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뵈시우스를 교황청 대사로 파견했습니다. 교황 우르반 8세의 허락을 얻어 교황청 도서관의 전적들을 조사하던 뵈시우스는 어느날 3백20장이나 되는 지리학 원고 뭉치를 읽어나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이 붙은 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앞 문단은 이종호 박사가 쓴 <세계 7대 불가사의(뜨인돌 출판사, 2001)>라는 책의 서론 부분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원전 자료 발견 장면을 소개하는 장면인데, 제가 조금 고쳐 쓴 것입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직역하면 '감히 생각하거나 따져보기가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사물'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어 '원더(Wonder)'를 번역한 말인데, '원더'는 '놀랍다, 경이롭다' 정도의 뜻이지요.
사실 서양어에서도 불가사의의 원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테아마타(theamata)'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원더(Wonder)'보다는 '머스트-씨(Must-see)'가 더 적절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꼭 봐야 할 장관(壯觀)' 정도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불가사의'는 '테아마타' 혹은 '장관'을 좀 과장한 번역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7대 불가사의의 내용을 살펴보면 '불가사의'라는 말은 그다지 지나친 과장이 아닙니다. 그저 놀랍거나 경이로운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 손으로 저런 게 가능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게 많으니까요. 그러니까 '불가사의'라는 말은 잘된 번역어의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뵈시우스가 발견한 그 글의 저자는 비잔틴의 필론(Philon of Byzantine)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살았던 필론은 수학자로 자칭했지만 기계기술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과서에 '세계 7대 불가사의'를 포함시켰는데, 아마도 제자들의 견문을 넓혀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불가사의들은 직접 가서 보는 게 (머스트-씨즈) 가장 좋았겠지만,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간/돈/건강이 누구에게나 허락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필론은 제자들에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면서 간접 교훈을 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필론은 그 책에서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영감을 각자에게 얻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나의 글을 잘 읽고 각자가 자신의 각도에 맞춰 어떤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필론은 또 이어서 "태양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처럼 불가사의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필론이 말한 이 주의사항은 나중에 한국의 불가사의를 살펴볼 때에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필론의 원고에 소개된 세계 불가사의는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그리스 로데스섬의 거상,'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성벽,'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등입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뒷부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능묘' 부분은 떨어져 나가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필론이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계 불가사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역사를 발명했다고 알려진 헤로도투스 (Herodotus, 기원전 484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30 혹은 420년에 죽음)가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바빌론의 성벽과 공중 정원, 그리고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서술한 적이 있습니다.
또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 도서관장이던 키레네의 칼리마쿠스(Callimachus of Cyrene, 305 BC-240 BC)는 <세계 불가사의 모음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제목만 전할 뿐 책 자체는 유실돼 지금까지 전하지 않지만, 그가 세계의 불가사의를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던 사실만은 알 수 있습니다.
헤로도투스 이후 칼리마쿠스 이전까지 세계의 불가사의에 대한 저술과 기록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은 당시 세계 최대라고 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모여 있었겠지요. 그 도서관장이었던 칼리마쿠스가 그 자료들을 참고해서 세계 불가사의 모음집을 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겝니다. 아마도 여러 자료를 모아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겠지요.
모르기는 몰라도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칼리마쿠스가 모아놓은 불가사의들 중에서 일곱 개를 간추려 뽑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일곱 개이었는지는 기록이 따로 없습니다. 7을 하나님의 수로 여겼던 유태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유태인들을 미개인으로 여겼던 그리스인들이 그랬을 리는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인터넷의 여기저기에 (특히 한국어 싸이트에) 보니까, 세계의 불가사의를 7개로 한정한 것은 그 수를 완전수라고 본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이라는 설명이 많더군요. 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말하는 완전수는 자기를 뺀 약수의 합이 자기와 똑같은 수를 말합니다. 이 정의를 따르면 피타고라스의 완전수는 7이 아니라 6입니다. 그리고 완전수는 6 뿐 아니라 28과 496과 8128 등으로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 세계 '7대' 불가사의를 피타고라스 학파 영향으로 보기는 좀 곤란하겠습니다.
일곱(7)이라는 숫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당시 지중해와 중동지역에서는 전통적/종교적으로 일곱이라는 숫자를 다소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국의 일곱문이라든지, 일주일이 칠일로 되어 있다든지, 광활한 바다를 가리킬 때 '칠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바로 그런 예지요. 그런 걸 가지고서 '일곱'이 완전수였다고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추측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관동팔경'이 있었고, 문인들이 '십장생'을 즐겨 그렸다고 해서, 팔(8)이나 십(10)을 완전수라고 보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냥 세계의 불가사의를 꼽다보니까 7개 정도가 됐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하긴, 필론이 지역안배를 좀 한 것 같기는 합니다. 그의 7대 불가사의는 그리스 지역에 한 개(제우스 신상과 로데스 거상), 메소포타미아에 두 개(바빌론 성벽과 공중정원), 소아시아에 두 개(아르테미스 신전과 마우솔로스 능묘), 그리고 이집트에 한 개(피라미드)로 골고루 분포돼 있으니까요.
