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화낼 준비된 사회
중앙선데이
입력 2022.09.03 00:30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얼마 전 쓴 영국의 차량용 주유 대란에 관한 칼럼에 누군가 “어디 사는 여자냐”라고 댓글을 단 걸 봤다. 나는 영국에 살고, 일하는 로펌은 폴란드에 있다. 매일 폴란드로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폴란드에 다녀왔는데,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란드인 아기와 그 가족 근처에 앉게 되었다.
이 아기는 바르샤바공항에서도 소리를 지르며 기저귀를 찬 궁둥이를 실룩이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제법 빨라서 아기 엄마가 뛰듯이 해야 그 아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과는 별개로 아기를 돌보는 것은 꽤나 고된 일이다. 두 시간이 약간 넘는 비행 중에 이 아기는 울고 소리 지르고 단 한 순간도 조용히 있질 않았는데, 그 엄마와 누나인지 친척인지 모를 십대 소녀는 그런 상태에 익숙한 모양인지 아기를 돌보는 와중에 틈틈이 책도 읽고 다운로드해 온 동영상도 보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려 애쓰고 있었다.
기내서 아기 운다고 부모에게 폭언
화낸다고 아기 울음 그치게 못 해
계기만 되면 화 발산하려는 사람들
수면 부족 때문인가 날씨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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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나 역시 아기를 키워 본 엄마다. 아기를 낳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아기가 우는데 도무지 그치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우는 아기를 안고 들여다보며 울지 말라고 설득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논리와 이성을 동원한 설득이 아기에게 통하지 않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나의 감정상태가 불안정해지자 아기는 더 크게 울어 댔다.
위 단락을 읽고, 아무리 초보 엄마라지만 우는 아기를 붙잡고 설득을 하다니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기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혼내서 무언가를 중지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아기 단계를 꽤나 넘어선 아이들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이제 아이에게 뭔가를 못 하게 하기 위해서 혼을 내는 식의 강압적인 훈육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합의가 얼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의 자식에게는 몰라도 특히 자기 자식에게는 그런 입장인 듯하다.
아기는 뭔가 불편하니까 울 것이다. 그 불편함이 해소되기 전에는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이 없다. 일단 기저귀를 갈아 준다. 배가 고픈지를 확인한다. 둘 다 아닌데도 울면 열은 없는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를 본다. 아프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기는 하다. 졸린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불편할 수도 있다. 말을 못하니 운다는 건 알겠는데, 차라리 말이라도 하면 낫겠다 싶다.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나도 울고 싶은 적도 수도 없었다.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는 시간은 참으로 길게 느껴진다. 더구나 옆에서 눈치라도 주면 더하다.
압권은 히스로공항에 착륙할 때였다. 이 폴란드 아기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울어 댔는데, 승객 중 누구도 그 아기 엄마나 승무원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아기를 말로 설득하거나 혼내서 울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부모에게 뭐라 한들 우는 아기의 부모 역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가 있다. 아기를 당장 뚝 그치게 하는 비법이 있다면 그걸 가장 간절히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우는 아기의 부모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착륙에 걸리는 시간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조금만 참으면 비행기는 착륙한다.
한국의 비행기에서 아기가 운다는 이유로 그 부모에게 폭언하고 침을 뱉었다는 뉴스를 봤다. 아기 부모에게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해도 우는 아기를 그치게 할 수는 없고, 오히려 화내는 사람 때문에 더욱 시끄러워지고 주변 사람들은 더 불편해진다. 싸움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화를 낸 본인 역시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본인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왜 굳이 화를 내고야 마는지 뭘 어쩌라는 건지 그 부분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폴란드발 비행기의 승객들인들 특별히 착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우는 아기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란 아기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기 화를 발산하고 싶은 사람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던 사람일 수도 있다. 한국에는 화가 나 있거나 계기만 있으면 화를 낼 준비가 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심지어 문제 해결과 관계없이 일단 화를 내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본다. 같이 일하던 이탈리아인 동료에게 한국인들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고 했더니 다들 화가 나 있지는 않냐고 물었다. 정말로 수면 부족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날씨 탓인가.
어쨌거나 화를 내 봐야 소용없는 데 대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쪽이 결과가 더 나을 건 당연한 일이다. 아기나 그 부모에게 화를 내기 전에 승무원에게 귀마개라도 요청해 보는 건 어떤가. 차라리 이어폰 등을 준비해서 탑승하는 쪽이 낫겠다.
또는, 저 울어 대는 아기가 무럭무럭 아프지 말고 잘 자라서 세금을 내야 기성세대의 노후가 편안하다는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 부드러운 마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말이다. 한국은 심각한 저출산 국가다. 아기가 운다고 욕을 먹는 사회라면 아기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대해 좀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부분까지 고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는 아기를 당장 그치게 하라고 화를 낼 리가 없다.
김세정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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