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科學. 硏究分野

디지로그<디지털 + 아날로그> 시대가 온다

鶴山 徐 仁 2005. 12. 31. 17:41

 

이어령 본사 고문, 후기 정보화 사회를 논하다 ①
 
 
 
우리 함께 '디지로그' 세계를 향해…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대학생이 된 천재소년 송유근(9·왼쪽)군이 휴보로봇과 손잡고 아인슈타인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서울과학관의 시간터널을 지나고 있다. 전시회는 2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신인섭 기자
그래픽=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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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로 절대 채울 수 없는 것은 설날의 떡국 맛이다. 컴퓨터가 천 번 만 번 까무러쳐도 안 되는 것이 미각의 씹는 맛이다.'겨울 연가'의 영상미로 물꼬를 튼 한류에 '대장금'의 음식문화가 결정타를 '먹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같은 동양문화권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첨(添)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도루(取)한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이 먹는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는 3000종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하는 민족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환자에게 "나이만 먹지 말고 다 먹어라"고 했다는 어느 의사의 이야기는 한국인만이 웃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다.

시간을 상징하는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버린다. 하지만 한국인은 매년 설이 되면 자식까지 삼켜버린다는 그 무시무시한 크로노스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마음도 먹는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한국인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돈도 떼어먹고 욕도 얻어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전 세계가 한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 축구경기에서도 우리 '붉은 악마'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모든 층위에서 먹는다는 말은 유효하다. 심리적으로는 겁을 먹고 애를 먹는다. 소통 행위에서는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고 하고 경제 면에서는 경비를 먹거나 먹혔다고 한다. 심지어 성애의 차원에서는 따먹었다는 말까지 등장한다.

어찌 그것이 자랑일 수 있겠는가. 먹는다는 말이 이처럼 다원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네그로폰테처럼 "빙 디지털!" "이제는 디지털이다"라고 외치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히 먹는 걱정을 하던 시대는 갔다. 지금은 대통령도 인터넷 댓글로 정치를 하는 희한한 정보시대가 아닌가.

오늘 아침에도 누리꾼들은 밥상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새해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MP3의 디지털 음악으로 해피 뉴 이어의 노래를 듣고 신데렐라 마차 같은 팬시한 연하장을 e-메일로 받았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화상 채팅으로 얼굴을 맞대고 실시간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가상현실(VR)의 삼차원 공간에서는 센서 글러브를 끼고 보조장치만 갖추면 실제 현실 그대로 보고 듣고 만지기도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냄새까지 맡는 향기통신의 웹 사이트도 생겼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설날의 떡국 맛이다. 모든 감각을 모두 디지털화해 보낼 수 있지만 컴퓨터가 천 번 만 번 까무러쳐도 안 되는 것이 미각의 씹는 맛이다.

그러기에 애플 컴퓨터의 로고는 입으로 반쯤 저며 먹은 모양을 하고 있고 실리콘 밸리의 마돈나 킴 폴리제는 인터넷 쌍방향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그 이름을 커피 브랜드인 '자바'에서 따다 붙였다. PC방을 인터넷 카페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두가 먹을 수 없는 디지털 미디어에 미각 이미지를 보완하려는 고육지책의 산물이다.

