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오창학 기자]
측천무후의 무자비와 건릉에서 만난 신라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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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 전경. 건릉 오르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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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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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사 터를 나서 시안 서쪽으로 90Km 떨어진 건릉(乾陵)으로 향했다. 내일엔 간쑤성
란저우로 향해야 하니 312 도로상의 무릉, 건릉을 거쳐 그대로 빠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먼 길 앞두고 차량정비 문제와 허베이의 고속도로에서 터진 백구의 예비타이어 준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나그네에게 주는 익숙한 잠자리의 안정감도 버릴 수 없어 시안 시내로 회귀하는 일정을 잡았다. 때문에 건릉을 지나 시안에 근접한 무릉에 이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건현(乾縣)의 논길과 포장도로를 달리니 멀리 건릉이 보인다. 입구의
영태공주묘를 지나쳐 그대로 건릉에 올랐다. 고종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함께 묻힌 양산(梁山)이 그대로 묘역인지라 당 18능 중 최대 규모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하겠다. 건릉에 이르는 약 1Km의 길은 문무 석상들이 시립해 있다. 십 몇 년 전 제작된 NHK비디오 속의 그 비포장 길은 간 데 없고 고운 돌로 포장되어 있다. 좌우에 석상을 낀 이 길은 과거엔 4품 이상의 벼슬아치만 걸을 수 있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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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천무후의 '무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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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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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의 목구멍이라 할 만한 위치에 이르니 우측에 흰빛의 거대한 비가 서있다. 이름하여 무자비(無字碑). 지금은 이놈 저놈이 뭐라 한 마디씩 새겨 놓아서 낙서처럼 글씨의 흔적들이 차 있지만 애초엔 아무 글도 새겨놓지 않았던 측천무후의 비석이다. 13세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여인이 되어 80여 평생 동안 권력을 독점한 여인, 종국엔 중국 최초의 여황제 자리에 스스로 등극한 그녀가 무슨 연유로 무자비를 세웠을까. 건릉 안내원은 몇 가지 설로 압축해 설명한다.
첫째, 측천무후 자신의 공로가 너무 커 문자로 형상화함이 불가하니 그냥 무자비로 놓아 두라 했다는 것. 둘째, 자신의 공로를 후세사람이 평가할 것이니 그때 새기라 했다는 것. 셋째, 측천무후의 아들이 비를 세우며 비명을 황제로 할 지 황후로 할 지 갈등하다 못 썼다는 것 등인데 신빙성 없는 입담 정도의 이야기다.
무측천의 병세가 위독하여 중종이 병 문안을 왔을 당시 무씨 집안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아울러 “나는 평생을 살아오며 남이 못한 일을 다 이루고 살았으니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하니 꿈만 같구려. 후에 나를 꼭 황제라 칭하지 말고 여전히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불러 주오”라는 유지를 눈물로 일렀다니, 무자비는 무측천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평가유보의 의미로 남겨 놓은 기념물이 아닌가 싶다.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딸과 아들들을 죽이고, 무자비한 숙청을 일삼은 탓에 잔혹한 살상과 천륜을 저버린 철녀라는 평가와 거의 반세기 통치기간 중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으로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꾀한 성군이라는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 역시 하얗게 비어 있는 무자비의 앞뒤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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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사신상. 목과 발등이 전부 훼손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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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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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이 건릉에서 무자비보다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뒤편에 좌우로 진열되어 있는 61사신상이다. 서역을 비롯한 중국의 주변국에서 보낸 조문사절들을 실물크기의 석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인데 하나같이 목이 잘리고 발등이 깨져 있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린다. 석상의 귀신들이 밤에 나와 곡식을 해치므로 현지민들이 이를 막기 위해 머리와 발을 잘랐다는 설, 그리고 사신의 후손들이 여황제의 무덤에 조문 왔던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파괴했다는 설. 역시 믿거나 말거나.
우리 일행은 도굴꾼(거대한 석상을 통째로 들어가기는 어려우니)의 짓이거나 종교적 이유에서(특정 종교인들이 불상을 파괴할 때 머리를 떼어내는 지금의 현실로 비추어 보아도) 누군가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닌가 의견을 나눴지만 무엇 하나 확실해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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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사신상 앞에 선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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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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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매임 방식과 주름으로 미루어 신라 사신이라 추정하는 3열 두 번째 석상 앞에 섰다. 그 옛날 먼길을 걸어 이곳에 닿았을 조상의 모습을 접하니 마음이 이상하다. 눈물겹다고나 할까, 감개가 무량하다고나 할까. 한민족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기껏 목 없는 다수의 석상 앞에서 기웃거리는 처지에 대해 일행의 일부는 역시 회의적이다. 얼굴 없는, 얼굴이 있다 해도 명판이 없어 신라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석상 앞에서, 더군다나 속국의 사신들이 조문 온 상황을 재현한 저 모형물 앞에서 외려 작아질 뿐 자긍심이나 자부심은 일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다시 시안 박물관의 장회태자묘 예빈도에 등장하는 신라사신에 대해 언급한 논의의 재현이다. 역시 나의 논리도 반복. 중국 옆에 엄연하게 존재했던 나라(작든 약하든 간에), 실크로드 길의 역사에 이렇게 증거물이 남아 있는 나라(실크로드 교역사의 또 다른 주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물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건릉이 의미 있는 건 이 석상이 신라의 사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릉에서 석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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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힌 철문을 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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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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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에서 바쁘게 달려 무릉(武陵)에 도착하니 오후 6시 40분. 