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 27일 (토)
찬송할지로다 (룻 4:13-22)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14절). <찬양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졌으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이 말을 쓸 때는 <찬양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와 기쁨의 응답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명하게>란 히브리어 <익콰레>로 <부르다, 선포하다>는 의미인데, 이를 수동형으로 <불리워지다, 선포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의미로 많이 불리어진다는 뜻에서 유명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게 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 어느새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자 쏟아진 주변 사람들의 축복과 기원이었습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15절).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17절)고 표현한 것은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계대 결혼>에 의해 낳은 아이므로, 즉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게 될 아이었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룻기는 다윗의 출생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그 막을 내립니다. 다윗의 계보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가문입니다. 주님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었습니다(눅 1:27).
그런데 이토록 빛나는 계보도 실은 이방 여인 룻에 의해 그 혈통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우며 그게 다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한 구속사적 사건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요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전 인류의 하나님이신 만유의 주이심을 찬양합니다(롬 3:29, 갈 3:14).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룻과 보아스의 손자이며 다윗의 아버지로 베들레헴에 거주했고, 여덟 명의 아들과 두 딸을 두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삼상 16:1, 10-11)? -<살몬>(20-21)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 보십시오.
주님, 새롭게 맺어진 보아스와 룻 부부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밝히면서 이 룻기가 끝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 여인, 그것도 과부였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보아스를 만나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조부가 됐습니다. 룻은 본래 저주받은 모압의 딸이었으나 믿음과 효성으로 마침내 다윗의 증조모가 됐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믿음과 구원의 세계에 대한 깊은 신비와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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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개선문은 근현대사의 영예와 치욕이 서린 역사의 현장으로, 그 바로 아래에 설치된 무명용사의 묘에서는 연중 내내 불길이 타오른다. 영웅 들의 업적을 아로새긴 개선문과 무명용사의 묘. 이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균형 감각은 그 사회가 가진 문화적 저력에서 나오는 것이며, 역 사는 강자와 승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준다.”
장희창 저(著) 《고전잡담》(양철불, 16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영웅들의 동상과 묘와 더불어 무명 용사들의 그것이 있 습니다. 역사의 승리를 위해서는 영웅들의 판단력과 예지력이 필요합니 다. 뿐만 아니라 무명용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필요합니다. 어느 하 나에 방점을 둘 수 없이 둘 다 중요합니다. 질병은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질 때 일어납니다. 역사도 영웅과 무명의 균형이 깨질 때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영웅으로 어떤 사람은 무명으로 쓰십니다.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적게 주신 자에게는 적게 찾으십니다. 360명이 360도의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360명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넘버 원(number one)의 세계가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의 세계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길을 달리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1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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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희망을 품고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엎드러지고, 어두운 데에 앉아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그 백성을 징계하며 연단시키신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9).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복된 희망을 품고 실패와 어둠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곧 진솔한 회개의 고백이며 대적의 조롱을 물리치는 참된 승리의 능력이 되었다. -송기성 목사의 ‘복된 희망은 참된 능력이다’에서-
하나님의 백성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대적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복된 희망을 품고 회개하는 사람은 실패와 어둠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광명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줄 수 있기까지 그 복된 희망이 승리의 참된 능력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
06월 26일 (금)
너희가 증인이라 (룻 4:7-12)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8절). 여기서 <신을 벗는> 행위란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거나 양도한다는 뜻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즉 신발은 직접 땅을 밟을 수 있는 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벗어 상대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그 땅을 양도하거나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땅을 구입한 자는 자신의 소유권을 확인하는 의식으로 산 땅을 직접 자신의 발로 밟는 공증 절차를 치르기도 했습니다(신 25:9).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10절). 이것은 보아스가 룻을 합법적으로 인신매매했다는 뜻이 아니라 기업을 무를 때에 정당한 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계대결혼의 의무까지도 온전히 이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보아스의 기업 무름을 통해 룻까지도 계대결혼을 하게 됐고, 그 사실에 대한 증인이 10명의 장로들이며, 또 성문에서 그 현장을 지켜본 당시 그 성읍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증인들이 보아스와 룻 부부를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11절). <라헬과 레아>는 족장 야곱의 아내로서 이스라엘 12지파를 형성한 12아들의 어머니입니다. 따라서 장로들과 백성들이 룻 역시도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아 그렇게 자녀들의 번성은 물론 라헬과 레아와 같은 믿음의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축복하고 기원한 것입니다.
방황과 고통의 시간은 견디기 힘들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는 은총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보아스에게도, 룻에게도 아니, 나오미에게도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도저히 얻을 수 없을 뻔한 아름답고도 새로운 삶이 주어졌습니다.
-본문 11절에 나오는 <에브랏>은 어느 성읍의 옛 이름일까요(창 48:7)? -<유다에게 베레스를 낳아준>(12절) <다말>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야곱의 12아들을 적어 보십시오(창 30:1-13)
주님, 마침내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고 또 룻도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정당하고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많은 증인들을 세웠기에 그만큼 더 복되고 아름다웠습니다. 목적이 소중한 만큼 그 과정도 건전하고 아름다워야 함을 거듭 깨닫습니다. 따라서 증인들도 백성들도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원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보아스에게서, 또 나오미와 룻에게서 믿음의 올바른 처신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배울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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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1982년 중남미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워싱턴 대학에 초청을 받았다. 그때 그가 내건 요구 조건은 마크 트웨인의 고향인 해니벌에 잠시 들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중략). 그래서 이들은 강변으로 나갔고, 보르헤스는 그곳의 조약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흐르는 강물에 자기 손 가락을 담갔다. 그리고 말했다. ‘자, 이제 여행은 끝났습니다.’”
고미숙 저(著) 《고미숙의 로드클래식》 (북드라망, 21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당시 거의 시력을 잃어 가던 중남미 문학의 거장 보르헤스는 미국 워 싱턴 대학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보르헤스는 미시시피 강을 가고 싶었 습니다. 그는 박물관의 학예사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미시시피 강이야말로 마크 트웨인이 지닌 힘의 원천입니다. 그 강을 한 번 만져 보고 싶군요.” 벤야민은 논문에서 ‘아우라(Aura)’라는 귀한 개념을 말합니다. ‘아우라’란, “여기 그리고 지금”에 있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풍 경, 그 느낌입니다. 몸, 마음 상태, 시간, 기후, 습도, 채광, 바람의 세기 등 온 몸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감흥을 의미합니다.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운 산, 매혹적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 밑에서 쉬고 있는 한 노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뺨에 와 부서지는 햇살, 상 큼한 풀내음, 나뭇잎 사이로 지나는 바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이 지금 여기서만 느끼는 생생한 느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 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사진 촬영을 하거나 그림을 그렸다고 합시다. 그 사진과 그림에서 그 노인이 느꼈던 생생한 아우라를 느낄 수가 있 을까요? 그 생생함은 당연히 반감됩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느끼는 성령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재난 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송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분명 차선책이지 최선은 아닙니다. 어서 현장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 기를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 니라.” (요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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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But the Lord is faithful, and he will strengthen and protect you from the evil one.(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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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씨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다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씨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다합니다. "하루에 1만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개를 건네주자 기이치씨는 손을 내밀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강성찬 목사의 ‘추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에서-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감사로 기적을 이루며 감사로 행복을 가꾸십시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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