정보사회에서 '미각'은 디지털화할 수 없는 최후의 아날로그적 감각과 그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물적이나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아왔던 식 문제를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정보 미디어로서 평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먹는 음식을 예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으로 생각해 왔던 한국인에게는 선식(仙食)의 경우처럼 신선(神仙)의 종교적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겨울 연가'의 영상미로 물꼬를 튼 한류에 '대장금'의 음식문화가 결정타를 '먹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의식동원의 전통이 한류 문화를 타고 문식동원(文食同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이 문화라는 것은 사과를 놓고 보면 안다. 근대 민주주의는 윌리엄 텔의 사과에서 나왔다고 하고, 근대의 과학은 뉴턴의 사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리고 트로이의 전쟁을 일으킨 아프로디테의 사과가 전쟁사의 시작이라면 스티브 잡스의 애플 컴퓨터의 사과는 PC 역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먹는 미각의 사과는 아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만으로는 사과와 나의 거리를 메울 수 없다. 오직 그것을 입에 넣고 씹는 순간에만 사과는 비로소 미각을 통해 통째로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와 사과는 한 몸이 된다. 미각의 힘, 씹는 그 힘은 밖에 존재하는 타자를 나와 하나가 되게 하는 유일한 융합의 힘이다. 동시에 그 대상을 파괴해야만 먹을 수 있는 공격성과 비극성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 먹은 순간에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인간의 외로운 역사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최후의 만찬은 먹는다는 것이 단순한 배부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수많은 말씀과 이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어째서 마지막 메시지를 '먹는 것'으로 끝마무리했는가. 왜 그 흔한 한 조각의 빵을 자신의 육체라 하고 그 값싼 한 방울의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했는가. 십자가는 혼자 지고 가도 식사만은 홀로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냄새 맡던 그 메시지(정보)를 어금니로 깨물어 삼키는 법을 깨닫게 된다. 빵이 되고 술이 된 예수는 단절됐던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미디어로서 존재한다.

먹는 것의 일체감, 그리고 그 융합의 원리는 오늘날 '회사'를 의미하는 컴퍼니(company)란 말에서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컴'은 '함께'(共), '퍼니'는 '빵'이라는 뜻이다. 어원대로 하자면 컴퍼니는 일터이기에 앞서 함께 빵을 먹는 식탁이다. 운동권에서 잘 쓰는 캠페인이란 말과 혁명가들이 애용하는 컴패니언(동지)이란 말 모두는 같은 뜻을 지닌 파생어다. 그렇다. 우리는 벌써 그런 공동체 의식을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말로 절묘하게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식(食)문화의 공동체가 사이버 문화의 디지털 공동체로 급속히 변해가는 것이 오늘의 정보사회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날로그 인간형과 디지털 인간형으로 분리되고, 그 생활은 비트와 아톰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양극화해 간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 이미 시인 T S 엘리엇은 정보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 불렀다.

"생활(living)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삶(life)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wisdom)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knowledge)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informaiton)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 '바위'에 의하면 인간의 문명은 생명의 삶으로부터 끝없는 상실의 단계를 거쳐 오늘의 정보시대로 추락해 온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당연히 오늘의 디지털 세대들은 정보 속에서 생생한 삶과 지혜, 그리고 지식을 씹을 수 있는 어금니를 잃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유가 아니라 디지털 세대들은 실제로 씹는 습관을 잃어가고 있다. 2000년 전 인간의 식사시간은 51분이고 씹는 횟수는 3990회로 추정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 초등학교 급식 조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씹는 횟수는 700~500회로 7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음식만이 아니다. 정보시대의 아이들은 클릭 하나로 삶의 문제들을 씹지 않고 삼켜버린다.

디지털 혁명의 장밋빛이 조금씩 먹구름과 거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양극화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틈새에 다리를 놓아주는 누군가의 힘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새해가 되면 떡국과 함께 나이(시간)도 마음도 새로 먹는다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디지털의 공허한 가상현실을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 있는 어금니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이버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파워가 2006년 희망의 키워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디지로그의 뉴 파워가 무엇인지 성급하게 묻지 말고 이번만은 차분히 함께 검증해 보지 않겠는가. 줄기세포처럼 정말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런 원천기술을 보유하고나 있는 것인지 더 이상 기대가 실망이 되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그야말로 큰 마음 먹고 시작해야 한다.

