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가람 개요

鶴山 徐 仁 2005. 12. 12. 09:44

가람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가 수천년 동안 우리의 정신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우리 문화유산

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먼저 떠올려야 할까 ?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역시 가람이다. 가람은 불교문화의 보물 창고로 불가에서 귀하게 여기

는 3보 가 있고, 모든 불교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람의 어원

 

가람이란 승려들이 머물면서 불상을 모셔놓고 불법을 닦으며 불자들에게 불교 교리를 말하는 곳이다. 가람이란 단어보다는 절이나 사찰이란 이름이 더 익숙해져 있다.

 

가람 : 가람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범어)의 Sangharama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를 한자  음역하여 승가람마 (僧伽籃摩)라 하는데, 이를 줄여서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衆)의 뜻이고, 람마란 원(園)의 뜻으로 중원이라고도 한다. 본래의 의미는 많은 승려들이 한 곳에 모여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인데, 훗날 단순한 건조물로서의 전당을 가리키는 명칭 또는 사찰의 통칭이 되었다.

 

  :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당시의 중국 관청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나라 때 인도의 승려들을 맞아 머무르게 하고 접대하는 일을 행하던 관청을 시(寺)라고 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인 홍로시(鴻盧寺)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청과 구별하기 위해 승려들이 머무르는 곳을 '0 0사'라 부르게 되었다.

 

또 사찰은 절(寺)에 깃발(당)을 매다는 찰(刹 : 당간)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가람을 지칭하는 용어 중 유일하게 순 우리말이다. 절이란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처음 신라에 불교가 전해질 때, 아도화상은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북 구미시)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

 

모례의 집이 우리말로는 '털례의 집'이었고 털이 덜 →절로 변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사찰에 가면 절을 많이 하므로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사원 : 원은 화랑이나 담장을 두른 집이라는 뜻으로 원(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나라 초기엔 불교의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사와 원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다 당나라 이후에 사가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사는 사찰 전체를, 원은 사찰 내의 특정한 기능을 가진 별사를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깊은 산중의 작은 사찰이나 토굴 . 석굴을 '암' 이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우리나라도 이들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는데, 오늘날 흔히 사원이라 하면 이들을 통틀어 칭한다

 

가람의 기원

석가모니와 그를 따르던 인도의 출가자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들은 일정한 주거지를 갖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수도 생활에 힘썼다. 이리저리 떠돌면서 불법을 전하고 고행에 정진했기 때문에 가람이라는 수도장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 에는 이 같은 생활이 불가능 하므로 함께 모여 수도에 힘쓸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우기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는 계율을 정하고, 출가자들이 한 곳에 모여 수도하도록 함에 따라 가람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사찰은 단순한 공동 주거지의 성격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로 그 성격이 변회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인도에서는 예배 대상인 불사리를 안치한 탑이 있는 탑원과 승려의 수도처인 승원을 서로 다른 장소와 방향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중국 역시 육조시대까지 동일한 양식을 취했다.

 

시대별 가람 배치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는 중국을 거치면서 중국의 고유한 문화와 결합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람 배치인데, 중국 육조시대 이후 중국의 궁전 건축과 인도의 불탑 요소가 결합되면서 가람 배치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탑외에 불상을 모셔둔 금당(金堂) 이 생겨났고, 불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출가자들이 공부하는 강당(講堂), 승려들이 머무는 승방(僧房), 사찰의 출입문 격인 남문과 중문, 범종을 걸어둔 종루(鐘樓) 등의 각종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때 일정한 배치 양식이 등장했는데, 남북 자오선상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 불탑, 금당을 두었다. 그리고 중문과 강당을 잇는 회랑(廻廊)을 조성해서 불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성역을 만들었고, 성역주위에 승방과 기타 건물들을 배치했 다.   

 

이러한 가람 배치 양식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간다. 중국을 통해 불교를 수용한 우리나라는 중국의 가람 배치에 영향을 받았고, 이후 시대별로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 냈다.   

 

고구려 - 일탑삼금당식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의 가람 배치 양식을 띠는데, 이는 중앙에 놓인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동 . 서 . 북에 각각 금당을 두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소수림왕 2년(372), 중국 진나라 왕이 경전 . 불상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면서 불교가 전래 되었다. 2년 뒤인 374년, 중국의 승려 아도화상이 들어오고, 375년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짓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불사의 최초 기록이다.

 

그 뒤 평양에 9개의 절을 비롯하여 상당수가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가람 배치 양식은 알기 힘드나 평양을 중심으로 발견된 몇몇 폐사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중 평양의 청암리사지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에 의하여 발국되었는데, 중앙에 8각목탑지로 추정되는 팔각전지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 . 서 . 북편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3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팔각전지 남쪽에는 중문지(中門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고, 팔각전지로부터 동서남북의 건물지까지 걸어다닐 수 있도록 보도로 연결해 놓았다.

