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법당바닥에 솟아오른 칼바위는 무슨 바위인고?

鶴山 徐 仁 2006. 6. 3. 15:25

 

[오마이뉴스 임윤수 기자]
▲ 자장암 관음전 법당 바닥에는 칼바위가 솟아있습니다.
ⓒ2006 임윤수
불보(佛寶) 사찰인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계곡에는 절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절들이 있습니다. 산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휘휘 가지를 늘이고 있어서 고찰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절의 규모와 엄청난 방문객을 수용하느라 꽤나 넓어진 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만,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줍니다.

통도사로 시작되는 영취산 계곡엔 20여 개의 산내 암자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산길을 오르며 염불소리가 끊일만하면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들려오고 머지않아 다른 암자가 나타나니 계곡 전체가 법당이 됩니다.

절골, 영취산 통도사에 있는 산내암자 자장암을 찾아

절골이란 표현에 걸맞게 산문부터 영취산 정상까지 염불과 목탁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끊이지 않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몸도 마음도 불가의 세계로 들게 해 주니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절골로 들어서 통도사를 지나 작은 고개하나를 넘으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산내 암자 중 제일 꼭대기에 있는 백운사로 가게 되고 왼쪽 길로 가게 되면 자장암으로 가게 됩니다.

▲ 돌담을 따라 만들어진 돌계단을 오르면 담쟁이덩굴 너머로 관음전 법당이 보입니다.
ⓒ2006 임윤수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신라 선덕여왕 15년(서기 646년))하기에 앞서 수도하던 곳이라니, 절골의 발원지며 통도사의 모태인 셈입니다.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찾아간 자장암은 조용하고 아름답습니다. 전설이 아름답고 주변 산세가 아름답습니다.

아기자기한 전각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달하며, 들여 마시는 공기조차도 달달합니다. 담쟁이넝쿨 곱게 올라가고 있는 높다란 돌담조차도 경계나 걸림으로 보이지 않고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기와지붕과 기암, 그리고 가지 느린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합니다. 그 수묵화 속에 고승들이 살았음직한 아담한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서니 제일먼저 갈증을 달래 줄 감로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멈춘 듯 넘치듯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한 쪽박 가득 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휴∼하는 심호흡과 함께 그 시원함이 배꼽까지 짜르르하게 전해집니다.

기암과 낙락장송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 잡은 관음전

감로전 우측으로 있는 전각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며 요사입니다. 법당은 왼쪽에 세워진 출입문으로 들어섭니다. 문짝이 달린 이 출입문엔 '자장암'이란 편액이 달려있습니다.

법당 쪽으로 여닫는 두 짝의 문짝은 파란색 바탕에 수호신인 듯 금강장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사역을 확장해 울타리 밖에 널찍한 요사를 지었지만, 예전엔 출입문 안쪽에 요사가 있었던, 좀 더 적은 규모의 사역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 기암괴석과 조하를 이룬 낙락장송아래 자리한 전각이 관음전이며 우측으로 돌아서면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가 있습니다.
ⓒ2006 임윤수
문으로 들어서는 왼쪽은 절벽에 높게 쌓아올린 돌담입니다. 허리띠 두른 듯 담쟁이넝쿨을 곱게 두르고 가지런히 곱게만 보였던 바로 그 담장, 바깥쪽에서 보았던 높은 담장 위에 법당이 있습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이 아름답습니다. 산들이 굽이치니 계곡도 굽이칩니다. 너울춤이라도 추듯 구름이 흘러가니 산바람은 노랠 부르듯 나뭇잎들을 흔들어 댑니다.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4간의 전각이 보입니다. 지금도 요사로 사용되고 있지만 예전엔 이 전각이 요사의 전부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담장과 나란히 세워진 전각이 관음전입니다.

