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클래식. 오페라

[스크랩] 안톤 브루크너//교향곡 제8번 다장조 - 오이겐 요훔(cond)

鶴山 徐 仁 2005. 9. 2. 03:45

안톤 브루크너가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오스트리아 린츠(Linz) 근교 안스펠덴 (ansfelden)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St Florian Abbey)의 이미지 입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1896) Symhony No. 8 in c minor Eugen Jochum(오이겐 요훔) ,conductor Philharmonisches Staatsorchester Hamburg 브루크너는 번호가 붙은 교향곡 9편 이외에 사후 발견된 습작 교향곡 2곡 (0번과 00번)을 포함해 모두 11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그 중 9번은 3악장까지만 작곡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 미완성으로 남겨졌기에 8번 교향곡은 완성된 마지막 대작이 되는 셈입니다 이 방대한 교향곡은 브루크너 자신의 쾌심작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브루크너는 60세에 이르러 겨우 인정을 받은 작품 제7교향곡 으로써 일단 성공했으며, 그 성공에 힘을 얻어서 이 제 8교향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웅적인 의도와 그 정신을 반영시키는 대 규모의 구성을 지닌 것으로, 브루 크너의 생명이라고도 할 만한 대위법의 교묘한 사용법이 멋진 통제에 의해 불후의 교향곡을 완성하고 있다. 전곡이 완성된 것은 1885년이지만, 훗날 브루크너의 친구와 제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1890년에 보충하여 썼다. 이 교향곡을 쓰던 무렵의 부르크너는, 체력의 쇠퇴를 느꼈고 마음 속에는 죽음의 예감조차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교향곡에는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군데군데 죽음의 예고가 나타나 있다. 브루크너의 행복한 시절에 착수되었지만. 개정을 거듭하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 말년의 브루크너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와 구상의 웅대함은 역시 대표적인 걸작이라 일컫기에 어울리며, 초연 은 1892년 12월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행해졌다. 제 1악장 Allegro moderrato. 단테의 신곡(神曲)의 지옥편. 깊은 수렁으로 내려가는 듯한 죽음의 때'가 엿보인다. 제 2악장 Scherzo. 브루크너 자신이 이 악장을 '독일의 야인'이라 부르고 있다. 튜톤사람특유의 풍류를 모르는 성격인 자기 자신을 상징하여 여기에 보여 주고 있다. 제 3악장 Adagio. 종교적인 정화. 제 4악장 빠르지 않고 장중하게. 브루크너가 만든 최후의 제 4악장(최후의 작품 제 9교향곡에는 제 4악장이 없다). 장대하고 압도적인 끝곡. 오이겐 요훔 (Eugen Jochum,1902~1987) 독일 바벤하우젠에서 교사와 아마추어 음악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은 작곡가, 동생은 지휘자가 된 음악 가정 출신입니다. 그는 1927년에 뮌헨 필하모니와 가졌던 자신의 지휘자로서의 데뷔 음악회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을 연주한 이래, 평생을 브루크너 교향곡에 헌신한 브루크너 해석의 권위자입니다. 그는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휘 경력을 거치면서 명성을 쌓았는데, 독일 낭만주의에 심취하였고 그 유산을 후배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은 브루크너 해석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브루크너 교향곡 자체가 워낙 일반 아마추어들이 감상하기 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 일반에게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으며, 오르프(Carl Orff)의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지휘 음반이 명반으로 굳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Anton Josef Bruckner 1824~1896)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그 밑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교사 보조로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고, 결국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는 국제적 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 등에서도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11개의 교향곡과 3개의 모테트,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생전의 그의 음악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는 그가 바그너 추종자였기 때문에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의 무조건 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 이 주변에조차도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셉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곡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개작하도록 압박했고 이런 압박이 브루크너 자신의 유악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여져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 원고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의 7번, 8번 교향곡,테 데움의 공연에서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너무나 늦은 성공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안장 되어 있습니다

 
가져온 곳: [나노식품/나노푸드 (Nanofood)]  글쓴이: Truescience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