이어령 본사고문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5.12.31 04:50 입력 / 2005.12.31 07:26 수정

 

 

 

[디지로그시대가온다] ② 시루떡 돌리기의 정보원리

"이게 웬 떡이야"시루떡 돌리기는
언제나 놀라움과 궁금증을 동반한다
시루떡 공동체의 행복했던 기억을 어떻게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액정판에 담느냐가 과제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한국인들은 시루떡을 돌리는 방법으로 온 동네에 정보를 알렸다. 디지털 정보는 컴퓨터 칩을 타고 오지만 시루떡 아날로그 정보는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을 타고 온다. 그래서 그것은 화려한 106화음이나 음침한 진동음으로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와는 다른 정취가 있다. 먼 데서 짖던 동네 개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사립문 여는 소리로 바뀌면 시루떡에 실려 온 정보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으레 "이게 웬 떡이냐" 고 외친다. 시루떡 정보 발신은 언제나 이렇게 놀라움과 궁금증을 동반한다. 떡 자체가 벌써 밥의 일상성에서 벗어난 음식이기 때문이다. 돌떡이든 고사떡이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일탈성과 의외성은 정보의 전달력과 호소력을 몇 배나 더 강력하게 한다.

그렇다. 누가 컴퓨터 앞에서 "이게 웬 e-메일이야"라고 외치겠는가. 우리를 짜증스럽게 하는 스팸(쓰레기) 메일처럼 놀라움과 충격이 없는 정보는 이미 죽은 정보다. 그래서 의외성과 궁금증이야말로 시루떡 정보 원리의 첫 단추다.

"웬 떡이냐"라는 말은 의문형 감탄사다. 당연히 "돌떡이다" "고사떡이다"라는 대답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돌떡을 먹는 사람은 "아니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어!"라고 말하고 고사떡을 먹을 때에는 "누가 편찮으신가"라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이렇게 시루떡 정보는 독자적으로 증식되고 증폭되어 교감의 밀도와 참여도를 높여준다.

또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을 수 있는 시루떡 정보는 디지털 미디어로는 불가능한 촉각과 미각을 이용한 것이다. 먹는 미각소(味覺素)와 말하는 정보소(情報素)가 하나로 결합된 떡 돌림의 둘째 단추는 정보의 참여성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의식이며 셋째 단추는 시청각 중심의 현대 미디어가 할 수 없는 후각.촉각.미각을 통합한 어금니 미디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터넷처럼 분산형으로 되어 있다. 동네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방법이 아니라 한 집 한 집 떡을 돌려 각자가 제자리에서 정보를 수용하게 한다. 그리고 돌떡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빈 그릇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으니 정보의 쌍방향성까지 겸하고 있다. 분산성과 상호 의존성이 시루떡 정보의 넷째 단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情)이라는 정보 원리다. 정보란 말 속에는 이미 정이란 말이 들어 있다. 맥루한의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는 또 다른 개념으로서 모든 정보에는 온도가 있다. 가령 같은 정보라도 동네방네 우리 애가 돌이 되었다고 떠들고 다니면 오히려 빈축을 산다.

하지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있는 시루떡에 정의 온도를 실어 보내면 동네 전체로 퍼진다. 그것이 정보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지막 단추 '정의 원리'다.

썰렁하고 살벌한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종이에 쓴 편지 글과 액정 모니터에 찍힌 e-메일은 커다란 온도 차를 보인다. 음악도 그래픽도 디지털 정보는 차갑다는 데 그 장벽이 있다. 개 짖는 소리도 잠잠해지면 시루떡에 실려 온 작고 반짝이는 정보들은 초가지붕에 내리는 눈처럼 온 동네를 하얗게 덮는다.

이 아날로그 공동체의 행복했던 기억을 어떻게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미디어의 액정판에 실리느냐 하는 것이 디지로그 시대의 중요 과제다. 시루떡 돌리기의 다섯째 단추! 그것을 오늘의 정보 미디어에 다는 전략에 성공하면 정치.경제.사회와 그 공동체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정(情), 그것이 진짜 젓가락 기술'입니다
  2006.01.01 19:43 입력 / 2006.01.01 20:03 수정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3. 젓가락 기술의 바탕은 정

후기 정보화사회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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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읽으면 정(情)을 알리는 것이 정보(情報)다. 하지만 영어의 인포메이션이나 중국어의 신식(信息)에는 정이라는 뜻이 없다. 정보기술(IT) 역시 정과는 먼 전쟁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은 탄도(彈道) 계산을 하려고 미군 발주로 만든 것이고, 초기의 인터넷 아파넷(Arpanet)은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분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미국의 군사용 네트워크였다.

