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래> 단군세기의 저자 고려후기 명필 이암 고려후기-이암 이암과 관련한 에피소드 한 가지가 있다. 올 봄에 열린 ‘데라우치문고’전은 조선시대 왕실기록화, 16세기 시인·도학자, 임진·병자 양란 때 충신의 희귀 육필자료의 발굴로 큰 주목을 받았다. 마침 일제 반출문화재 환수가 사회이슈화하면서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보.. 歷史. 文化參考 2008.05.24
고려시대 농민.노비 고려시대 농가 복원도. <사계출판사 제공> 송광사 소장 노비문서(1281년 충렬왕 7년)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2일 출간된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가 ‘고려사회 속의 인간과 생활’이라는 특집을 마련, 고려인들의 삶을 정밀복원했다. 왕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 歷史. 文化參考 2008.03.23
<스크랩> 김부식의 역사왜곡 김부식의 역사왜곡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장서 원본에 의하면 김부식이 편찬한 사서는 사진에서 보듯이 본래"삼국사"이다 삼국사를 "삼국사기"로 바꾼 자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괴수 금서룡(이마니시류)인데 금서룡은 후한서의 편자 범위종이 말한 다음의 편사체제에 의해 니혼쇼기(日.. 歷史. 文化參考 2007.08.12
[고려 궁중비사] 49. 李成桂의 叛逆 이성계는 친명파라는 위치와 대국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요동정벌에 반대해 왔지만 왕의 명령으로 하는 수 없이 출진하게 되어 우군도통사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니 만큼 그 싸움에 마음이 내킬 리가 없었다.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더 군사를 진격시키지 않고 조민수와 의논하여 회군할 것을 .. 歷史. 文化參考 2007.04.08
[고려 궁중비사] 48. "明나라를 쳐라!" 새 임금 우왕은 처음엔 정당문학 백문보(政堂文學白文寶) 등의 훈도를 받아 오직 학문에 뜻을 두더니 차차 말타기와 매 사냥 같은 오락에 재미를 붙이자 글을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항상 그의 행동을 억제하던 태후 홍씨가 별세하자(육년 이월) 그 행동은 더욱 방자해졌을 뿐만 .. 歷史. 文化參考 2007.04.08
[고려 궁중비사] 47. 魯國公主를 닮은 般若 태후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왕명으로써 시중(侍中=首相)인 경부흥(慶復興)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副首相) 이인임(李仁任) 등을 불러들여 왕을 죽인 도적을 잡으라고 분부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이인임도 도적이 채 도망치지 못하고 궁중에 남아 있으리라 짐작했다. .. 歷史. 文化參考 2007.04.08
[고려 궁중비사] 46. 禍를 自招한 變態行爲 신돈이 주살되자 왕은 허전함을 이길 수 없었다. 왕은 항상 정을 흠뻑 쏟아 놓을 상대가 있어야 견디는 성품이었다. 그러므로 신돈이 없어지자 그 대신 가까이 두고 총애하게 된 것이 환관 중에 젊고 외모가 아름다운 소년들이었는데 그들이 속해 있는 관청을 자제위(子弟衛)라고 불렀다. 이 자제위에 .. 歷史. 文化參考 2007.04.08
[고려 궁중비사] 45. 遍照와 辛旽 불우하던 자가 권세를 잡으면 굶주렸던 자가 음식을 만난 듯 탐욕해지는 수가 많다. 신돈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늘어나자 마침내 신돈은 물욕과 권세욕과 음욕(淫慾)을 한없이 탐하게 되었다. 특히 심한 것은 체면도 모르고 청탁도 가리지 않는 음욕이었다. 신.. 歷史. 文化參考 2007.04.05
[고려 궁중비사] 44. 魯國公主의 죽음 공민왕은 패기만만(覇氣滿滿)한 포부(抱負)를 품은 반면 만사(萬事)를 감정적(感情的)으로 다루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특히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를 가까이 모시던 김용, 최유 같은 자가 반란(反亂)을 일으키기에 이른 것이다. 감정적인 인물은 공사간에 마음에 드는 일이면 .. 歷史. 文化參考 200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