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18장 1-6절)외 1

鶴山 徐 仁 2020. 11. 22. 11:10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18장 1-6절)

 

11월 21일 (토)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18장 1-6절)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우리는 경쟁과 비교의식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가장 큰 질문은 “누가 큰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교의식이 얼마나 큰 영혼의 피폐함을 가져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다가와서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여기에서는 중요한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너희가 돌이켜”라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돌아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돌아서는 일”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단어는 바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인데 예수님은 오해하지 않도록
4절에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바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잘난 척, 낮은 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를 “낮추는 척”하는 것은 “낮추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척”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는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내 자신의 삶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다 헛수고입니다. 다음 단어는 “절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 말씀 이후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후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예수님은 연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낮아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여 낮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큰 맷돌을 목에 메고 물이 빠지는 것보다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 모두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낮아지는 하루를 삽시다. 
아니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갑시다. 

 

- 겸손한 “척”한 것을 “나는 나름대로 겸손하게 행동했다.”고 착각했던 일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우리 주변에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합니다. 

 

주님이 때로 나를 고난을 통해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낮추시는 이유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주신 고난 때문에 내가 낮은 사람을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걸어갈 때, 성령님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능력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질문하는 신앙

우리는 이 당에서 많은 질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데 하는 일마다 잘 안될까?, ’나는 왜 이런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이 달라야 대답도 달라집니다. 바른 질문을 던져야 바른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안희묵의 [그래도, 다시 시작이다] 중에서-

 

우리는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답을 얻기 위해서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은 더 중요합니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질문은 긍정적인 답을 원합니다. 
부정적인 질문은 부정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신앙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11월 20일 (금)

   

막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민수기 22장 25-34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만약 오늘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들을 막으셨다면 어떤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그럴 때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올라가는 길에 모압 땅을 지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압 왕인 발락이 이 소식을 듣고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알아보니까 이스라엘과 전쟁한 모든 나라들이 멸망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려워진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부돌에 있는 발람이라는 선지자, 혹은 점술가를 부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절하자 발락 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라고 제안을 합니다. 
이에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다시 가라고 말씀하심으로 발람은 종들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발람이 길을 떠난 것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고는 분노하실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자신을 보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주실 때까지 기도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했을 때,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왕을 구하자 그것을 허락하시지만, 결국 왕을 세운 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을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또 묻는 발람의 마음을 아시고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그가 가는 길에서 그를 치려하십니다. 
발람은 보지 못했지만, 이 상황을 본 나귀는 자신과 주인을 살리기 위해 계속 벽으로 몸을 부딪히고 결국에는 땅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발람은 오히려 나귀를 더 세게 채찍질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눈이 열려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이미 자신이 원하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을 아시고 그의 길을 막으신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막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막으십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살며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의 삶에 이루어 주시옵소서." 

 

-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 원하는 간절한 삶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그 기도제목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나의 삶에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확신을 내려놓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막아 주시옵소서. 나의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성취주의자 허무주의자 행복주의자

 

“성취주의자들은 미래에 자신의 목표가 성취되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산다. 미래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쾌락주의자는 단순히 순간의 쾌락만을 중시한다. 순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허무주의자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가치와 목적도 없다. 
단지과거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행복주의자들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김병완 저(著) 《내 인생 조금만 더 행복하길》 (팬덤북스, 194-19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산의 정상을 정복할 때 뿌듯함이 있지만, 산을 오르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기쁨이 더욱 큰 행복입니다. 행복은 ‘과정’에 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캠벨 몰간 목사님은,  매일 오후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런던의 하이드 파크를 산책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날, 갑자기 딸이 며칠

동안은 산책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묻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몰간 목사님은 서운했습니다.

얼마후 그 이유를 성탄절 아침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성탄 선물로 아버지께 드릴 슬리퍼를 만드느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탄절 아침 이 선물을 받으면서 몰간 목사님은 딸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무 고맙다. 이것을 만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 니?
그런데 말이야, 아빠는 슬리퍼 선물보다도 네가 나와 더불어 같이

손잡고 산책하는 것이 더 좋단다.”

그저 같이 있어서 좋은 사람.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과 행복은 ‘과정’과 ‘동행’에 있습니다.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며 같이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잠언 11: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라The desire of the righteous ends only in good, but the hope of the wicked only in wrath. 

잠언 11:23 NIV.

   

기적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 바람과 파도를 만났습니다. 
사투를 거듭하며 절망에 빠지는 순간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그를 배에 영접하자
바람과 파도는 멎고 배는 목적지에 안착합니다.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이 파도와 바람을 다스리는 자연의
주인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 환경을 초월해 일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의 표적이었습니다. 

-이동원의 [처음 복음]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 삶에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지키시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는 자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우리 인생은 한 호흡입니다. 한 호흡을 이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