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의 처 : 진주성 안내소 055-749-2485 / 전송 055-749-2807
개 요 : 진주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많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김시민 장군의 농민항쟁
이나 임란 때의 논개의 순국,1862년 전국적인 임술민란의 대표격인 진주민란 등 큰 사
건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과 관계가 깊다.
진주성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것으로 조선
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 높이
는 약 5m~8m(15척)이며, 성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河崙) (1347-1416)의 성문기(城門記)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5년 (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쪽)이
있고, 성밖은 서쪽으로 청천(靑川)이 남쪽에는 긴 강 (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
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
이처럼 고려말에 왜구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이 성은 조선 선조 25년 (1592) 임진왜
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 것은 3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
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
었기 때문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는 민.관.군 7만여명이 왜군 12만여명을 맞
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
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기도 하다.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
대, 북장대, 창열사,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