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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탑과 타워 (12): 피라미드가 왜 탑(塔)일까?

鶴山 徐 仁 2005. 12. 26. 18:16

 


중국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찐쯔타, 즉 금자탑(金字塔)이라고 번역한 것은 금(金)으로 도금을 했거나 돈(金)을 처발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피라미드의 모양이 한자의 '찐(金)', 그러니까 '쇠 금(金)자'처럼 생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외국어를 번역할 때 소리를 빌어오거나 뜻을 빌어오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지만, '찐쯔타'만큼은 뜻이나 소리가 아니라 모양을 묘사한 좀 독특한 번역어입니다.

 

그런데, 금자탑이 탑(塔)일까요?  질문이 좀 우습기는 합니다.  이름을 '금자탑'이라고 붙였으니까 탑(塔)은 분명 탑이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피라미드가 '탑(塔)'이라는 걸까요?  한 변의 길이가 230미터나 되고 높이가 146미터나 되는 거대하고 육중한 피라미드가 어째서 높이가 불과 12미터에 불과한 빼쪽한 원각사 10층 석탑과 똑같이 탑(塔)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일까요?

 


피라미드 
쿠푸 대피라미드, 일명 금자탑(塔)
이집트 기자 지구 소재

원각사석탑 
원각사 10층 석탑(塔)
한국 서울 파고다 공원 소재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한국의 원각사 석탑이 나란히 탑(塔)이라고 불리게 된 공통점이 뭘까요?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는 점을 뺀다면 두 탑 사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심지어 사용한 돌마저 다릅니다.  피라미드는 화강암, 원각사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한국 석탑은 화강암인데, 원각사 탑만큼은 유별나게도 대리석입니다.)

 

아프리카의 피라미드와 한반도의 원각사 석탑이 모두 탑(塔)이라고 불리게 된 까닭을 찾으려면 약간의 조사가 필요합니다.  우선 아프리카와 한반도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인도에서 시작해 봅시다.

 

탑(塔)은 한자어 탑파(塔婆)의 줄임 말인데, 탑파는 인도의 팔리어 '튀파(thupa)'를 한자로 음역한 말입니다.  '튀파'는 원래 '무덤/사당'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였는데, 뒤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무덤/사당'이라는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a)를 한자로 음역한 솔도파(率堵婆)도 탑파와 같은 뜻입니다.  솔도파의 중국말 발음은 슈와이다포(shuai-da-po) 정도가 되겠는데, 이게 그나마 스투파에 가장 가까운 발음이겠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탑을 '다가바(Dagaba)' 혹은 '다고바(Dagoba)'라고 부르는데 이는 싱할라(Sinhala)어로 '다투 가르바' 즉 '사리 봉안 장소'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한편, 미얀마에서는 탑을 '파고다'라고 부르는데, 이는 '빠야(Paya)'라는 미얀마말과 '다고바(Dagoba)'라는 싱할라어의 합성어이며, 요즘 서양어 파고다(pagoda)의 어원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탑과 파고다는 모두 불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셔둔 건축물'이라는 뜻이지요.

 

석가모니께서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보리수 아래서 입멸한 후 제자들은 유해를 화장했는데 사리가 8말 4되쯤 나왔다고 합니다.  이걸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합니다.  '진짜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사리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몸을 화장해서 나온 사리치고는 상당히 많은 분량이지만, 워낙 불법이 높으셨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 여덟 말 넉 되의 진신사리를 둘러싸고 당시 인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랐던 여덟 나라의 왕들이 그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때 도로나(徒盧那)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중재에 나서, 사리를 여덟 등분해 나눠 갖도록 주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사에 나오는 사리팔분(舍利八分) 혹은 분사리(分舍利)입니다.

 

사리를 할당받은 여덟 나라는 각기 건축물을 세우고 거기에 사리를 봉안했는데, 이게 바로 탑파의 기원입니다.  그와 함께 중재자 도로나는 여덟나라에 사리를 나눠주고 나서 사리를 담았던 병을 봉안하는 탑파를 세웠고, 분사리 때에 맞춰 도착하지 못한 모리야 부족도 화장때 타고남은 숯을 수습해서 봉안한 탑파를 따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탑은 모두 열 개었지요. 

 

그후 1백년 가량 지나 인도를 통일하고 최초의 인도 제국을 세운 마우리 왕조(B.C 317∼180)의 3대왕인 아소카(B.C 268-232년경)는 여덟 개의 탑에 봉안했던 진신사리를 발굴해서 한데 모았다가 다시 8만4천 개로 나누고, 이를 전국에 보내어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세웠습니다. 

