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농가 복원도. <사계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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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소장 노비문서(1281년 충렬왕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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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2일 출간된 반년간지 ‘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가 ‘고려사회 속의 인간과 생활’이라는 특집을 마련, 고려인들의 삶을 정밀복원했다.
왕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 고려인 10명의 인생을 미시사적 접근으로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당시의 사회구조, 그 속에 갇힌 고려인들의 평균적인 삶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왕이나 귀족·지방관리 등 지배계층과 달리 관련 기록이 적은 농민, 노비들의 삶을 복원한 점이 주목된다.
김재명 원광대 교수는 ‘고려사’ 의종편에 나오는 한 농민의 이야기를 통해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고려 농민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당시 경기도 영취산 부근의 귀족 유흥지를 만드는 부역에 동원된 이름 모를 농민이다.
늘 허기진 배를 움켜잡아야 한 농민들은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할 산삼 때문에 하던 농사도 미루고, 산 속 가시덤불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또 임금이 애장할 호피를 구하려고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가 생명을 잃기도 한다.
부역에 동원된 농민들에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 농민의 아내는 머리카락을 잘라 팔거나 심한 경우 몸을 팔아 남편 끼니를 마련하고, 남편의 공물진상 의무를 분담해 밤새 길쌈을 했다.
농민들은 양인 신분으로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었지만 실제론 ‘그림의 떡’이다. “유복한 귀족 자제가 불철주야 공부에 몰두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공거(과거시험관) 출신이 세운 명문사학에 들어가 특별과외까지 받아야 합격할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농민들 가운데 특히 서울·경기 지역 농민들이 더 고달팠다.
도성이나 사찰, 각종 관청 등 크고 작은 토목공사가 다른 지역보다 많기 때문이다. 물론 농지 개간과 농사기술 향상으로 부를 얻는 농민들도 없진 않았으나, 상당수는 부역을 피해 유랑민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김재명 교수는 “무농치부(務農致富)란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현실의 고난을 인내하며 땀 흘리는 농민의 삶이 평균적 고려인의 모습”이라고 밝혔다.
송광사 소장 노비문서(1281년 충렬왕 7년). 노비들의 삶은 농민보다 더 극적이다. 홍승기 전 서강대 교수는 ‘만적’과 ‘평량’의 각각 반란, 살인사건을 통해 노비들의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 본다.
기존 연구들은 평량이 주인을 죽이고, 만적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탈행동에 대해 ‘무신의 난’이라는 신분제의 격변 속에 노비들도 신분상승을 꾀하는 과정에서의 돌출인물로 흔히 설명한다. 그러나 홍교수는 이 두 노비를 비롯, 당시 사건에 가담한 수백명의 노비들이 나름대로 합리성과 정당성을 갖고 행동한 ‘평범한 인간’들이었다고 말한다.
‘장상이 어찌 씨가 있으리요’라는 만적의 문학적인 선동에 많은 노비들이 동조했다. ‘신분상승’과 ‘정권장악’은 실현 가능성에 관계 없이 노비들에게는 하나의 ‘담론’이었다. 그러나 반란 주모자인 만적이 있는 반면, 다른 노비들을 배반하고 반란 모의를 밀고해 신분상승을 얻은 배반자 순정도 있다.
홍교수는 “반란 거사 당일 참여하지 않은 노비 700여명이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벌을 감수한 것은 반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좇을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선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즉 만적이나 순정과 달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댈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노비 모습이 바로 평균적인 고려 노비들이라는 것이다.
이번 특집에서는 농민이나 노비 이외에도 왕, 귀족, 무신, 향리, 화가, 문인, 승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삶이 드러난다. 향리 신분에서 중앙에 진출해 귀족으로 변모한 뒤 그 후손들이 고려 최고의 문벌을 이룬 최충의 이야기는 고려 귀족사회의 내부적 성장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자겸과 사돈을 맺어 신분이 급상승한 뒤 국왕의 권유로 이자겸을 제거하고 권력의 최정점에 올랐지만 반역죄로 탄핵당해 그 성씨마저 역사 속에서 사라진 무신 척준경은 고려사회의 역동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또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민을 보호하고 지방사회의 안정에 기여한 경주 호장(향리) 이유의 활약상은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이 향리였다는 사실이 행여나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세태를 무색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