'정보'란 말도 실은 적정보고(敵情報告)를 줄인 말이다. 개화기의 일본인들이 프랑스의 보병훈련교본을 번역할 때 만든 말로 젓가락 기술의 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또 그 젓가락 기술이냐고 진저리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젓가락 기술을 콩을 집어 먹는 손재주로 안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다. 젓가락이 IT.BT(생명공학)시대에서 평가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서 생긴 정(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백 가지 천 가지 이유에 앞서 젓가락은 모든 음식을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리를 만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비프스테이크처럼 덩어리째 음식을 놓았다면 우린들 별수 있었겠는가. 양식의 경우처럼 부엌에 있는 도마와 식칼이 각자의 테이블 위로 나앉아야 할 것이다. 한입에 들어가도록 음식물을 잘게 저며 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정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은 기계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헤아리는 '관계의 기술'(RT)을 낳는다.

"한국인은 한 손으로 먹고 양인(洋人)은 양손으로 먹는다"는 농담이 있듯이 서양 사람들은 포크.나이프로 식사를 한다. 음식을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창이요, 칼이다. 실제로 9.11테러 사건 이후 포크.나이프는 항공여객의 휴대품 금지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술좌석의 젓가락 장단에서 보듯이 젓가락은 신나는 악기가 된다.

활에서 하프가 생겨난 것처럼 나폴레옹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개발한 통조림은 오늘날 수퍼마켓의 일상 식품이 되었고, 군사용으로 닦은 길은 자동차 경주용 트랙으로 변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악기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기술문명의 방향이요, 희망이다. 빌 게이츠가 나폴레옹과 닮은꼴이라는 BBC방송의 분석처럼 전쟁기술이 낳은 IT는 아직도 비정하고 공격적인 피비린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정(無情)을 유정(有情)으로, IT(정보기술)를 RT(관계기술)로, 디지털을 디지로그로 문명의 그 큰 흐름을 바꿔놓는 새 물결이 지금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2006.01.02 19:40 입력 / 2006.01.02 19:44 수정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3. 젓가락 기술의 바탕은 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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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읽으면 정(情)을 알리는 것이 정보(情報)다. 하지만 영어의 인포메이션이나 중국어의 신식(信息)에는 정이라는 뜻이 없다. 정보기술(IT) 역시 정과는 먼 전쟁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은 탄도(彈道) 계산을 하려고 미군 발주로 만든 것이고, 초기의 인터넷 아파넷(Arpanet)은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분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미국의 군사용 네트워크였다.

'정보'란 말도 실은 적정보고(敵情報告)를 줄인 말이다. 개화기의 일본인들이 프랑스의 보병훈련교본을 번역할 때 만든 말로 젓가락 기술의 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또 그 젓가락 기술이냐고 진저리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젓가락 기술을 콩을 집어 먹는 손재주로 안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다. 젓가락이 IT.BT(생명공학)시대에서 평가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서 생긴 정(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백 가지 천 가지 이유에 앞서 젓가락은 모든 음식을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리를 만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비프스테이크처럼 덩어리째 음식을 놓았다면 우린들 별수 있었겠는가. 양식의 경우처럼 부엌에 있는 도마와 식칼이 각자의 테이블 위로 나앉아야 할 것이다. 한입에 들어가도록 음식물을 잘게 저며 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정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은 기계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헤아리는 '관계기술'(Relation Technology)을 낳는다.

"한국인은 한 손으로 먹고 양인(洋人)은 양손으로 먹는다"는 농담이 있듯이 서양 사람들은 포크.나이프로 식사를 한다. 음식을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창이요, 칼이다. 실제로 9.11테러 사건 이후 포크.나이프는 항공여객의 휴대품 금지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술좌석의 젓가락 장단에서 보듯이 젓가락은 신나는 악기가 된다.