폐관 시간을 40분이나 넘겨 도착했으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김일제 묘는 찾아봐야 하는데 지금 아니면 다시 올 수 없는 길이고. 닫힌 철문 사이로 사람을 부르고는 에릭님과 철봉씨가 나섰다. 우린 한국에서 왔노라고. 꼭 이 무덤을 봐야하는데 지금 발길을 돌리면 다시 올 수 없는 길이라고. 그러니 뭔 방법을 모색해 달라고. 그러자 사람 좋은 관리인이 문을 열어준다. 게다가 철봉씨 수완으로 입장료를 반값으로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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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위)와 마답흉노상(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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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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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 박물관은 곽거병 묘 앞에 조성되어있다. 박물관 전시물을 보고 중앙연못을 넘는데 연못 너머의 좌우에 석조 마답흉노상(馬踏匈奴象)과 월마상(越馬象)이 있다. 둘 다 말이 흉노를 밟고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볼 때 투박한 기교이기는 해도 당시 사람들의 소망을 읽을 수 있는 상징물이다. 얼마나 흉노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이 컸으면… 어쩌면 저 말은 한무제가 그토록 탐냈던 한혈마(汗血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곽거병 묘 위 남승정(覽勝亭)에 올랐다. 기껏 무덤 위에 올랐거늘 숨이 차고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을 무덤 삼는 인간의 욕망이 새삼스럽다. 공자가 버려놨나? 인간이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돌아감을 당연시 여기던 공자 이전의 시대에는 죽은 자를 구덩이에 묻고 덮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던 공자는 부모의 묘지를 찾지 못할까봐 묘혈에 4척 높이의 둔덕을 만들고 몇 그루의 나무를 심어 봉분을 만든다. 이후 봉분을 만드는 분묘양식이 후대로 오면서 정치 색까지 가미되어 각지로 퍼져 나갔고, 드디어는 왜곡된 욕망의 발현으로까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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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청의 무덤 위에 내린 석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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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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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욕망의 정점에서 다른 욕망들을 본다. 무제와 이씨 부인, 위청의 묘가 곽거병 묘 서편에 위치하고 동편에 김일제의 묘(이것이 무릉을 찾은 이유이다)가 있다. 그 욕망의 무더기들 위로 해가 눕고 있다. 저문 석양이 쇠한 풀무덤 위로 떨어지는 경관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김만중의
구운몽>에서 양승상이 취미궁 서녘 높은 대(臺)에 올라 등고할 제 ‘슬픈 바람이 찬 수풀에 불고 저문 구름이 빈 뫼에 덮은 한무제의 무릉’을 보며 호화 부귀 백 년이 짧다 한탄하던 대목에 비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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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양 앞에 선 교수님과 마님(필자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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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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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을 극복해 정주민족의 꿈과 희망이 되었던 한무제도 저렇게 땅에 누었다. 말에 미친 사내 무제. 그의 ‘오타쿠(마니아 보다 더욱 심취한 사람)’적 기질에 맘이 끌린다. 하루 천 리를 달릴 때 앞 어깨 작은 구멍에서 피땀을 흘린다는 서역의 명마 ‘한혈마(汗血馬)’를 얻기 위해 페르가나를 침공하고 기어이 명마들을 상납 받는 그의 집념. 하긴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도 한혈마 때문인지 모르겠다. 오늘날로 말하면 최신예 기갑 전력을 얻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유목민족과 전투에 ‘말’이 끼친 영향이 오죽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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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제의 무덤. 위청이나 곽거병 묘에 비하면 초라한 대접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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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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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북으로 흉노를 격파해 내몽고 지역을 점령하고 남으로 하서지역을 점령하여 실크로드 교역로 전체를 장악한다. 이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위청과 곽거병 장군의 무덤이 한무제 옆에 자리 잡은 것을 보면 흉노 퇴치와 서역로 개척이 무제에게 가지는 의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살아 맺은 인연을 죽어서까지 이어가려 한 무제의 무덤군에 이씨 부인과 곽거병, 위청 외에 신라
문무왕의 선조로 거론되는 김일제의 무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김일제 묘의 위치는 흉노와 전쟁을 벌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김일제와 그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온 주역인 곽거병의 무덤 오른쪽이다.
흉노족의 태자로 한나라에 잡혀와 노예가 되었으나 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로로 종국에는 투후의 벼슬에 이르고 죽어서 제왕의 곁에 묻힌 사람. 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하사 받은 이. 낙양 백마사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과연 김일제는 문무왕비문의 내용대로 신라 왕족의 선조였을까? 과수원에 둘러싸여 잡풀 무성한 무덤은 종내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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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준비하는 백구와 파라곤. 끝내 백구의 예비타이어는 구하지 못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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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오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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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떨어졌는데도 말없이 기다려 주는 무릉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더 이상의 폐를 끼치기 민망스런 생각이 들 무렵 무덤을 나섰다. 시안에 들어섰을 때는 밤 9시를 넘긴 시간. 타이어를 부탁해 놓았던 정비소에 들르니 백구의 발통에 끼워진 것과 같은 규격의 타이어를 구할 수 없었다 한다. 기어이 예비타이어를 확보하는 일이 틀어졌다. 이 대도시 시안에서 구할 수 없다면 중국에 없다는 말인가? 사막과 긴 비포장 길을 앞두고 부담이 크다. 어이없는 일이다. 겨우 타이어 한 짝 손실이 여행 전반에 끼치는 심리적 압박이 이토록 클 줄이야.
란저우를 향해 700Km 넘는 길을 주행해야 하는 내일을 위해 차량을 점검하는데 오늘 저녁의 석양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과 함께 길을 떠나리라.
/오창학 기자
덧붙이는 글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2 년여 가까이 계속해 오던 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의 연재마저 보류한 채 많은 시간을 이 여행의 준비에 매달렸고 결국은 실행에 옮겨 연재를 진행합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라이프(http://www.rvlife.co.kr)’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