 

아소카 왕이 8만4천 탑을 건설한 것은 국론통일 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실제로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8만4천 개의 탑에 일일이 진신사리를 분배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세워진 기원전 시기의 인도 불탑은 후대의 탑, 특히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탑과는 모양이 매우 달랐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불탑' 항목에서는 인도 불탑의 모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비롯된 불탑은 반구형(半球形)을 이루어
마치 분묘와 같은 외관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 경주의 왕릉을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인도의 탑은 그 발생의 연유와 봉안된 내용에 따라서
원분형(圓墳型)을 이루고 있었는데, 점차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밑에 높은 기단이 만들어져서 탑신을 받들도록 되었으며,
탑 위의 상륜(相輪)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이들을 보호하고 장엄하게 하기 위한 돌난간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우아한 조각이 새겨졌다. 오늘날 인도 초기의 조각이
주로 기원전의 바르후트탑이나 산치탑의 돌난간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불상 출현 이전에는 오직 탑만이 건립되었고,
그곳에만 장엄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불탑' )

 

이렇게 글로만 설명해 놓으니까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인도 불교의 초기 탑 사진을 좀 찾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남은 가장 오래된 인도 불탑 중에 산치탑이 있습니다.  아소카 왕이 기원전 273년과 236년 사이에 산치(Sanchi) 지역에 세운 것인데, 사진의 탑은 이 지역의 여러 탑파 중에서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된 것이어서 산치 대탑(Great Stupa of Sanchi)이라고 불립니다.

 


산치탑 
인도의 스투파, 산치 대탑

 

사진에 보이듯이 초기 인도 탑은 반구형 혹은 돔형입니다.  불교 건축에서는 이 반구형을 복발(覆鉢, 팔리어로는 안다, anda)이라고 부르는데, '엎어놓은 밥그릇'이라는 뜻입니다.  복발 꼭대기에 만들어진 사각형의 난간은 '평평한 머리'라는 뜻으로 평두(平頭: 팔리어로는 하르미카, harmika)라고 부르고,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게 돼 있습니다. 

 

평두 한 가운데 꽂혀있는 뾰족한 기둥은 간(竿, 팔리어로는 야스티, yasti)이라고 부르는데, 이 간은 복발 위로만 솟은 게 아니라 복발 속으로도 관통하여 지표에까지 이릅니다.  평두 위로 솟은 간에 붙여진 고리 모양의 장식은 '우산'처럼 생겼다고 해서 산개(傘蓋: 팔리어로는 챠트라, chattra)라고 합니다.  끝으로 복발을 지탱하는 사각형의 받침대는 기대(基臺, 팔리어 이름은 모르겠음)라고 부릅니다.

 


산치구조 
산치 대탑의 단면도와 각 부분의 이름

 

탑에서 복발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해 두는 신성한 공간인데 동시에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산치 탑의 경우 복발은 자갈과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내부 공간은 없습니다.  평두는 동서남북으로 상징되는 하늘을 가리킵니다.  부처들이 사는 수미산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평두 밑으로 복발까지 관통해서 기대에까지 닿아 있는 간은 지구의 중심을 관통하는 축을 상징하는데, 간이 끝나는 지점에 사리를 봉안하게 돼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축 한 가운데에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지도록 한 것이지요.

 

고대 인도의 탑파는 규모가 아주 커서 웬만한 사원 크기만큼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탑을 세우는 일차적인 목적은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복발 내부에 공간이 마련됐더라도 (스리랑카의 켈라니야 탑처럼) 거기서 예불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탑을 둘러싼 종교활동이 있다면 그건 탑돌이입니다.  탑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석가모니의 교훈을 되새기거나 소원을 비는 것이지요.

 

사리를 모시는 탑파의 이 다섯 가지 기본 요소(기대, 복발, 평두, 간, 산개)는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예컨대 인도 동남단의 섬 스리랑카의 탑들도 이 양식을 따랐습니다. 

 

아래 보이는 켈라니야 사원/탑(Kelaniya Vihara/Dagoba)은,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인데, 석가모니의 이빨을 봉안했다는 칸디(Kandy)의 성치 사원(Dalada Maligawa: Temple of Sacred Tooth)과 함께,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입니다.

 


켈라니야 
스리랑카의 다고바, 켈라니야 불탑

 

켈라니야 사원과 탑이 세워진 것은 기원전 3세기, 켈라니야 강가에 처음으로 도시를 만든 얄라티싸(Yala-tissa)왕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원과 탑은 1213년 남인도 침공군에 의해 파괴됐지만, 훗날 비자야바후 3세(Vijayabahu III)에 의해 재건됐습니다. 

 

재건된 켈라니야 사원은 포르투갈 식민군에 의해 1574년에 다시 완전히 파괴됐는데 포루투갈이 물러가고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온 이후 키르티 스리 라자싱헤(Kirthi Sri Rajasinghe) 왕에 의해 1767년에 일시 복구됐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지 기간(1638-1796)과 잉국 식민지 기간(1796-1948) 내내 계속된 숭기억불 (기독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 때문에 켈라니야 사원과 탑은 제대로 건사되지 못했습니다.  켈라니야 사원과 탑이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1888년 이후의 재건 사업 덕분입니다. 

