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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부식의 역사왜곡

鶴山 徐 仁 2007. 8. 12. 17:32
김부식의 역사왜곡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장서 원본에 의하면 김부식이 편찬한 사서는 사진에서 보듯이 본래"삼국사"이다 삼국사를 "삼국사기"로 바꾼 자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괴수 금서룡(이마니시류)인데 금서룡은 후한서의 편자 범위종이 말한 다음의 편사체제에 의해 니혼쇼기(日本書紀)를 본기(本紀)로 하고 '삼국사'를 제후적 신속(臣屬)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삼국사기(三國史記)라 했다.「제왕의 일을 서술한 것이 소위 서기(書紀)이며, 신하의 일을 서술한 것이 소위 서기(書記)이다.」<통곡하는 민족혼>


민족사가 문 정창 선생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들추어내며 김부식을 다음과 같이 치죄한다. 결론부터 내리면 김부식은 삼국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고려조정의 벼슬을 그만두어 인종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금나라의 서슬퍼런 분위기에 이미 천자나 황제를 일컫지 못하는 고려조정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사 서문에 천자의 선칙을 받아 쓴 것을 진상한다고 했다. 또 「고려사」 <세가전>에는 인종이 국사편찬을 명한바 없고 오히려 벼슬을 그만둔 일개 야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부식은 자신의 「삼국사」 편찬팀 10명을 거느리고 작업을 완료해 금의 황제를 뜻함에 분명한 천자에게 본서를 진상한다 했다. 고려 인종은 이미 천자용어를 쓸 수 없는 살얼음판 정국이었다.

게다가 이미 야인에 불과한 김부식이 인종에게 보고해야 할 공식적인 라인이 없어진 후였다. 그의 보고라인은 인종이 아니라 인종이 묵인한 상태에서 금의 입맛에 맞는 사관으로 역사서를 변조해 바치기로 명령받은 금의 황제였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한 때는 고려 16대 인종 23년(1145년)이다. 이때는 북방의 금나라가 인종 3년에 칭신을 요구한 이래 허다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송을 그 복속국으로 만든 여세로서 고려조에 강한 압력을 가하여 인종으로 하여금 칭신하게 하고,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황(皇) 자, 제(帝)자적인 것을 모조리 삭제하고, 심지어는 사당에 모신 선제(先帝)의 시호와 그 능묘의 명칭까지를 모조리 왕, 왕릉으로 격하시킨 때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오히려 「삼국사」에 선칙을 받들어 편찬했다는 '김부식 봉선찬(金富軾 奉宣撰)'이라는 말을 썼다.

선(宣)은 「강희자전」에 '天子宣室 通哲智'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김부식이 '이 선을 받들어 편찬하다' 한 선(宣)은 바로 금제(金帝)를 받들어 쓴 것이지 고려 인종을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도 '당태종 문황제어찬(唐太宗文皇帝 御撰)'이라 하였다. 선(宣)은 금제(金帝)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송을 토멸한 직후부터 고려왕조에 대해 일관적으로 사용한 글자다.

또 인종 20년 3월 상표를 올려 사표를 제출해 허락 받았다 한 「고려사」<열전 김부식전>의 '仁宗 20年 三上表 乞表致仕 許之' 는 부식이 고려조정을 떠나 금제의 지휘라인에서 금의 입맛에 맞게 사대사서를 지어 바친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것이 바로 신채호가 조선의 역사는 외적이나 내란에 의해 무너지고 상한 것 보다 조선사를 편찬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손상되었다 한 모범적인 케이스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 부식은 인종으로부터 하등의 역사서 편찬 명을 받은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세가전>에 보이는 '인종 23년(1145년) 12월 임술 김부식 進所撰 삼국사'라 하여 김부식이 편찬한 바 「삼국사」를 진상한다 한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 50권의 권두마다 '치사신'이라 하였으나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서는 돌연 신(臣)이라 칭하고 치사(致仕:벼슬을 버림) 두 글자를 생략했다. 금제의 신하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일 선유(先儒)들이 이 사실을 알기에 이 글을 권두에 안 두고 뒤로 살며시 돌려놓았다. 김부식은 이 진표에서 다음과 같은 깎듯한 경칭을 사용했다.