옆으로 잠시 샜습니다만, 아무튼, 필론이 세계의 불가사의를 7개로 선정하고 각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공학적/미학적 설명을 곁들여 놓은 후, 그 목록에 대해서는 그다지 시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돈의 안티파테르(Antipater of Sidon)는 기원전 150년경에 쓴 시에 보면 필론이 정한 7대 불가사의가 그대로 재현됩니다.
나는 그 위로 전차가 달릴 수 있는 바빌론 성벽을 보았고,
알페우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도 보았다.
공중 정원과 태양의 거상도 보았고
거대한 노동력으로 건설한 높이 솟은 피라미드와
마우솔루스의 웅대한 능묘도 보았다.
그러나 구름위로 솟은 아르테미스의 신전을 보았을 때
경이롭던 다른 장관들은 이내 빛을 잃었고,
나는 노래했다. "태양이 올림푸스를 지날 때를 뺀다면
네(아르테미스 신전) 위를 지날 때만큼 웅장해 보인 적이 없구나."
7대 불가사의를 모두 동등하게 소개했던 필론과는 달리 안티파테르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가장 멋진 장관이라고 극구 칭찬한 점이 눈에 띕니다. 그 점을 제외하면 필론의 목록과 안티파테르의 목록의 차이라면 순서 정도이겠습니다만, 그거야 뭐 그리 큰 문제가 될까요, 뭐.
안티파테르 이후에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해서는 논의가 계속됐던 모양입니다. 필론과 안티파테르가 합의해서 '반드시 봐야 할' 7개의 고대 건축물 장관(壯觀) 목록을 완성한 이후에도 다른 건축물을 추가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7개라는 숫자를 바꾸려는 시도는 없었고, 또 원래의 목록 중에서 6개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논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필론과 안티파테르가 꼽은 '바빌론의 성벽'은 다른 논자들의 목록에서 제외되곤 했는데, 그 대신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의 왕궁(Palace of Cyrus)나 알렉산드리아 파로스의 등대(Lighthouse at Alexandria)를 꼽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 논란은 그다지 오래지 않아 파로스의 등대로 합의를 보면서 잠잠해 졌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전기간을 거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는 필론과 안티파테르의 목록에서 '바빌론의 성벽'이 '파로스의 등대'로 바뀌어 확정됐습니다. 이로서 지역 안배가 좀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즉 이제 그리스 지역에 두 개(제우스 신상과 로데스의 거상), 터어키 지역에 두 개(아르테미스 신전과 마우솔레움 능묘)는 전과 같습니다만, 이젠 이집트 지역은 두 개(기자의 쿠푸 피라미드와 파로스의 등대)로 늘어난 대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한 개(바빌론의 공중정원)만 남게 됐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마에르텐 판 헴스케르크(Maerten van Heemskerck, 1498-1574)는 수정된 7대 불가사의를 차례로 음각 그림으로 새겨 남겼고, 독일 화가 요한 피셔 폰 에를라하(Johann Fischer von Erlach, 1656-1723)는 그의 저서 <건축사>에서 그 7개의 불가사의 건축물을 차례로 설명해 놓았지요. 이것으로 더 이상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목록에 대한 논란은 완전히 일단락 됐습니다.
여기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를 하나하나 소개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글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맨 앞에 인용한 이종호 박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공학/미학의 관점에서 본 좋은 설명서이고, 또 인터넷에는 그 불가사의들을 개별적으로나 종합적으로 소개한 글이 많습니다. 다만 인터넷 글들은 '인용 없이 베끼기'와 '입증되지 않은 상상력,'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짜집기'가 많으므로 자기 '비평력'을 연습하면서 읽으셔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언제 생겨서 언제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따져 봐야겠습니다. 사실 그게 바로 이 글이 겨냥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기원전 600년경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2세가 선린외교를 위해 맞은 왕비를 위해 세웠다는 게 다수설입니다. 소수설로는 기원전 810경 세미라미스여왕이 세웠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나 그리스를 막론하고 어떤 사가도 이 정원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사람이 없어서 그 존재 여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중정원이 건설된 기록이 없으니 파괴된 기록도 당연히 없습니다. 다만 기원전 538년이나 그 직후가 아닐까 하는 게 제 짐작입니다. 그해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대제(Cyrus the Great-성경에는 고레스로 나옴)가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노예로 잡혀있던 민족들을 다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키루스 대제에 의해 파괴되고 해체된 바빌론은 이후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어지는 잦은 전쟁으로 폐허가 돼 버렸습니다. 공중정원도 같은 운명이었겠지요.