 

그 이외에 대동군 상오리사지, 평양 정릉사지 역시 중앙에 8각목탑을 세우고, 동 . 서 . 북에 금당을 배치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 - 일탑일금당식

 

 백제는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를 취하는데, 이는 남 . 북측 선상에 남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차례대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이는 비교적 넓은 땅이 필요한 배치양식으로 평야 지대가 많은 백제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뒤인 침류왕 원년(384), 동진을 거쳐 백제로 들어온 인도의 승려 마라나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사찰은 공주 . 부여 . 익산을 중심으로 많이 세워 졌으나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없다. 하지만 부여 군수리사지 . 동남리사지 . 정림사지 . 익산 미륵사지가 발굴 . 조사되면서 그 형식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935년과 1936년 2차에 걸쳐 조사된 군수리사지는 목탑지로 보이는 정방향의 기단을 중심으로 북편에는 금당과 강당을, 남쪽에는 중문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 하였다. 강당의 좌우에는 별도의 건물이 설치되어 있고, 중문 좌우에서 동서로 뻗은 회랑이 북쪽으로 꺽어져 있어 이 별도의 건물지 남쪽기단에 이어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부여의 정림사지도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일탑일금당식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익산의 미륵사지는 일탑일금당식을 기본으로 한 삼탑삼금당의 특별한 형식을 띠고 있다. 남북 일직선선상에 중문돠 목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그 좌우 동원과 서원에 각각 석탑과 금당을 배치했다. 그리고 복랑으로 된 회랑으로 중문에서부터 강당까지 연결했는데, 강당 좌우에는 승방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신라 - 단탑식

 

 신라의 가람은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형성된다. 하지만 고구려 . 백제의 경우처럼 금당 건물의 수가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라의 가람은 단탑식 가람 배치를 갖는다고 한다.

 

고구려 . 백제에 비해 뒤늦게 불교를 수용한 신라는 5세기 중엽 묵호자에 의해 전해지기는 했으나, 공인되기는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는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흥륜사 . 영흥사 . 기원사 . 삼랑사 . 황룡사 . 분황사 . 영묘사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신라의 확실한 가람 배치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찰은 황룡사지이다. 남북 일직선상에 남문 .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을 차례로 두고, 중문에서 강당 좌우의 건물까지 방형의 회랑과 승방을 둘렀다. 그리고 금당 좌우에 2채의 불전을 병렬로 배치했고, 그 앞에 경루(經樓)나 종루(鐘樓) 같은 건물을 두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백제의 일탑식을 따르고 있지만, 금당 좌우의 동서 금당이 놓인 것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을 띠고 있다.

 

통일신라 - 쌍탑식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쌍탑식이라는 독특한 가람 배치가 등장한다. 금당 앞에 하나뿐이던 탑이 좌우 두개로 나눠지면서 두 개의 탑이 가람의 중심부에 자리잡는 쌍탑식을 취하게 된다.

 

삼국 통일 이후 불교의 중흥기를 맞은 신라는 수많은 가람을 창건하는데, 하나같이 쌍탑을 세웠다. 이는 불상을 모신 금당이 사리를 모신 탑보다는 더욱 중요한 예배 대상이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탑은 하나의 상징적 조형물 정도의 역할만 맡기 시작한 것이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가람은 1959년에 발굴 . 조사 된 감은사지와 1969년에 발굴 . 조사된 불국사등이다.

 

감은사지는 현재 동 . 서 3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좌우 석탑의 뒤편에 금당과 강당을 설치하고 강당의 좌우에는 별도의 건물을 세웠다. 석탑의 남쪽에 중문을 설치하고, 이 중문의 좌우에서 시작하는 회랑이 강당 옆 건물의 양끝 앞에 닿는다. 금당 좌우에서 동 . 서 회랑까지 익랑(翼廊)이라 불리는 회랑을 설치하여, 남북 공간을 다시 나눴다.

 

불국사는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자하문) . 금당 . 강당(부설전)을 배치하고, 금당 앞 좌우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웠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을 둘렀다.

 

통일신라 이후

 

 쌍탑식 가람은 8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지만 9세기 이후, 통일신라 중기 이후부터는 선종의 보급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좌선과 해탈을 중시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사찰들은 산간지역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험준한 산악 지형에 따라 사찰을 짓다보니 앞선 시대의 양식대로 자유롭게 지을수 없었다. 쌍탑을 세울수 없거나, 아예 세울수 없는 절도 생겼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사찰은 꾸준히 세워지는데, 기본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식 가람 배치를 계승하지만 주로 단탑식 가람 배치를 따른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모든 가람이 자연 지세와 어울리는 터에 자리잡고, 풍수에 기초를 둔 가람 배치를 이루는 변화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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