부른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미인인데다가 키가 크고 활달하면서도 정이 깊었고 그리고 다소곳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여왕은 죽을 때 자신의 시신을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것은 결국 드넓은 경주벌의 한복판에 위치한 낭산의 남쪽 부분이라고 추단되었고, 결국 그곳에 묻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그 대업을 수행한 문무왕이 낭산 아래 남쪽에 자신의 무덤과 사천왕사를 건축하였다. 사천왕사의 질펀한 유지가 보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33개의 하늘로 나누고, 그중 도리천은 중심적인 하늘로서 서방정토로 불리워지는데 아미타볼이 관장하는 세계이며, 그 남쪽에 사천왕천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교 교설에 비추어 여왕은 경주의 도리천이라고 믿어지던 낭산 아래 남쪽에 자신의 묘터를 지정했고, 문무왕이 그 남쪽애 사천왕사를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감실 부처가 들어선 남산 동북쪽 부처골은 여왕의 묘터에서 서쪽으로 한 500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은 곧바로 여왕의 사후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덕만 공주는 마흔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자신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아들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55세쯤 타계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여자왕을 반대하는 칠숙의 반란이 있었고, 죽을 때에도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의 난 중에 죽었다.역전의 용장 대장군 김유신도 이 비담의 난을 평정하는데 참으로 고초를 껶었다. 간신히 비담의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경주에 갈 때마다 나는 위에 든 유명 관광유적들만 돌아보았다. 정말로 보고 싶은 신라의 미소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번 가을, 나는 과감하게 여타 잡사들을 뒤로 젖히고 경주행을 결행했다.
도착 다음날 새벽부터 경주 남산 동북쪽 부처골 감실부처를 찾지 못해, 할 일 없이 남산을 종주하였다. 즉 통일전에서 포석정까지 그 험한 등산코스를 온종일 걸려 걸었다. 몸이 녹초가 되었다. 나는 경주 남산이 서울 남산처럼 조그만 산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 산은 해발 490머터의 엄청난 산이었다.122개의 절터와 54개의 부처상과 62개의 탑을 간직하고 있다는 그야말로 자연의 불교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소략한 소개서만을 믿고 덤볐던 내가 잘못이었다.
이러한 불교의 유적들은 남산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이 아니고, 40개 정도가 되는 계곡에 무리지어 비교적으로 지상에 가깝게 분산되어 있었다. 첫날 나는 산의 정상에 있는 금오산 정상 삼층석탑과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는 용장사 절터의 유지만을 보았고, 죽을 고생을 하고 산을 헤맨 끝에 간신히 퇴로를 뚫어 포석정으로 나왔다. 이 길은 부흥사라는 고찰로 오르는 산길인데 경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길이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헤맨 결과 점심까지도 먹지 못했다. 나는 포석정 앞에 있는 잔치국수 집으로 들어가 두 그릇을 비웠다. 풋고추에 잔치국수를 말아 먹으니 그것도 별미였다. 천년 미인의 그 영원의 미소를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일평생 벼르다가 이제 왔건만 이제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나는 단련된 몸이지만 동행한 가족이 녹초가 되었다.불국사 앞 숙소로 기어들어와 녹아떨어졌다.
다음날, 불국사를 천천히 보고, 정오쯤 다시 도전하여, 결국 남산 동북쪽 부처골에 있는 감실 부처를 만났다. 아,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하며 영원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허물을 탓하지 않고 끝없는 사랑으로 나를 부드럽게 안아줄 듯한 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신라 여인의 그 영원의 미소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영원한 여인의 아름다운 미소 바로 그 자체였다.
