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96) 처참한 나날들 도성 곳곳 참혹한 시신들… 묻어줄 일손조차 모자라 2008-11-05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가 항복의 예를 마치고 환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청군은 아직 철수하지 않았고, 그들은 조선 조정에 이런 저런 요구들을 쏟.. 歷史. 文化參考 2008.11.04
[병자호란 다시 읽기] (95) 三學士의 최후 2008-10-29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상징되는 치욕적인 항복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귀천을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의 참혹한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인조를 대신해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화친을 방.. 歷史. 文化參考 2008.11.01
[병자호란 다시 읽기] (94) 해가 빛이 없다 2008-10-22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37년(인조 15) 음력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일찍부터 여진족을 ‘오랑캐’이자 ‘발가락 사이의 무좀(疥癬)’ 정도로 멸시해 왔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그것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 歷史. 文化參考 2008.10.25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2008-10-15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왕실과 대신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성(出城)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 歷史. 文化參考 2008.10.25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2008-10-08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정은 이 때 청군이 또 다른 조건으로 제시한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는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적진에 당도하면 죽음을 당할 .. 歷史. 文化參考 2008.10.25
[병자호란 다시 읽기] (91) 강화도의 비극 2008-10-01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강화도가 함락될 때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 조선군의 최고위 지도부는 바다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그들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연쇄적인 비극을 불렀다.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강.. 歷史. 文化參考 2008.10.25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술 취한 장수는 도망가고… 죄 없는 백성은 어육 되고… 2008-09-24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 歷史. 文化參考 2008.09.30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海戰 경험 적은 淸軍 얕보다 허찔려 ‘철옹성 와르르’ 2008-09-17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 歷史. 文化參考 2008.09.22
[병자호란 다시 읽기] (88) 인조의 절박함과 홍타이지의 절박함 인조, 반정 통해 얻은 지존 위신 잃을까 出城 회피 2008-09-10 28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항복을 하더라도 산성에서 나가는 것만큼은 끝까지 피하고자 했던 인조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월20일 조선은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칭신(稱臣)했다. 찢고 .. 歷史. 文化參考 2008.09.09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항복형식 왈가왈부 하는 동안 포탄은 성안으로… 2008-09-03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 歷史. 文化參考 2008.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