관음전 뒤쪽은 바로 기암괴석에 낙락장송이 어우러졌던 바로 그 비경입니다. 둥글둥글한 바위들이 부드럽게 산세를 이어나갔습니다. 그 바위 틈새로 죽선을 펼친 듯 잘생긴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습니다. 허전하지도 빼곡하지도 않게, 넘치지도 모자람도 없이 눈길이 시원할 만큼 공간을 두고 휘휘 가지를 드리웠습니다.

잔디마당엔 디딤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고, 이 디딤돌과 나란하게 관음전이 있습니다. 마당 중간쯤, 관음전이 시작되는 지점에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습니다. 이 쌍사자 석등을 경계로 안쪽(왼쪽)으로 관음전이 있고 오른쪽에 마애불이 있습니다. 자장암 관음전은 여러 면에서 독특합니다.

▲ 일주문을 대신 한 듯 세워져 있는 작은 문을 들어서면 관음전으로 들어갑니다.
ⓒ2006 임윤수
우선 전각의 건축양식이 특이합니다. 대개의 전각들은 지붕형식이 맞배지붕이건 팔작지붕이건 양단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장암 관음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면 4간의 관음전의 왼쪽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오른쪽은 맞배지붕 형식입니다. 우측에 있는 커다란 바위, 즉 마애불에 맞추어 전각을 짓다보니 양단의 건축방식을 달리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뿐 아니라 법당의 바닥도 여느 법당 바닥과는 다릅니다. 대개의 법당들은 나무를 켜서 깐 목재 바닥입니다. 그런데 지장암의 법당 바닥은 짚과 돗자리로 만든, 일명 다다미 바닥입니다. 아무래도 바닥에 두툼한 짚이 깔렸으니 나무 바닥처럼 깔깔한 맛은 없겠으나 푹신한 촉감입니다.

법당 바닥에 솟은 칼바위는 무슨 바위인고

정말 독특한 건 관음전 중간쯤에 있는, 법당 내외에 걸쳐있는 칼바위입니다. 웬만하면 터 다듬으며 깨버렸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 바닥 돌을 그대로 살려 법당을 지었습니다. 법당 밖에 있는 바위가 문지방을 지나 법당 바닥에도 예리하게 솟아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법당바닥에 깔린 돗자리도 솟아오른 바위모양으로 잘라 갈무리를 하였습니다.

▲ 우측으로 관음전 법당이 보이고 그 옆으로 마애불의 일부가 보입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규모가 작은 요사도 보입니다.
ⓒ2006 임윤수
바위를 왜 그대로 놓고 법당을 지었을까? 우선은 있는 그대로에 필요한 부분만을 덧댄 조화를 추구한 듯합니다. 마애불 바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어색하지 않는 전각을 구상하다 보니 지붕도 조금은 생뚱한 두 가지 양식을 혼용하였듯, 있는 그대로를 살리며 전각을 세우느라 이렇게 바위를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있는 그대로에 조화를 맞추려는 마음, 순리에 순응하려는 그런 마음이 이런 독특함을 남긴 듯합니다. 이러한 조화는 단순히 주변경관이나 건물양식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세계라 할 법당 안과 밖을 이렇듯 단절하지 않아, 밖이 곳 법계이며 속세가 곳 법계임을 나타내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나타내는 문지방을 그대로 관통해 있으니 법당 안과 밖을 일치시키는, 불이(不二)의 의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돌을 보며 수행정진의 채찍쯤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입니다. 자칫 무뎌지거나 담담해 질 수 있는 구도자의 마음을 이 칼바위처럼 갈고 닦으라는 표상으로 남긴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참선이나 기도를 하다 졸리기라도 하면 잠시 이 바위에 걸터앉는 것만으로도 모든 잡념쯤은 사라질 듯합니다. 바위의 차가움이 정신을 맑게 하고 그 날카로움이 자세를 가다듬게 할 테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정설이 궁금해 범준 스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 관음전 법당바닥에 솟아오른 바위는 이렇듯 문지방 밖에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바위는 거북 형태를 하고 있는 산세의 꼬리 부분이라고 합니다.
ⓒ2006 임윤수
관음전이 들어선 자리는 전체적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북의 머리는 관음전 뒤쪽 바위에 있으며, 그 거북의 몸통에 해당하는 자리에 관음전이 세워 졌답니다. 등자리에 관음전이 들어서니 그 꼬리가 출입문에 걸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다 묻히도록 땅을 돋고 전각을 지으면 그 높이가 너무 높아지고, 파괴하거나 자를 수도 없으니 이렇듯 꼬리를 살려 전각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바위가 분명 거북의 꼬리기에 지금도 불단에 올렸던 다기의 청수는 반드시 그 꼬리바위에 부어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칼바위처럼 보였던 바위 형상이 거북이 꼬리형상으로 보입니다. 생물뿐 아니라 자연의 산세에서도 그 존귀성을 부여하는 불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 삼면에 암각된 돌부처님들