큰 바위를 파내어 감실을 만들어서 부처를 모신 것이 아니라, 감실를 만들면서 부처를 조각한 것이라. 대단한 힘이 들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여왕이 돌아가시고도 근 1300 여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왕은 경주 남산 부처골 감실부처로, 이 세상에 그 흔적을 들어냈으며, 분황사 3층탑으로, 그리고 첨성대로 그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나같은 중생들은 졸하고 난 후 무슨 재주로 자신이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여왕이 조성했다는 황룡사의 9층탑은 자장 대사가 만약에 이 탑을 세우면 세계의 9개의 나라가 조공을 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황룡사 9층탑은 완전히 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내가 찾아가는 경주 남산 동북 쪽 탑골에서 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황룡사 9층탑의 바위 조각을 참조하여 그 모조품이 경주박물관에 크게 축소된 채 재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마애탑에 조각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인들은 이와같이 아무리 융성한 문화도 시간이라는 세찬 물살 속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예견 하에서, 아름다운 여왕도 그리고 국찰의 탑도 바위 위에 새겨놓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을 처음 대했을 때 그 흥분과 감격은 천년의 미소를 머금은 감실부처를 처음 대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인간 존재의 허무감과 그 존재감의 희미한 추적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런 정도의 조각 작업은 개인이 할 수 없었고, 나라에서 하는 것이었는데, 여왕 사후 7세기 초반에 여왕의 도리천에서 윤회를 가상하고 조각하였을 것이라는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 졌다. 석불이 조각되어진 연대가 7세기 초반이라면, 바로 여왕이 집권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사학자들은 낭산 북쪽에 있는 첨성대가 하늘을 관찰하는 관상대도 아니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도 아니고, 일평생 홀로 산 외롭고 신비스러운 여인 곧바로 김덕만 여인(선덕여왕)이 꿈꾸고 그리던 도리천의 상징적인 건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첨성대의 단이 27개인데, 여왕이 신라 27대왕이기 때문에 첨성대는 곧바로 도리천에 가신 여왕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첨성대가 웬지 여성스러운 선을 가지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깝게 여왕 자신이 스스로 조성한 분황사가 있다. 신라 상중고 기 3대 사찰(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중에서 분황사만이 유일하게 그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분황사 3층와탑이 그것이다. 본래는 9층 탑이었으나 3층만 남아 있다. 신라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아주 귀한 존재이다.
감실 부처와 탑골의 마애불상과 황룡사 9층탑의 조상을 보고 가깝게 있는 여왕의 묘를 낭산 남쪽 기슭에서 찾아 보았다.
주말이라 관광객들이 경주 전역에 넘쳤으나 막상 여왕의 묘에는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짙게 들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마침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 너머, 그 거대한 모습을 들어낸 여왕의 무덤은 너무나 거대하고 그래서 감동적이었다. 나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오래 오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김유신이, 결혼도 하지 않고 김춘추의 아이를 가진 여동생 문희를 죽이려 하자, 여왕은 그 아이의 아버지를 불러오라 하여 이 처녀의 시체를 보지 않으려면 어서 결혼식을 서둘라고 명했다는 명석하고 따뜻한 여왕의 모습이 저 멀리 거대한 무덤 속에서 떠올라 보였다. 이 사실은 하류 진골이던 김유신가(김유신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신라에 복속되었기에, 김알지 후손과 구별하기 위해 신김씨라고 신라사에서는 말한다.)와 왕족이던 김춘추가를 맺어주려는 여왕의 계획된 연극이었다.
신라문화의 특징은 나의 관점으로는 크게 세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처럼 정복자들에 의한 피정복 왕국이 아니다. 소백과 태백으로 가려진 경주 일원 후미진 골짜기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왕국이다. 그래서 AD 500년 23대 지증왕이 등극할 때까지만 해도 왕이란 칭호를 쓰지 않고 그냥 마립간이라고 불렀다. 거사간,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은 한 부족의 추장의 이름이었다. BC57년에 건국되었으니 978년 역사에 근 삼분의 이를 왕국으로서 지낸 것이 아니었다. 지증왕, 법흥왕(23대,흥륜사 조성,불교공인), 진흥왕(24,황룡사 조성,정복왕),진지왕(25),진평왕(26,천사옥대),선덕여왕(27,분황사조성,황룡사 9층탑 조성,첨성대 조성), 진덕여왕(28), 태종무열왕(29,백제멸망시킴), 문무왕(30,고구려 멸망시킴,668년), 신문왕(31,감은사 조성),성덕왕(33,에밀레종), 경덕왕(35대, 불국사 석굴암 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 천년 사직의 황금라인이다.
신라 35대 왕인 경덕왕 이후로는 사실 뛰어난 왕이 없었다. 경덕왕 이후로도 21명의 왕이 즉위했으나 권력암투가 치열하였고 죽이고 죽는 비극이 속출하였다. 경덕왕 이후 150여년간은 신라사의 내리막길이고 암흑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두번째 신라문화의 특징은 골품제도이다.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7등급으로 전 백성을 갈라놓고 엄격한 차등을 두었다. 성골은 왕의 자식만을 가리킨다. 왕의 동생이나 삼촌도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이 된다. 진골은 왕이 될 수 없다.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대장군 김용춘의 아들이지만 어머니 지도부인이 3촌정도의 왕족이 아닌 귀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성골이 되지 못하고 진골이었다. 진지왕은 24대 진흥왕의 두째 아들이지만 형인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즉위하였다.
