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國際.經濟 關係

반(反)부자 정서

鶴山 徐 仁 2006. 2. 23. 19:58
포브스 > 커버스토리
부자의 기부가 사회통합 촉매
아낌없이 준 기업가들
미국은 부자에 대해 가장 너그러운 나라다. 그런 미국에서도 한때 ‘반(反)부자 정서’가 심각했다. 대중은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겼다. 사회갈등을 푼 것은 부자들이었다. 이들은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돌려주고 세상을 떴다.
악덕 자본가의 대명사였던 록펠러도 끊임愎?기부활동으로 오명을 씻어냈다. 국내에서도 요즘 기부와 사회공헌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부자로 사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가 남긴 말이다. 그는 “백만장자가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면 그의 죽음을 탄식하고 추모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카네기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내놓았다. 미국 정부가 백만장자들에게 거액의 재산세를 매겨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비록 두 세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카네기의 말과 행동은 미국 자본주의를 건설하고 지속시켜 온 이 나라 부자들의 인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부의 불균형 해소를 위해 사회체제를 변혁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부의 불균형이 낳은 여러 문제점은 부자들이 나서서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그래서 번 돈을 사회에 되돌려 주는 것을 당연한 책임이라 여기고 실천한다.

이런 부자들의 생각은 빠른 경제발전의 부작용으로 극심한 부의 편중 및 양극화 문제를 겪었던 미국이 지금처럼 안정된 강대국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이 지금까지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라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가장 많은 사람이 가서 살고 싶어하는 희망의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런 자선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세계에서 부자에게 가장 너그러운 나라라고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한때 ‘반부자 정서’ 내지는 ‘반기업 정서’가 심각했다. 노동운동이 득세하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변혁을 부르짖는 정치세력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던 때였다. 19세기 말부터 대공황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가 그랬다. 당시 미국에서는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신흥 부자들이 출현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대기업들은 인수·합병으로 점점 덩치를 키워갔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때 미국은 절망의 사회였다. 양극화의 문제점이 성토됐고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카네기를 비롯한 백만장자들의 노력이 절망의 목소리를 희망으로 서서히 바꿨다. 뉴욕타임스는 2005년 의미 있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세기 초반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미국 사회가 점점 희망이 넘치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는 결과였다. 이 신문은 미국인들에게 “당신은 이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서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83년 50%였던 ‘Yes’의 비중은 점점 올라가 2005년 80%를 돌파하기에 이른다. 한 세기 동안 수많은 깨어 있는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사회에 되돌리면서 절망하는 사람들을 다독인 결과다.

카네기의 경우 죽을 때까지 자선사업에 당시 돈으로 5억 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가족에게는 1,500만 달러만 남겨줬다. 카네기는 스스로 가난한 삶의 절망을 몸서리치도록 겪은 사람이다. 스코틀랜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이 싫어서 미국으로 이민해 아홉 살 때부터 돈벌이를 시작했다. 결국 철강회사를 세우고 당대 최고 부자가 됐지만 66세 때 회사를 매각해 버리고는 그 돈으로 자선사업에 나선다. 그는 모은 돈의 90% 이상을 은퇴 후 20년간 자선사업에 사용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카네기의 자선사업은 도서관 보급운동으로 유명하다. 그는 카네기 인스티튜트(Carnegie Institute)란 공립도서관을 미국에 2,500개나 세워 무상 기증했다. 미술관·박물관·음악홀 등도 수없이 지어 기증했다. 대신 기증할 때는 반드시 해당 지역사회가 그 내용을 채우도록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카네기는 건물만 지어 주고 지역사회가 책이나 미술작품을 공급하도록 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교육진보를 위한 카네기재단’은 당시 전문직 가운데 가장 낮은 처우를 받던 교사들에게 연금을 제공해 미국 공교육의 질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이 재단은 비정부기구(NGO) 종사자들에게까지 수혜의 폭을 넓혔다.

카네기와 동시대 기업가인 ‘석유왕’ 존 록펠러(1839~1937) 역시 카네기 못지않은 자선사업가였다. 록펠러는 1913년 록펠러재단을 설립하면서 대규모 기부를 본격화했다. 그의 후손들도 록펠러 브러더스펀드·록펠러 패밀리펀드 등을 만들어 자선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록펠러는 당시 굉장한 지탄을 받던 기업가였다. 그가 세운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은 대형화로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을 이루면서 미국 경제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후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무너뜨리며 독점화한 기업이라고 비판되기도 했다. 결국 이 회사는 1911년 반독점법 위반이라는 법원의 명령으로 해체되고 만다.

이런 분위기 탓에 록펠러의 자선활동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선활동에 돈을 내놓을 때마다, 조세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거나, ‘오염된 돈'·'유다의 키스’란 비난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 속에서도 록渶??묵묵히 자선활동을 이어갔다. 1910년 록펠러메디컬연구소(현재 록펠러대)를 창설해 세계 의학연구에 큰 도움을 줬고, 일반교육위원회·록펠러재단, 그리고 부인 이름을 따서 만든 로라 스펠먼 록펠러기념재단 등을 세웠다. 수많은 자선활동에 당시 돈으로 총 50억 달러 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된다. 록펠러의 자선사업은 장남 록펠러 2세로 이어졌고 꾸준한 자선활동은 결국 록펠러 가문을 스탠더드오일의 오명에서 벗어나 명가로 발돋움시켰다.

