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당신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창세기 5장 22-24절, 6장 9절)

鶴山 徐 仁 2021. 2. 16. 10:47

당신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창세기 5장 22-24절, 6장 9절)

 

 

02월 16일 (화)

   

당신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창세기 5장 22-24절, 6장 9절)


창세기 5:22-24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6:9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인생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사귀고 가정도 이루고 동호회 모임도 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다녀도 결국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면 이 외로움이 해결됩니까? 아니 오히려 사랑했던 사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함께 했던 일들이 잘 되지 않아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에녹과 노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녹은 성경에 아주 짧게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성경에 유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이 단어는 “걷다”라는 뜻인데, 특별히 이 부분에서는 “의지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걷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 안에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이것을 엄청난 일로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노아가 그의 인생에서 방주를 지으며 주님과 동행한 것처럼 엄청난 사역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에녹을 보면, 에녹에서 대해서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간단하게 기록합니다. 에녹이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한 일은 자녀들을 낳은 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엄청난 업적을 

이루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그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에녹에 대해서 평가할 때, 에녹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쁘시게 하는”으로 번역된 단어가 구약에 “하나님과 걷다.”라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과 걷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집니다. 우리의 관계의 우선순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그 은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그 은혜로 모든 이 땅의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면 사람과의 관계도 실망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동행의 우선순위를 지키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열망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의 동행도 은혜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사람의 도움과 위로를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를 찾는 자리로 먼저 나아가 봅시다. 

 

주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위로와 도움을 의지하며

살아갔던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사람에게 상처받고

하나님도 원망하게 되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힘들어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자유라고?

 

“사르트르의 『자유의 길』의 주인공은 퐁뇌프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껄껄 웃습니다. 도대체 자유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 오다가, 한

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자유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자기가 바로 자

유라는 것을. 인생을 선택하고 결행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이성복 저(著) 《극지의 시》 (문학과 지성사, 62쪽) 중에 나오는 구절 입니다.

문학과 철학 예술 등 인본주의 인문학에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참 멋진 말 같습니다.  

악한 마귀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속인다고 하였습니다(고후11:14).

전혀 마귀스럽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온다는 의미지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마귀의 말 중에 가장 아

름답게 치장된 말이 바로 “네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참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을 죄라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9)

 

성경에서 말하는   ‘죄(하타)’  의 근본 개념은   “올바른 방향(과녁)을

벗어난 것” 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

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부여받은 그 탁월한 능력으로 자신이 주

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죄’  라고 합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자유롭습니다. 새는 하늘에서 자유롭습니다.

기차는 레일 위에서 자유로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9)

   

요한복음 15:5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John 15:5 [NIV]

   

자비

강건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함으로 점점 더 자비를 키워 간다. 

그들은 상냥하고 친절하다. 그들은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비의 자리로 나아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연약한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비의 열매에 자양분이 부족하다는 신호이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가혹하게, 또는 무례하게 대했다면, 

그것을 죄로 여기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라. 그러면 당신도 자비를 키워 가게 될 것이다.

-사이먼 슈락의 [서로 서로] 중에서-

 

교회는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체되어 하나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머리로 하나될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렇기에 자비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 자비의 열매가 있다면 누군가를 대한 삶의 태도나 자세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