그러나 태자 동륜의 아들 26대 진평왕이 삼촌인 25대 진지왕을 3년만에 내쫓고 왕이 된 것이다. 이 진평왕은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해, 슬하에 성골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니 할 수 없이 맏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다. 덕만이 죽자 아우 승만이 뒤를 이어 진덕여왕(28)이 되었다. 세째 딸이 바로 백제 26대 왕인 무왕에게 시집간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이다.
진덕까지 죽자 신라 왕계에 성골이 씨가 말랐고, 진흥왕의 두째아들 진지왕, 진지왕의 아들 용춘,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선덕여왕은 신라의 골품 제도 하에서 어쩔 수 없이 탄생한 여왕이었다.
신라문화의 세번째 특징은 불교문화라는 사실이다. 왕실과 문화재의 어휘 자체가 전부 불교 용어이다. 법흥왕이라는 말도 법을 일으키는 왕이라는 뜻인데, 법은 불교 12처 설의 법을 가리킨다. 법흥왕이 조성한 절이 흥륜사인데, 여기서 륜은 바로 불교의 윤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국가의 국찰인 황룡사도 역시 불국을 가리킨다. 특히 선덕여왕이 조성한 분황사는 향기나는 여왕의 절이라는 뜻인데, 흥륜사와 황룡사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유지만 남아있지만, 분황사의 경우 9층 탑 중에서 3층까지만 남아 있어서 그나마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3만평의 거대한 국찰인 황룡사 바로 옆에 만평 정도의 분황사를 조성한 것은, 여왕도 아버지 할아버지같은 영웅들이 조성한 국찰 못지 않은 절을 지어낼 수 있다는 여왕 스스로의 다짐이었다고 전한다.
신라 중상고기의 왕들은(신라사의 황금라인의 왕들) 한결같이 자신들을 부처라고 생각하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구다마 싯달다의 피를 나눈 진종설을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불국사란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신라라는 나라는 곧바로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인 것이다.24대 진흥왕은 정복왕으로서, 석마모니를 가리키는 전륜성왕이라는 말을 자신에게도 하게 했다. 진흥왕은 자신의 세아들의 이름을 동륜 철륜 은륜으로 지었는데, 여기서 륜은 불교 교설의 윤회라는 어휘에서 따온 것이다. 철륜이 곧바로 진지왕의 이름이다.
재위 15년만에 급사한 선덕여왕의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여성부처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키자 너무나 쇼크를 받고 급사했다고 보는 사학자도 있다.
왕은 사실 일생 독신으로 지냈을까, 나같은 범부는 세속적인 추측을 해본다. 삼국사기에는 그문제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에는 여왕이 음갈문왕(왕이 되지 못한 형제)과 결혼을 했다가 사별했단는 기록이 있고, 또 다른 귀족과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51대 진성여왕에게는 삼대목의 저자인 상대등 위홍이 사실혼에서 남편이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왕의 마음의 연인은 자장대사인 것같다. 여왕은 자장이 중국에 공부하러 갈 때 길을 열어주었고(여왕 5년), 그를 그리워하다가 여왕 12년에 당나라 고종에게 특별 청을 넣어 신라로 불러왔다. 자장은 여왕에게 분황사와 황룡사 9층탑의 조성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라고 한다. 국왕과 국사라는 위치에서 남녀간의 밀회는 어려웠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정신적으로 서로 연모한 것은 사실인 것같다.
천년의 미소를 머금은 신라여인의 모조품을 하나 사가지고 와서 서재의 벽에 걸어놓았다.아침에 눈을 뜨니 여인이 어서 일어나 소설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같아 알 수 없는 흥분과 행복을 아울러 느낀다. 아름다운 신라여인이여 영원하시라. 그대 있어 신라 천년은 영원하리라. 그 많은 정복의 영웅들과 전장의 대장군들은 망각속으로 가더라도 남산 부처골로 환생하신 그대의 모습은 영원하리.
나는 부여여행을 하고 가슴을 저미는 허무감에서 <공>이라는 소설을 써서(232매) 탈고한 적이 있다(<시에> 겨울호). 이번 경주 남산 여행을 하고 무슨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설레는 가슴을 쓰다듬어 본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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