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할 때 기도하고, 분주할 때 예배하고, 힘들 때 찬양하라(사무엘상 7장 5-12절)
11월 26일 (목)
피곤할 때 기도하고, 분주할 때 예배하고, 힘들 때 찬양하라(사무엘상 7장 5-12절)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현대의 사람들은 모두 바쁩니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바쁩니다. 그래서 바쁜 삶 속에서 무언가 정리가 필요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예배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내려놓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이나 가정의 일들을 내려놓으면 티가 나지만, 신앙생활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나하나씩 내려놓을 때 무너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 신앙생활을 내려놔서 이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조차 잃어버렸는데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시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찾은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이방 민족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사무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금식하게 하며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오히려 이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옵니다. 아마 사무엘은 이 사살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무엘은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기로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 사무엘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군사가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패했고, 아무리 적고 힘이 없는 군대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전쟁을 앞에 둔 그 순간에 기도하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언약궤를 다시 보내주신 그 시점에 사무엘은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가나안 땅에 보내셨는지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회복해야 이 전쟁이 승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무리 많은 것이 채워진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의미와 목적,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는지의 해답을 잃어버리면 인생은 한순간에 허무함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게하기 위함임을 기억하고 전쟁을 앞에 두고도 예배와 기도를 선택합니다. 우리가 피곤할수록 기도의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분주할수록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져야 우리에게 오는 축복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채로 받은 복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신앙을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시간을 빼앗기지 맙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세워가는 가장 중요한 근원이라는 믿음을 삶을 통해 선언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 최근에 바쁜 삶 때문에 소흘하게 되었던 신앙생활이 있습니까? - 지금 내가 회복해야 하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결단합시다.
주님! 그 동안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분주해서 예배하지 못하고, 힘들어서 찬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피곤하고, 예배하지 못하니까 분주해지며, 찬양하지 못하니까 힘든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 정말 필요한 영의 양식을 포기하지 않는 하루가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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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John 5:24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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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나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하나님은 어느 시대고 자기의 뜻에 합당한 사람을 부르셔서 사용하셨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30년이 되었을 때 처음과는 달리 교만해졌다. 말씀을 순종치 않았다. 그로 인하여 불레셋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 나라에 기근과 온역이 휩쓸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베들레헴들에서 양치는 소년 다윗을 찾아내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한 세대 모세를 쓰시고, 다음 세대 여호수아를 쓰심같이 이 시대에 나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찾는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한응 목사의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에서-
교회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하나님에 의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영적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뜻에 합당한 사람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찾고 계시며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특별한 사명을 위해 그들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최고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십시오. 할 일 많은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
11월 25일 (수)
인생길에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올 때(사도행전 27장 14-26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오늘 이야기는 사도바울에게 찾아온 인생의 풍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납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가는 뱃길은 2,200km입니다. 당시의 이 거리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그 여정 중에 크레타 섬에 배가 정박했을 때, 많은 선교여행을 통해 뱃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미항에 머물기를 요청하였으나,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을 말을 듣고 배를 띄웁니다. 그 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납니다. 바람이 얼마나 셌는지 14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풍랑을 만난 것은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로마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갔는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더 힘듦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선원들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함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후에 그들을 자신의 믿음을 선언함으로 안심시킵니다.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을 원망하며 비난할 수 있었지만, 그 마음을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용기와 믿음의 말씀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사실 위기의 순간에 밖으로 오는 위험보다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싸움과 분열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은 빛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이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배에 탄 사람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했던 일 중, 중요한 일은 모든 것을 바다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고 남은 모든 식량까지도 바다에 버립니다. 지금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모든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생에 극심한 광풍을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극심한 광풍이 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에 비로소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통해 우리에게 위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우리가 진짜 가치 있는 것과 버려도 되는 것을 구분할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버려도 되는 것들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확신 있기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기에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이 남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크고 작은 풍랑을 통해 정말 중요한 것들을 깨닫고 붙잡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그 가운데 오히려 사명을 발견하여 더욱 굳건히 서는 믿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풍랑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봅시다. -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보고, 사명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주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광풍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광풍 속에서 원망하는 자가 아닌, 바울처럼 다시 사명으로 불타오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서 닥쳐오는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주님과 주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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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저(著) 최익철 역(譯) 《요한 서간 강해》 (분도출판사, 3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거룩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사랑’이라는 해석의 열쇠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함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원하는 대로하십시오!” (Love and then what you will, do! 딜리제 에트 쿼드 비스 팍! Dilige, et quod vis fac!) ‘사랑’ 이 얼마나 고귀하고, 충분한 지, 사랑하면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할 정도겠습니까. 이와 비슷한 말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 해서 사랑을 가리켜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b)