'복유성상폐하(伏惟聖上陛下) 성당요지문사(性唐堯之文思) 체하우지근검(體夏禹之勤儉)-성상폐하께 엎드려 생각건대, 성품은 당요의 문사에 바탕하시고 , 하우의 근검을 근본으로 하시니' 이는 금제에게 한 말이지 결코 인종에게 한 말이 아니다.

김부식은 고려 인종에게 치사(致仕:벼슬사직)하고 물러나 금제의 선칙을 받아 조선족 고유의 사기를 일체 무시 말살하고 모든 역사 사실을 지나의 역대왕조에게 유리하게 해석, 취사하여 그들에 대한 부용적인 사관을 수립하는데 일조했다.

그리하여 부식은 옛 문헌들은 거칠고 무디며 사적이 없어져 옛 일이 아득하고 어지럽다(其古記 文字蕪  史迹闕亡)는 말로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의 역사 일체를 묵살해 버리고 「위략」의 저자 어환(魚 ), 「후한서」 저자 범엽 등 지나 사가들이 요동에다 꾸며놓은 이른바 후일 양(梁)나라가 된 황하 섬서지방의 기자조선을 받아들였다.

거짓말로 만든 기자조선이 대륙에 있거늘 하물며 김부식이 기자조선을 반도 내로 끌어들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과 같이 표절에 표절을 거듭하면서 민족사를 분탕질 한 것이다.

또 「사기」 <조선열전> 이래 국경선에 가로놓여있는 강하의 이름을 패수(浿水)라 불렀음이 사서상의 일반적 칭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얼어죽을 금제(金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동강이 패수라 한 당서를 근거로 하여 평양이 한(漢)대의 낙랑군이라 했다.

그러나 한적상의 패수에는 난하( 河)의 패수, 대능하(大凌河)의 패수, 요하(遼河)의 패수가 있고, 삼국사기 상의 패수에는 대동강의 패수, 예성강의 패하 등이 있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토멸한 직후 대동강이 당과 신라의 국경이라는 뜻에서 패수로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낙랑군에 관한 기본사료인 「사기」와 「한서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낙랑군이 위만조선이 망한 해인 한무제 원봉 3년, 본시 낙랑조선의 땅인 북경 유주(幽州)에 속해, 응소 말하기를 그러므로 조선국이라 하고,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에 있으니, 만리장성을 지은 첫 출발점이라 했다.(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浪郡 屬幽州? 應 曰 故朝鮮國也? 樂浪郡遂城縣 在碣石山 長城所起?)

아니, 대륙 북경이 우리 땅인데 거꾸로 고구려가 망한 뒤 당 고종이 신라와 경계를 삼은 뜻으로 대동강을 패수라 한 것을 낙랑이 대동강 패수에 있었다 하는 이런 영토를 팔아먹은 천하의 매국노를 2001년 1월 문화의 인물로 정한 문화부 장관은 도대체 어느 나라 장관이냐.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매국노 을사 5 적신(賊臣)이 구 한말 조선왕조의 힘이 쇠약한 틈을 타 일제에 붙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금을 빈 껍데기로 만들고 조국과 동족의 피를 빨더니

이미 8백여 년 전에 금이 강성해진 틈을 타 자신의 주군인 인종을 둘러리로 내세워 금에 붙어 사대의 사서를 지어바치고 매국의 길을 걸은 예를 보인 것이 바로 이완용보다 더 한 천하의 매국노 김부식이다.

김부식이 지어바쳐 간살을 떤 '진 삼국사 표'를 보면 일제 하 친일매국노의 대표적 거두 인촌 김 성수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간살을 떤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김부식의 죄를 이완용의 추로 저울에 재면 이완용의 추를 두 개를 얹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할 것이니 이는 나라를 팔아먹은 것 보다 역사 혼을 판 후유증이 천세 만세에 그 해악이 미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