<기자의 피라미드>의 기원전 2570년에 완성됐습니다.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 쿠푸(Kufu)건축한 것으로 명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이집트 카이로시 외곽 지역이 기자 지역에 그대로 멀쩡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 규모도 규모려니와, 쿠푸 피라미드의 나이는 무려 4천5백여살입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는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완성됐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위해 특별히 건설된 제우스 신전이 완공된 게 기원전 457년이고 그 이후 시작된 제우스상은 제작에 8년 정도 걸렸다고 하므로 대략 445년경이 가장 이른 연대가 될 것입니다. 1950년대에 이루어진 이 지역 발굴 결과 제우스 신상이 약 기원전 4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우스 신전과 신상은 392년 그리스도인이 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가 올림픽 경기를 이교 행사로 몰아서 폐지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426년에는 신상파괴령으로 제우스 신전이 파괴됐지만 제우스 신상은 이때 위기를 모면한 것 같습니다. 한 부유한 그리스인이 신상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는군요. 그러나 신상은 462년의 대화재 때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로데스 거상>은 테메트리우스의 침공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면서 헬리오스(Helios) 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기록에 보면 당대의 조각가 린두스의 카레스 (Chares of Lyndus)가 12년동안 제작했고, 기원전 282년에 완성돼 만드라키온(Mandrakion) 항구 입구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로도스 거상은 세워진 지 불과 50여년 만인 기원전 225/226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져 버립니다. 이 거상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재건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로데스 주민들은 이를 거절합니다. 거상의 잔해는 그 자리에 방치돼 있었는데, 654년 로데스를 침공한 아라비아군이 그 청동 잔해를 몽땅 긁어 갔다고 합니다. 이때 거상의 청동 잔해를 운반하기 위해 아라비아군은 낙타가 9백마리를 동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로스의 등대>는 기원전 280년 크니두스의 소스트라투스(Sostratus of Cnidus)가 건설했습니다. 높이가 120미터에 달한 이 등대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거울을 설치돼 있어서 낮에는 햇볕을, 밤에는 불빛을 반사시켰다고 합니다. 이 등대가 얼마나 거대하고 유명했는지 그것이 설치된 섬 이름 '파로스'가 등대라는 일반명사가 돼 버렸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어의 파레(phare)와 에스파냐어의 파로(faro)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등대는 지진의 희생물이 됩니다. 1100년과 1307년, 그리고 1323년의 대지진으로 차례로 파손됐습니다. 1480년이면 등대의 폐허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의 술탄이었던 카이트바이(Qaitbay)가 그 잔해로 남은 바위 덩어리 중에서 쓸만한 것을 모아서 인근 성채를 건설하는 데에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리디아의 크로소스왕이 기원전 550년에 건설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첫 번째 신전은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라는 기상천외한 인물에 의해 불타없어집니다.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유일한 희망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신전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그 이후 더 큰 규모로 재건됐는데, 정면 길이가 55미터, 측면 길이가 110미터로 당시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컸습니다. 게다가 그 안에는 각종 예술품과 장신구들이 허다하게 전시돼 있었다는군요. 이 신전은 262년 고트인들의 침공으로 파괴됐고 그 이후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할리카르나수스의 마우솔레움 능묘>은 소아시아 남서부에 있던 카리아(Caria)의 왕 마우솔루스(Mausolus)의 무덤입니다. 마우솔루스의 누이이자 아내였던 아르테미시아(Artemisia)가 기원전 353/351년에 건설했는데, 건축가는 피디우스(Pythius)였고 건물을 장식한 조각가는 당시 그리스의 내노라하는 조각가 4명이 동원됐답니다.
위용을 자랑하던 마우솔레움도 자연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12세기의 대지진으로 무너졌습니다. 13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무덤을 약탈하고 무너진 돌들은 성을 건축하는 데에 썼습니다. 1404년에는 그 능묘의 터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건축연대와 소멸연대를 좀 더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공중정원: BC 600년 (혹은 BC 810년) - BC 538년: 약 60년 (혹은 약 280년) 지속.
피라미드: BC 2570년 - 지금: 약 4천6백년 지속.
제우스상: BC 430년경 - AD 462년: 약 900년 지속.
로데스상: BC 282년 - BC 225/226년: 약 50여년 지속.
파로스 등대: BC 280년 - AD 1323년: 약 1600년 지속.
아르테미스 신전: BC 550년 - AD 262년: 약 800년 지속.
마우솔레움 능묘: BC 353/351년 - 12세기: 약 1400년 지속.
이렇게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수명은 짧게는 5-60년, 길면 1천5백년 정도입니다. 유일한 예외가 아직도 늠름하게 서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뿐이지요. 피라미드의 나이는 4천6백살이 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됩니다. 요즘처럼 고대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아마도 피라미드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은 바로 이점을 보이려고 시작한 글입니다. 그 규모도 규모려니와 천재와 인재를 극복하고 시간과 경주하고 있는 피라미드야 말로 세계의 불가사의 중에서도 불가사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랍인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사람은 시간을 두려워하고,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 글은 서론이 너무 길고 본론이 짧고 결론은 한 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엄청나고 지속적인' 피라미드를 중국인들이 뭐라고 불렀는지, 그리고 그걸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채용했는지를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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