 

(참고로, 스리랑카는 1505년부터 포루투갈과 네덜란드와 잉국의 식민지였다가 1948년에 독립했습니다.  이 유럽국가들은 스리랑카로부터 차와 후추, 계피, 그리고 루비 등의 보석 광물 자원 등을 착취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35년도 지겨웠는데, 스리랑카는 무려 4백44년 동안 피를 빨렸습니다.)

 

켈라니야 탑을 보면 산치탑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사진에는 기대(基臺)가 보이지 않지만, 복발(覆鉢)은 더욱 커졌고, 장식이 좀 더 요란해진 평두(平頭)도 그대로 있습니다.  간(竿)의 모양이 조금 바뀌었는데 산치탑에서는 그냥 장대 같은 막대기였던 것이 켈라니야탑에서는 원뿔모양으로 돼 있습니다.  산개(傘蓋)의 수는 산치 대탑보다 적은 것 같기는 하지만 1-2개 정도가 장식돼 있습니다.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외형이나 구조의 양면에서 산치탑과 켈라니야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탑이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전래되면서 좀더 과격한 변형이 생겼습니다.  한가지 예로 먼저 미얀마의 수도 양곤(Yangon)에 세워진 쉐다곤 빠야(Shwedagon Paya)를 보시지요. 

 


쉐다곤 
미얀마 양곤의 빠야, 쉐다곤 불탑

 

이 탑은 쉐다곤 파고다(Pagoda)로 불리기도 하는데, 파고다는 미얀마어 빠야(Paya)와 싱할라어 다고바(Dagoba)의 합성어라는 점은 앞에서도 밝혔습니다.  쉐다곤 역시 합성어입니다.  앞의 쉐(Shwe)는 황금이라는 뜻이고, 뒤의 다곤(Dagon)은 양곤(Yangon)의 옛 이름이지요.  그래서 쉐다곤은 '황금도시 양곤'이라는 뜻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쉐다곤 빠야는 석가모니가 살아 생전인 2천5백년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미얀마 출신의 형제 상인 타푸싸(Tapussa)와 발리카(Bhallika)가 대상을 끌고 인도에 갔을 때 득도한 지 얼마되지 않은 고타마 싯다르타를 만났습니다.  약간의 진기한 선물을 드린 대가로 석가모니의 머리카락 여덟 올을 얻어서 미얀마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미얀마의 오칼라파(Okkalapa) 왕은 높이 66피트짜리 빠야를 세우고 그 안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봉안합니다.  이게 바로 쉐다곤 빠야의 시작입니다.  '시작'이라고 한 것은 그 뒤로도 이 빠야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확장됐기 때문이지요.  중건 사역을 다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의 높이가 326피트로 무려 5배 가량으로 높아졌고, 그 주위에는 64개의 작은 빠야들이 즐비하게 세워졌습니다.

 

쉐다곤 빠야의 또 한가지 특징은, 쉐다곤이라는 이름에 나타나듯이, 외벽을 온통 금판으로 뒤덮었다는 점입니다.  원형인 밑면의 둘레가 1420피트이고 높이가 99미터인 이 탑의 표면에는 2만여 개의 황금 판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금의 무게가 7톤쯤 된답니다.  이건 금멕끼(?)가 아닙니다.  미얀마 각지의 불교도들이 헌금한 순 황금판을 그대로 갖다가 붙인 것입니다.  자기가 바친 황금 판이 쉐다곤 빠야의 장식물로 채택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쉐다곤 빠야의 상층부는 5천4백48개의 다이아몬드와, 2천3백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등의 각종 보석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빠야의 곳곳에 1천65개의 황금종이 설치돼 있고, 제일 꼭대기에는 76캐럿 짜리 다이아몬드가 설치돼 있습니다.  물론 밑에서 쳐다보아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시세를 따지기 어려운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습니다.

 