현대로 넘어와서도 부자들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은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가난한 이들의 보건’이라는 테마로 왕성한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다. 빌 게이츠는 93년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어린이들이 기본적 의약품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데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평생을 시민운동에 바친 아버지 빌 게이츠 시니어의 권유도 있던 터라 게이츠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빈곤국의 보건문제 해결에 나서기 시작했다.

99년 게이츠재단에서는 7억5,000만 달러 규모의 백신기금 계획을 내놓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가난한 나라 의약품 지원 사업을 벌인다. 이 부부는 재단에 240억 달러를 과감히 출연했다. 당시 보유하던 자산 460억 달러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사업가답게 기금을 받는 나라 또는 단체에도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한다. 돈을 돌려 달라는 게 아니라 게이츠재단에서 돈을 받으면 스스로 매칭펀드 형식으로 해당 국가 보건 분야에 투자하도록 계약을 맺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이웃을 돕는 데서 멈추지 않고 스스로 가진 자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키웠다.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은 첫 임기 때부터 상속세 폐지를 추진했다. 이 상속세 폐지 방침에 반대한 목소리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사회단체가 ‘책임 있는 부자들(Responsible Wealth)’이었다. 이 단체는 “상속세 폐지는 부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잘못된 방침”이라고 비판하면서 상속세 존속을 주장했다.



▶(위)빌 게이츠, (아래)위런 버핏

그런데 이 단체의 대표적 회원들이 바로 조지 소로스·빌 게이츠·위런 버핏 같은 이 시대 최고 부자들이다. 재산이 300만 달러 이하면 아예 가입 자격도 없다. 백만장자들이 모여 “우리에게 혜택을 주지 말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들은 부시 정부 아래에서 부자들에 대한 세금이 너무 많이 깎였다면서 세금 차액을 계산해 그 액수를 기부 형태로 사회에 환원하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워런 버핏의 설명이 걸작이다. “상속세를 폐지하는 것은…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장남들을 뽑아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1%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기부가 먼 나라 이야기이던 시절에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1895~1971)씨는 척박한 황야의 한 송이 장미처럼 돋보였다. 한평생을 유한양행에 바쳤고, 기업활동 중에도 장학사업에 관심을 보인 그는 54년에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세웠다. 63년에 연세대에 연구기금으로 1만2,000주, 보건장학회에 5,000주를 기증한 후 64년에 유한공고를 설립했다. 2년 뒤에는 유한중학교를 추가 설립했다. 그가 죽기 전 이미 유한양행 주식의 40% 이상이 교육기관에 기증됐고, 71년 사후 유언장 공개를 통해 나머지 주식을 포함해 전 재산을 공익재단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재 유한재단)’에 내놓았다. 이 기금은 현재 유한학원과 유한재단으로 나뉘어져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의 딸 유재라 씨도 유일한 씨의 뜻을 이었다. 유재라 씨는 91년 63세로 타계하면서 시가 45억원 상당의 유한양행 주식 2만5,000주와 시가 160억원의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집터 1,800평 등 모두 205억원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재라 씨의 유언장은 20년 전에 타계한 부친의 것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다.

요즘 한국에서도 기부와 사회공헌 활동이 점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기업 자신보다는 주변에서 더 목소리를 높이던 사회책임경영은 드디어 기업 의사결정권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사회공헌 활동은 웬만한 한국 대기업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경영의 핵심 의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는 기업도 많고 논의도 많다. 양극화 해소가 시대의 화두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는 해결해야 할 논란이 많다. 일단 기업의 의도가 정말로 순수한지에 대한 의문에 끊임없이 대답해야 한다. 100% 투명한 기업이 아니라면 다른 불법행위를 감추기 위한 이미지 관리용 기부행위가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지나친 자선 활동으로 기업의 주인인 주주 이익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해외 경쟁력이 약해져 영리기업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에도 계속 대답해야 한다.

사실 훨씬 순수하고 논란거리도 적어 실행도 쉬운 자선은 개인의 기부다. 부자들이 주머니를 열어 가진 것을 내놓을 때는 이사회도 주총도 언론 반응도 다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반기업 정서’란 말이 유행이다. 기업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커서 기업인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게 걱정된다는 이야기일 게다. 그러나 전경련의 2005년 조사를 보면 ‘반기업’ 정서는 사실 ‘반기업인’ 정서이고 ‘반부자’ 정서다. 기업에 호감이 간다는 국민은 63%인 반면 부자에 호감이 간다는 국민은 38%에 불과하다. 이 정서는 사실 근거가 충분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3년 기부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4조9,632억원을 모아 미국·캐나다·일본·중국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개인 기부 비중은 20%에 그친다. 전체 회원국 평균은 69.5%인데 말이다. 부유한 개인의 기부가 현저히 적은 것이다.

부자에 대한 반감이 국가경제에 대한 기업의 기여를 강조하고 교과서를 고친다고 고쳐질 리가 없다. 정부의 시스템을 비판하고 기업의 사회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각자 사회적 책임도 한 번쯤 되짚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를 빼놓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건 당당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해결책도 아니라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재산세를 더 올리지 않으면 차액을 기부해 버리겠다”는 부자들의 아름다운 협박(?)을 한국에서도 보게 될 날이 올까.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