자장암에는 이렇듯 거북바위만 있는 게 아니고 마애불 뒤쪽으로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 코끼리 형상을 한 바위, 쥐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바위는 법당을 신장하고 어떤 바위는 염불소리 들으며 업보를 참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자장전과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가 한눈에 보입니다.
ⓒ2006 임윤수
관음전 우측으로 바위부처님인 마애불이 있습니다. 자연바위를 '冂'자로 다듬고, 앞쪽을 조금 더 벌려 세운 병풍 같은 바위삼면에 마애불이 암각되어 있습니다. 정면이 되는 중앙부에는 아미타좌불이 암각 되어 있고, 좌우 각각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암각 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아미타부처님은 가슴까지 오른손을 추켜올려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맞댄 중품상생의 수인을 하였고, 하단전 부위에 얹은 왼손은 엄지손가락과 약지를 맞대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셨습니다.

별다른 문양이 없는 두광에는 군데군데 진언 중의 진언이라는 '옴'자가 범어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마애불들이 자칫 그 균형적 측면에서 불두와 불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아미타부처님은 아주 균형적입니다. 어깨부터 흘러내린 가사의 곡선미와 장삼자락의 펄럭임이 아주 사실적으로 암각 되어 있습니다.

접어진 병풍처럼 면을 달리해 암각된 왼쪽의 대세지보살이나 오른쪽 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매우 섬세하고 부드럽게 암각되어 있습니다. 주불로 모신 아미타좌불의 가슴높이 크기인 두 협시불 역시 화려한 문양은 없으나 부드러운 곡선만으로도 원만함과 대원력 그리고 자비로움이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 평풍을 펼쳐놓은 듯“冂”형태의 자연석 삼면에 아미타부처님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관세음보살상이 암각 되어 있습니다.
ⓒ2006 임윤수
왼쪽 면의 대세지보살 아래쪽에 "聖上卽位三十三年 丙申七月日 化主 吉山 定一 金翼來 金弘祚 丁泰燮 李善同 朴漢淳 張雲遠"라는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있어 마애불의 조성일과 화주 명단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상은 고종을 말합니다. 고종 즉위 33년, 즉 1896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96년은 조선개국 505년이 되는 해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기 시작하고,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독립신문이 창간된 해이기도 합니다. 의병이 일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될 때 이곳에서는 국운회복을 염원하며 바위 갈아 부처님을 모신 모양입니다. 이 마애불은 110년 전에 불각된 것이니 다른 마애불들에 비해 그 역사가 유구하지는 않으나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곡선미가 뛰어납니다.

이 마애불 앞에는 그리 높진 않은 3층 석탑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수세전(壽世殿)이 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칠성신을 봉안하고 칠성각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수세전이란 편액을 달았습니다. 법당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는 문 바로 우측에 마애불이 있고, 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정면으로 보이는, 수세전과 직각을 이루고 있는 곳에 자장율사를 기리는 자장전이 있습니다.

