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 대학 입학을 위한 국가고시를 치던 날의 일이다. 그때의 국가고시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능시험에 해당된다. 나는 이른
아침을 먹고 시험장으로 나서며 어머니께 “도시락을 주세요.”라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도시락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를 않아 “어머니 다른 날도 아니고 대학입학 시험이 있는 날인데 도시락이 없으면 어쩌나요? 시험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지는데요?”하고 여쭈었더니 어머니께서는 표정도 바꾸지 않으신 채로 말씀하셨다.
“너도 남자가 돼서 점심 한끼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려무나. 너 말따나 다른 날도 아니고 입학시험 치는 날인데도 도시락조차 챙겨주지 못하는 이 에미 맘이 어떠하겠냐? 그러니 도시락 애길랑
그만 해라.”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풀 죽은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떠났다. 오전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는 점심시간이 되자 다른 수험생들은 어머니나 누나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시험장인 경북고등학교의 교정에 뿔뿔이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학교 교정에 있는 포플러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마련하고는 넓은 운동장을 한바퀴 돌며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체면불구하고 끼어들어 식사를 하였다. 그렇게 서너 가정을 돌고나니 내가 도시락을 가져 간 것보다 더 잘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점심시간 다음 시간이 수학 과목이었는데 너무 잘 먹었던 탓에 식곤증이 나서 졸음이 쏟아지는 통에 시험 치르기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험을 치렀지만 나중에 성적이 나온 내용은 점심밥을 얻어먹은 내가 친구들 중에서 성적이 제일로 높게 나왔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런 자녀교육 방법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가난에 져버리지 않고,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체질을 어머니께서 길러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어머니들은 자식을 과보호하기에 그 자녀들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담력이나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