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북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이끈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방한했을 때, 그의 앞뒤에는 선글라스를 낀 양복차림의 건장한 남성들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그들은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황병서가 우리 측 인사들과 회담하고 인천공항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의 옆을 지켰다.
2인자 용납 않는 수령 절대주의서 경호의 의미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대표단이 자체 경호원의 경호를 받는 모습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얘기한다. 그동안 한국을 방문한 북한 인사가 자체 경호를 받은 전례가 없다.
북한 소식 전문매체 뉴포커스의 장진성 대표는 “황병서에 대한 경호는 북한의 수령절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거나 북한에서 수령절대주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고 풀이했다. 사실 권력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북한에서는 수령인 김정은 이외에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호위를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전문가들 역시 대체로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고 했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예전에 장성택이 수령만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하다가 호되게 혼난 적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 지도부가 수령절대주의와 관련해 좀 더 유연한 자세를 갖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 하에선 북한 간부들이 수령에 대한 충성 과시를 하기 위해서라도 경호원 배치를 반대했겠지만, 현재는 이런 부분이 조금 약화됐다는 것이다.
군복 입고 거리 활보한 황병서
이처럼 수령절대주의가 약화되고 김정은의 리더십도 예전만 못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북한의 2인자라 불리는 황병서가 군복을 입고 온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진성 대표는 “북한 형편상 평화에 대한 협박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중요 카드이기 때문에 북한은 그간 남북관계에서 군사대표단 파견을 극도로 절제해 왔다”며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명분으로 일반 군 장성도 아닌 최고위 총정치국장이 왔다는 것은 대남관계에서 엄격히 준수했던 민과 군의 이중전략 리듬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라고 풀이했다. 김일성·김정일 체제에 굳건했던 대남전략이 조금씩 파열음을 내고 있다는 뜻이다.
황병서와 최룡해가 김정은의 건강에 대해 가타부타 확인을 해준 것 자체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김정은의 건강이상설 등에 대한 질문을 하자 괜찮다고 대답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를 최고 존엄 모독에 해당한다며 펄쩍 뛸 발언이었다. 일각에선 이를 당 조직지도부에 그만큼 힘이 실려 있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
건강 이상설에 관한 대화 역시 류길재 장관이 북한의 보도를 인용하는 식으로 북한 대표단에 말을 건넸기 때문에 자연스런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의견이다. 또한 김정은이 황병서와 최룡해를 같이 내려 보낸 것은 2인자 그룹에 여러 명을 두고 어느 한 사람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는 해석도 있다.
CNN, 북한의 실제적 리더는 김정은인가
한편, 미국의 CNN은 북한의 고위급 인사 방한과 황병서의 행적으로 미뤄볼 때 최근 북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보도를 내놨다. 이들은 6일 보도에서 장진성 대표, 조나단 폴락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 CNA연구소 출신 켄 가우스의 인터뷰를 통해 ‘누가 북한을 통치하는가(Who controls the government)’라는 주제를 던졌다.
장 대표와 켄 가우스는 북한은 수령뿐 아니라 특권층도 세습되는 구조라며 김정은과 조직지도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북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이번 방한 요인과 최근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 등을 참고할 때 북한 수령독재 체제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