전설 속의 금개구리 보살, 심신 돈독하면 만날지도 몰라

관음전과 마애불 그리고 수세전과 자장전은 일렬로 길게 자리하고 있으며, 뒤쪽은 바위병풍에 소나무 그늘입니다. 잡다한 잡목 없이 낙랑장소에 기암일 뿐입니다. 관음전 뒤쪽 바위 위로 3층 석탑이 보입니다. 푸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모자람 없이 조화를 이뤘습니다.

오래된 절에 사적만큼이나 꼭 따르는 것이 전설이나 설화입니다. 한국불교의 원류며 불보사찰 통도사의 창건주, 그 창건주인 자장율사가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수행하던 곳이 이곳인데 어찌 전설하나 없겠습니까. 1400년 전부터 자장암 법당 뒤 절벽에서 살고 있다는 개구리에 대한 전설을 더듬으며 발길을 옮겨봅니다.

 
▲ 범어로 된 진언은 물론 조성일과 화주 명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글씨도 암각 되어 있습니다.
ⓒ2006 임윤수
통도사를 세우기 전, 영취산에 들어와 이곳 석벽 아래 움집을 짓고 수도하던 자장율사는 그날도 공양미를 씻으러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암벽아래 옹달샘엘 갔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뜨려던 스님은 샘 안에 있는 개구리를 발견하고 개구리 한 쌍을 건져 근처 숲 속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샘엘 가니 그 두 마리 개구리가 다시 그곳에 와 있기에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에도 우물에는 그 개구리들은 또 와 있었습니다. 율사는 범상치 않은 개구리라 생각되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느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었습니다.

이에 자장율사는 불연(佛緣)이 있는 개구리임을 알고 더 이상 어쩌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엄동설한이 다가왔음에도 개구리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고 늘 샘물 속에서만 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자칫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율사는 이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율사는 절 뒤에 있는 암벽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 주며 "언제까지나 죽지 말고 영원토록 이곳에 살면서 자장암을 지켜다오"하며 수기를 하였답니다. 그리고 이 개구리를 '금와(金蛙)'라고 불렀답니다. 그 후로 통도사가 창건되니 통도사 스님들은 이 개구리를 금와보살이라 불렀고 바위를 뚫어 만들어 준 개구리 집을 금와석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경봉스님이나 태응스님 등이 이 금개구리를 보거나 현몽함으로 서원하던 일들이 원만히 성취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답니다. 그런가하면 의심 많은 어떤 관리도 금개구리의 신통력을 시험하고 크게 깨우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의심 많은 한 관리가 금개구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자장암을 찾아와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신통력을 시험하겠다고 다짜고짜 금개구리를 함 속에 넣었답니다.

함을 들고 산문으로 나온 관리는 개구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밀폐하였던 뚜껑을 여니, 분명히 잡아넣었던 개구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눈으로 금개구리의 신통력이 사실임을 확인 한 그 관리는 혼비백산해 자장암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개과천선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 맑은 물을 한바가지 가득 퍼 마시며 목젖에서 나는 벌컥거리는 소리를 금개구리의 울음소리로 착각하며 행복해 했습니다.
ⓒ2006 임윤수
신심이 돈독하고 혜안을 가졌다면 자장암 금와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으련만 필자의 어둔 마음엔 그냥 전설로만 들릴 뿐입니다. 햇살이 저만치 남았는데 저녁 예불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범종소리가 산천을 휘감고 또르락 거리는 목탁소리가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중얼중얼 거리며 산길을 걷다보니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눈으론 보지 못했으나 가슴은 그 금개구리를 보았는지 개구리의 뜀박질처럼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한 겨울 얼음 아래서도 개굴 거렸을지 모를 그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이렇듯 심장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불신은 있었으나 불신을 보지 못하는 필자인의 가슴에도 마애불 불보살이 걸친 그 장삼자락의 부드러움이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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