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궁중비사] 8. 王規의 亂 왕건 태조의 경륜 중에서 가장 큰 실책을 든다면 여러 후궁을 둔 점과 거기서 파생되는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점일 것이다. 태조가 여러 후비들에게서 낳게 한 아들은 모두 합쳐서 이십오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태조가 생존하였을 때부터 왕자의 생모들은 자기 소생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 歷史. 文化參考 2007.03.01
[고려 궁중비사] 7. 訓要十條 태조가 등극한지도 어느덧 스무여섯 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육십칠세, 한낱 무장(武將)의 아들로 태어나 삼국을 통일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적(私的)으로도 많은 후비를 거느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으니 유감없는 평생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 歷史. 文化參考 2007.03.01
[고려 궁중비사] 6. 王建의 女人들 왕의 후비는 유씨와 오씨만이 아니었다. 충주(忠州) 사람 유긍달(劉兢達)의 딸 유씨부인(劉氏夫人), 동족인 왕제공(王悌恭)의 딸 명복궁부인(明福宮夫人), 김부의 백부가 되는 김억렴(金億廉)의 딸 김씨부인(金氏夫人), 박영규(朴英規)의 딸 동사원부인(東山院夫人), 공신 유금필(庾劒弼)의 딸 동양원부.. 歷史. 文化參考 2007.03.01
[고려 궁중비사] 5. 三國의 統一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발흥하자 신라의 국운은 나날이 기울어 갔다. 신흥 양국 사이에 끼어 항상 위협을 당하는 터인데, 왕과 여러 신하들은 국방에 전념하지 아니하고 사치와 유흥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고려 태조 십년(西紀 九二七) 구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향해 대거 진격해 .. 歷史. 文化參考 2007.02.28
[고려 궁중비사] 4. 浣紗川 情事 태조 사년 십이월, 왕은 왕자 무(武)를 정윤(正胤=임금의 嫡子를 말함)으로 삼았는데 곧 태자(太子)가 되었다. 장자인 무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와의 소생이다. 그는 신라 신덕왕(新德王) 원년(西紀 九一二)에 출생하였는데, 그의 출생에는 기구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왕건은 일찍이 금성군(.. 歷史. 文化參考 2007.02.28
[고려 궁중비사] 3. 별을 찾는 女心 왕건이 새 나라를 세우고 등극하였을 때에는 그의 나이 42세였다. 한참 정력을 쏟아 건국의 대업을 이룩하기에 알맞은 나이였다. 그는 등극한 즉시로 조서(調書)를 내렸다. <지난날의 궁예는 각 고을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일어나 도적의 무리들을 토평(討平)하고, 강역(彊域)을 넓히었으나, 아직 .. 歷史. 文化參考 2007.02.28
[고려 궁중비사] 2. 사랑은 버드나무 아래에 궁예가 왕건을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이 표면화하자 은근히 궁예를 원망하고 왕건을 지지하던 장상(將相)들은 마침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이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네 사람이었다. 홍유는 궁예의 휘.. 歷史. 文化參考 2007.02.28
[고려 궁중비사] 1. 暴君 弓裔 고려(高麗) 오백년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표면에서 호령하던 군주나 권신들보다도 그 이면(裏面)에서 오히려 놀랄 만한 힘을 발휘하고, 군주나 권신들을 허수아비처럼 조종한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새나라 고려를 창건하기에 이르는 동안에도.. 歷史. 文化參考 2007.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