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l 새책-바람의 화원]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의 제자였고, 나는 그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배웠고, 그는 나를 가르쳤다. 내가 별이었다면 그는 밤하늘을 가르는 벼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그 빛은 차라리 재앙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바로 그 자신에게도. 뜨겁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재앙, 미처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달려들어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재앙, 그리고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재앙.” ‘뿌리 깊은 나무’의 작가 이정명 씨의 신작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은 단원 김홍도가 혜원 신윤복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운을 뗀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도화서(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 생도청에서 인연을 맺은 사제지간이기도 하지만, 3원3재(단원ㆍ혜원ㆍ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ㆍ현재 심사정ㆍ관아재 조영석), 즉 조선 후기의 위대한 화가로 나란히 꼽힐 만큼 뛰어난 역량을 뽐낸 인물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홍도와 달리 신윤복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도화서 화원이었으나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 났다’는 풍문이 돌 뿐,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두 줄이 유일하다. ‘바람의 화원’은 작가의 상상력을 붙여 천재 신윤복이 왜 도화서에서 쫓겨났고, 왜 여인들을 즐겨 그렸으며, 유명한 ‘미인도’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추적한다. 소설에서 김홍도는 어린 소년 신윤복의 싱싱한 재능에 탄복한다. 그런데 신윤복은 승려가 쓰는 송낙을 들고 있는 여인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 파란을 불러온다. 도화서 그림에 여자를 크게 그리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인 데다가, 은근히 표현하긴 했지만 여인과 승려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는 작품은 묘한 상상력을 부추기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퇴출 위기에 몰린 신윤복을 구하기 위해, 김홍도는 신윤복의 형 신영복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여기에 과거의 살인사건, 신윤복을 흠모하는 기생 정향, 정조가 두 천재 화원에게 쏟는 총애, 김홍도와 신윤복의 대결 등이 맞물리며 신윤복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 소설은 우리 그림을 소재로 한 보기 드문 팩션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김홍도의 ‘우물가’와 신윤복의 ‘정변야화’,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가 왜 비슷한지, 신윤복의 ‘주사거배’와 김홍도의 ‘주막’이 왜 비슷한 소재를 차용했는지, 소설은 우연의 일치를 필연의 일치로 바꾸어 가며 줄거리를 구성한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 도판 34점이 실려 소설 이해를 돕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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