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법대로 사는 삶이 의로운 삶일까요? (로마서 3장 19-31절)

鶴山 徐 仁 2020. 6. 24. 15:40

06월 24일 (수)

   

법대로 사는 삶이 의로운 삶일까요? (로마서 3장 19-31절)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는 항상 “법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법대로 살았는데, 억울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법에 의해 억울한 삶을 사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정말 법대로 살면 정의가 이루어질까요? 우리 사회는 법을 이용하여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율법이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19절에서처럼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율법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율법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살아가야했습니다.

사실 율법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악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하니까 사람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과는 먼 율법이 되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20절 말씀에 사도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다”라고 말한 이유는, 그 법으로는 언제나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와 ‘사랑’의 가치가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의 표현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정의는 지켜져야 하기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주일에도 노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스스로 쉴 수 없는 사람의 주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의 종을 쉬게 하라. 쉴 수 없는 자들에게 쉼을 주어라.”고 하는 것이 안식일법인데, 배고파서 이삭을 먹는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보며 예수님은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어주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법으로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목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의 신앙의 열심이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정죄감이 들도록 행동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는지 나 자신을 돌이켜 보기 원합니다.

 

주님! 이제 율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말 때문에 정죄감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의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통해 흘러가도록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더 이상 존 웨인이 필요 없는 이유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워싱턴 행정부나 미 군부나 CIA, 그

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도 ‘적’들을 발견해 내기 시작

했으며,미국의 영화제작자들 역시 그와 같은 새로운 인식들을 영화로

만들어 내기 사작했다. 미국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존 웨인 같은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김성곤 저(著) 《김성곤 교수의 영화에세이》 (열음사, 41-4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미국 서부 영화의 영웅 존 웨인의 시대에 싸워야 할 적은 언제나 외부에

있었습니다. 적들은 인디언이나 무법자, 혹은 일본군이나 독일군,

또는 멕시코군이나 월맹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복잡해지고 상

황이 복합적이 되어 감에 따라 미국인들은 차츰 ‘내부의 적’을 발견

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행정부나 미 군부나 CIA,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도 ‘적’들을 발견해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주인공들은 더 이상 존 웨인이나 찰턴 헤스턴처럼 중후한

체격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록 허드슨이나 로버트 테일러처럼 미끈한

얼굴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50년대의 반항아 제임스 딘과, 고뇌하는

지성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등장은 바로 ‘반영웅 시대’의 시작을 알려

주는 한 계기가 되었다.”(42쪽)

지금도 내부의 적을 주제로 영화를 많이 제작하는 것을 보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큰 문제이자 더 큰 아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외부의 적은 세상과 마귀입니다. 그리고 내부의 적은

바로 죄성 가득한 육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은 외부의 적, 내부

의 적과 싸우고 있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신실한 예배와 말씀 묵상 그

리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9)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NIV)

   

사랑을 지키라

주님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고 계시는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나머지 행동 강령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이 있다면

온유한 태도로 그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의 견해에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나와 견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도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내가 사랑하고 축복해야 할

내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찬수의 [오늘을 견뎌라] 중에서-

 

복음은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준비하고자 행복을 찾아 떠났던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던 첫째 아들도,

착함과 나쁨의 방식으로 살았다고 단순히 생각하면 안됩니다.

복음은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탕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을 놓치치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