쉐다곤 빠야는 외견상 인도의 스투파나 스리랑카의 다고바와 상당히 다릅니다.  우선 복발(覆鉢)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몸체가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진 원뿔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 빠야에는 평두(平頭)가 없고, 간(竿)이 매우 길어지면서, 산개(傘蓋)는 원형고리가 간에 새겨진 모양으로 변형됐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중건 공사 때문이겠습니다.  우선 복발이 약화된 것은 높이를 늘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을 것입니다.  사진을 잘 보시면 전체 높이의 5분의1정도까지는 둔탁한 종 모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최초의 높이입니다.  따라서 이때에는 반구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높이를 늘이다 보니까 돔 모양이 사라졌고, 외벽에 금판을 자꾸 붙이다 보니까 모양이 각이 지게 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두가 없어지고, 간이 길어지고, 산개가 화려해 진 것도 역시 후대의 확장공사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쉐다곤 빠야는 최초의 모습은 인도나 스리랑카의 그것과 비슷했을 지 몰라도, 후대의 중건공사로 독특한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그 변화는 복발 윗부분의 확장으로 인해 전체 모양이 훨씬 날렵해 졌다는 점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가늘고 긴 중국, 한국, 일본의 탑들과 비슷한 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복발 윗부분이 확장된 불탑의 모습은 타이(Thai)의 대표적 사원인 와트 프라케오(Wat Phra Kaeo)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이의 현 왕조인 차크리 왕조를 연 라마1세는 탁신 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 살 집과 사원을 지었습니다.  왕궁은 1782년에, 사원은 1784년에 완공됐지요.  아래 보이는 사진이 차크리 왕조의 왕실 사원으로 알려진 와트 프라 케오입니다.

 


와트프라케오 
타이 방콕의 왕실 사원 안에 세워진 세 불탑

 

이 사원에는 서로 다른 대형 불탑 세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크메르의 앙코르와트를 모델로 한 옥수수 모양의 불탑과, 타이 고유의 뾰족식 불탑, 그리고 미얀마식의 종 모양 불탑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미얀마식의 종 모양 불탑입니다.  프라스리 라타나 체디(Phra Sri Ratana Chedi)라고 불리는 이 불탑에는, 1899년 인도에서 받아 온 부처님의 어깨뼈(쇄골?) 일부가 봉안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빛을 한 것도 미얀마의 빠야를 닮았지만 인도의 스투파나 스리랑카의 다고바 같은 전형적인 인도 불탑보다 훨씬 높이 만든 것도 쉐다곤 빠야를 그대로 빼다 박았습니다. 

 


프라스리라타나 
와트 프라케오 안의 체디, 프라 스리 라타나 불탑

 

프라스리 라타나 체디는 구조적으로 인도나 스리랑카의 원형에 훨씬 가깝습니다.  기대(基臺)와 복발(覆鉢), 평두(平頭)와 간(竿), 그리고 산개(傘蓋)가 모두 뚜렷이 보입니다. 

 

물론 변형된 것도 있습니다.  기대는 훨씬 높아졌고, 복발은 반구형이라기 보다는 종형에 가깝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는 평두가 네모난 난간이었지만 여기서는 아예 밀폐시켰고 모양만 사각형을 유지했습니다.  간은 훨씬 높아졌고, 산개는 아예 고리형으로 바뀌면서 숫자도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이런 변형은 아마도 미얀마의 쉐다곤 빠야처럼 높이를 늘이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구조의 면에서는 원형을 유지했더라도 전체적인 모양은 인도의 스투파나 스리랑카의 다고바로부터 크게 달라졌습니다.  둥그런 모양에서 뾰족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지요.  평두 위의 간과 산개를 크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평두 이상의 모양만 떼 놓고 보면 중국이나 한국의 불탑과 상당히 유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왜 피라미드를 '탑'이라고 불렀는지 알아보느라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불탑을 살펴봤습니다.  인도에서 타이에 이르는 주요 불교국가의 불탑들이 지금 한국에서 보이는 석탑들에 비해 훨씬 크고 웅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가 스투파나 다고마, 빠야와 체디처럼 '탑'의 일종으로 보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태의 면에서 피라미드와 불탑은 유사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은 피라미드와 불탑이 모두 그 안에 신인(神人)의 유해를 봉안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입니다.  주요한 불탑은 예외 없이 부처님의 유해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산티 스투파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봉안소입니다.  스리랑카의 칸디 다고바는 부처님의 이빨을 모셨고, 켈라니야 다고바에는 부처님의 강론을 기념하는 왕관이 안치돼 있습니다.  쉐다곤 빠야에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모셔져 있고, 프라스리 라타나 체디에는 부처님의 어깨뼈가 봉안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피라미드에는 이집트의 왕이자 태양신으로 받들어졌던 파라오의 미이라가 안치돼 있습니다.  위대한 인간이자 해탈해 신적 존재로 인정된 부처님의 유해를 모신 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형태의 면에서 뿐 아니라 기능의 면에서도 피라미드와 불탑은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피라미드를 '탑'의 일종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의 눈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피라미드의 '사각뿔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불탑은 모두 반구형이거나 원뿔 모양입니다.  그러니 피라미드를 그냥 탑이라고 부르기는 좀 껄끄러웠겠지요.  그래서 그 '사각뿔' 모양을 '진쯔(金字)'라는 형용사로 표현했습니다. 

 

그게 바로 피라미드가 '진쯔타(金字塔)'라고 불리면서 '탑(塔)'으로 분류되기에 이른 사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평미레/
조정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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