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병자호란 107

[병자호란 다시 읽기] (7)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누르하치,그리고 만주 Ⅰ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와 민중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학계의 병자호란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 하기 어렵다. 그같은 상황은 병자호란뿐만이 아니라 조·청관계나 만주와 관련된 연구 전반에서 그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1405년 퉁밍거티무르가 입조(入朝)해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된 이래 명의 여진족에 대한 포섭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영락제(永樂帝)는 1409년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총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퉁밍거티무르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은 노..

[병자호란 다시 읽기] (5) 임진왜란, 누르하치, 그리고 조선 Ⅱ

임진왜란 초 일본군에 밀려 의주까지 쫓겨갔던 조선은 누르하치의 원병 제의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전까지, 두만강 너머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로부터 간헐적으로 침략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조선은 그들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

[병자호란 다시 읽기] (4)임진왜란, 누르하치, 그리고 조선 Ι

1592년의 임진왜란은 병자호란보다 44년이나 먼저 일어났지만, 두 사건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83년 군사를 일으켜 주변의 여진족 정복에 나섰던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여진족 안에서 아구다 같은 패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명이, 왜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