여기서 ‘완성’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프레로마’로서‘충만’이라고 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충만입니다. 즉 사 랑은 율법의 요구를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내용입니다. 다시말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하라’는 율법과 ‘하지 말라’ 는 율법을 저절로 이루게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멋진 삶을 사는 것 같더라도 울리는 꾕과리와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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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13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 16:13 Kings take pleasure in honest lips; they value a man who speaks the truth. Proverbs 16:13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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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선을 행하여야 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 때에 가서 아무리 자신의 형제를 위해 사정해도 소용이 없다. 며칠 전 어느 성도님 장례식을 치루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 아내만 울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 좀 잘 해 줄걸" 하면서 우시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그 때 잘할 걸 해도 시간이 지나면 필요 없다. 우리의 남은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보내시겠는가? -김필곤 목사의 ‘인생의 미래, 어떻게 계획하십니까?’에서-
그 때 전도 많이 할걸, 그 때 선을 많이 행할 걸, 그 때 봉사할 걸, 그 때 이렇게 할 걸, 그 때 시어머니 잘 모실 걸, 그 때 며느리에게 잘 해줄 걸, 그 때 충성할 걸, 그 때 헌금 많이 할 걸, 그 때 열심히 살 걸, 그 때 남편에게 좀 잘해 줄 걸, 그 때 아내를 더 사랑해 줄 것..., 미래는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감사로 받는 시간입니다. 지금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
11월 24일 (화)
말이나 혀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한일서 3장 16-24절)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 성경을 통해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는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변에 힘든 형제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것 정도라면 생각해 볼 텐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 앞에 우리는 서게 됩니다. 아마 아무도 이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나의 성경’에서 빼버리던지, 아니면 비록 내가 지금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이 말을 거룩한 부담감으로 오늘 내 삶의 기도제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요한이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처럼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함과 진실함이 없는 초대교회를 향하여 한탄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말과 혀가 아니라 주의 마음과 심장과 손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도요한이 말씀하는 초점은 “목숨을 버리자.”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은 4장 20절에서 직격탄을 날립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이 이렇게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사랑을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아직 하나님은 잘 모르겠지만, 그 집사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4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그 사랑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나타내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좋지만, 내 주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하는 것은 귀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신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 어렵지만 잠시 멈추어 나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들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예배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신앙의 이기주의가 되어 -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되기 위해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나만을 위한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것이었으며,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서 잠시 멈추어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셔서 사랑을 나누게 하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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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놀라움
“베네통이 그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냐? 는 물음에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은 역시 단 한마디로 ‘호기심’이라고 답했습니다. 호기심! 르네상스를 상정하는 인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 그대로 호기심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이클 갤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생각하는 첫 번째 방법으로 ‘호기심의 발동’을 들었던 겁니다.”
정진홍 저(著) 《사람이 기적이 되는 순간》 (21세기북스, 28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창의성 이론의 대가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또한 호기심이야말로 모든 창의성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호기심’과 비슷한 형제가 바로 ‘놀라움’입니다. 거의 모든 철학 교과서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철학함은 경이(驚異)의 염(念)에서 비롯된다.” 철학함(Philosophieren)은 ‘놀라움’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움’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미 알고있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습니다. 몰랐던 것, 신비한 것을 만날 때 “아!” 하고 감탄합니다. 놀라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놀람에 깨어 알고 싶어져서 “이게 뭐야?” 질문하는 게 철학함의 시작입니다. 호기심과 놀라움은 창의성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영원한 것에 대한 질문과 경외감은 인생을 생명의 길로 이끕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17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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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1: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신명기 31:8 "The LORD himself goes before you and will be with you; he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Do not be afraid; do not be discouraged." 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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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 우리가 때로는 주의 일을 할 때 나름대로 자격 기준을 들어서 스스로 포기할 때가 있다. “예수 믿은 지가 얼마 밖에 안 되는데.. 나는 평신도인데... 아직 남편도 구원시키지 못했는데... 기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자기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자격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내가 예수 믿은 지 제일 오래니까... 나는 남다른 은사를 가졌으니까... 나는 이래 보여도 항존직인데...” 자기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자격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박봉수 목사의 ‘순종을 가로막는 것들’에서-
스스로 나름의 자격 기준을 들어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준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고 모두가 감사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놀라고 또 감사하십시오. 자격 없는 나를 부르시고 자격 없는 나를 귀한 일꾼으로 쓰시는 하나님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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