활에서 하프가 생겨난 것처럼 나폴레옹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개발한 통조림은 오늘날 수퍼마켓의 일상 식품이 되었고, 군사용으로 닦은 길은 자동차 경주용 트랙으로 변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악기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기술문명의 방향이요, 희망이다. 빌 게이츠가 나폴레옹과 닮은꼴이라는 BBC방송의 분석처럼 전쟁기술이 낳은 IT는 아직도 비정하고 공격적인 피비린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정(無情)을 유정(有情)으로, IT(정보기술)를 RT(관계기술)로, 디지털을 디지로그로 문명의 그 큰 흐름을 바꿔놓는 새 물결이 지금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02 19:40 입력 / 2006.01.03 14:12 수정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4. 인터넷 속 세 왕자와의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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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시대의 새 물결이라고 하면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제4의 물결쯤으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물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문명을 제1이니 제2니 하는 순서로 분절하는 방법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인 디지털적 발상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디지로그 시대란 스핑크스의 난문(難問)보다도 어려운 문제를 풀 때만이 도달할 수 있다. 그 수수께끼는 먼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하러 가던 세 왕자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보물 자랑을 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중 왕자 한명이 천리안의 거울을 보여주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공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천리마를 자랑하던 왕자는 천리 밖 공주의 성으로 단숨에 달려가게 되고 불사약을 비장했던 왕자는 그 약초를 먹여 극적으로 공주를 살려낸다.

문제는 이 공주가 누구와 결혼을 해야 되느냐 하는 수수께끼다. 정보 마인드를 지닌 네티즌들은 당연히 천리안의 왕자를 내세울 것이고 폭주족처럼 질주하는 산업주의자들은 천리마의 왕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웰빙족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의 정신으로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 편을 들 것이다. 하지만 세 보물의 수퍼 파워는 서로 연동해 작용했기 때문에 어느 왕자 하나만을 골라서는 절대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 어차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강박관념 밑에서 살아온 서양 쪽에서는 해답을 구하기 힘들므로 동양 쪽 고전을 찾아보면 어떨까. 뜻밖에도 '천평어람(天平御覽)'의 고사에서 충격적인 해답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제(齊)나라에 사는 한 처녀가 두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게 되었는데 동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돈은 많으나 얼굴이 밉고, 서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얼굴은 잘났지만 가난해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이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부모의 말에 그 소저는 선뜻 두 곳으로 다 가겠다고 대답을 한다. 밥은 부잣집 동쪽 남자에게로 가서 먹고, 잠은 잘생긴 서쪽 남자와 자면 된다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황당했으면 뒤에 떠돌이를 뜻하는 말로 와전돼 내려왔겠는가. 이 동서 병합의 모순논리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해 보면 틀림없이 에러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가식서가숙'의 모순논리는 인터넷 사이버 세상에선 보통 일어나는 일이고 오프라인의 현실에서도 곧잘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아니다. 그것은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현대문명의 출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아날로그적인 것은 악이고 구식이고, 디지털적인 것은 선이고 첨단이라는 양자택일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 비트와 아톰, 클릭 산업과 브릭(brick) 산업,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이 모든 대립은 깨끗하게 금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혼류(混流)하고 융합되고 충돌하면서 병존해간다. 이종 결합의 하이브리드나 원 소스 멀티 유스와 같은 말이 그 단편적인 징후를 보여준다.

해답과 선택은 오직 하나라는 종래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비로소 공주는 세 왕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불사의 약초가 지닌 생명력, 천리마의 산업적 동력, 그리고 천리안의 정보의 힘은 프랑스의 3색기와 같은 평행선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로고였던 3태극마크처럼 둥글게 둥글게 얽혀서 돌아가야 한다. 시루떡 정보가 '탠지블 미디어'로 부상하고 젓가락 정신과 기술이 관계기술(RT)의 원천으로 각광받는 세상이다.

어려운 이야기 할 것 없다. 이 지구상에서 농경-산업-정보 세 문명의 왕자를 동시에 데리고 사는 유일한 공주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한국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엊그제까지 나물 캐던 채집시대에서 초고속 정보시대의 선두에 서 있는 나라, 망신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자랑스럽기도 한 이상한 나라, 붉은 악마가 외치던 대~한민국이다.

이어령 중앙일보사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03 19:29 입력 / 2006.01.04 05:0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