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1만 5000 가까운 병력이..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Ⅱ 후금을 치는데 동참하라는 명의 요구가 날아들었을 무렵,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외교적 감각이 탁월했던 광해군이지만, 내정(內政)에서는 적지 않은 난맥상을 드러냈다.‘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廢母殺弟)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대표적이다. ‘폐모’는 ‘살..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이성량(李成梁)이 병탄을 시도하고, 광해군과 왕세자를 책봉하러 왔던 명사(明使)들의 은(銀) 징색이 이어졌던 것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대 누르하치의 건주(建州)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지만 국왕 광해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장 그의 친형 임해군을 처리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사관(査官) 엄일괴 등을 은으로 구워삶아 위기를 넘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부터 신료들은 ‘역적’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즉위하자마자 혈..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 Ⅲ 명 조정이 왕세자로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광해군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604년, 명나라 제독주사(提督主事) 섭운한(雲翰)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온 조선 사신들에게 극언을 퍼부었다.‘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가 된 것은 너희 국왕의 책임’이며 ‘맏아들 대신 둘째..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5)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Ⅱ 광해군은 성공적인 분조 활동을 통해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부왕 선조의 견제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의주까지 파천하기에 급급했던 선조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매듭지으려 했던 명군 지휘부는..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4)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Ⅰ 누르하치를 치는 데 동참하라는 격문을 받았을 때 광해군(光海君)이 보인 반응은 신중했다. 아니 냉정했다. ▲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4월 부산진 전투를 170년 뒤인 숙종때 화가 변박이 다시 그린 전투도. 부산진 성곽을 둘러싼 왜병과 왜선이 당시의 전력차이를 실감케 한다. 육군관물관 소장. 그는 누.. 歷史. 文化參考 2007.07.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이성량(李成梁)이 병탄을 시도하고, 광해군과 왕세자를 책봉하러 왔던 명사(明使)들의 은(銀) 징색이 이어졌던 것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대 누르하치의 건주(建州)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 歷史. 文化參考 2007.05.09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지만 국왕 광해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장 그의 친형 임해군을 처리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사관(査官) 엄일괴 등을 은으로 구워삶아 위기를 넘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부터 신료들은 ‘역적’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즉위하자마자 혈.. 歷史. 文化參考 2007.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