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20:11~18)
11월 13일 (금)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부활절을 앞두고 상자를 하나씩 나눠주며 한 주일 동안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계된 물건을 하나씩 상자속에 넣어 오는 숙제를 주었습니다. 드디어 부활절에 많은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상자를 하나씩 제출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상자속에 나비를 넣어 가지고 왔고, 혹은 꽃을, 어떤 아이는 개미를, 또 다른 아이는 파란 나무 잎사귀를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빈 상자를 들고 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능이 좀 낮은 장애아였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 하질 못하고 생각이 좀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다고 그랬지요? 이 빈 상자는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이예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얘야, 네가 가장 훌륭하게 숙제를 마쳤구나. 정말 잘했다" 그렇게 축하했다고 합니다.
저능아였던 아이도 이 빈 무덤의 비밀을 알았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에 대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주일 새벽에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그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울기 시작합니다(11). 왜 울었을까요? 아직 마리아와 제자들은 슬픈 감정이 앞서다 보니 말씀에 우선되지 못했습니다(9). 이젠 감정적인 신앙에서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귀신들려 고생하며 거리를 방황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에게서도 격리되어 소망없이 살아가던 여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영육간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신앙적으로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남자도 찾기 어려운 무덤을 이른 새벽에 찾아 갔던 것입니다(1). 오늘 현대인에게도 이런 순수한 사랑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만을 생각하고 흘리는 눈물은 있어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는 회개의 눈물도,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흘리는 연민의 눈물도 말라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길은 이 말라버린 눈물샘이 터지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울고 누구를 찾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15).“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찾고 누구를 찾느냐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다른 세상적인 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요14:6). 죽고 장사 지낸바 된 주님이 아니라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결국 그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였습니다(17-18). 신앙은 내가 체험하고 확신한 사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죄와 죽음과 육신적 정신적 질병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고통당하는 저들에게 나아가 부활의 기쁨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 나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나요? 가치있는 것을 위해 울며 기도하십시다. -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고 수정이 필요하면 결단하십시다. -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로 결단하십시다.
사랑의 주 하나님,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주님을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이제는 감정적인 신앙에서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성숙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 만난 그 기쁨과 감격속에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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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의 기독교 희락주의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당신으로 인해 영 광을 받으신다.’ 이는 기독교 희락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짧게 요 약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당신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사실 당신의 행복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을 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이 당신의 행 복으로 더 빛날 것이다.”
존 파이어 저(著) 임신희 역(譯) 《하나님께 놀라다》 (예수전도단, 6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를 가리켜 ‘기독교 희락주의자(기독교 행복주의)’ 라고 합니다.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그분으로 가장 만족해할 때,하나님은 우리 안 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행복과 참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하나님은 가장 크게 영광을 받 으십니다. 즉 하나님 자체를 가장 기뻐하고, 하나님이 주신 가정과 자 연과 느낌을 늘 감사하며 기뻐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영광 받으시는 일 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8:10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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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13-14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언 3:13-14 Blessed is the man who finds wisdom, the man who gains understanding, for she is more profitable than silver and yields better returns than gold. Proverbs 3 :13-14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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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터널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합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김영봉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중에서-
우리는 고통을 만날 때마다 악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악과의 한판 승부를 치러야 합니다. 심지어 악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찾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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