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원각사지 십층석탑 (한자 명칭 :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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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일: 1962.12.20
-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탑
- 시대: 조선 시대
-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탑골공원 內)
문화재청 설명
이 탑은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 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 ▲폐허에 10층 탑만 남아있는 사진.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 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 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圓覺寺) 터
원각사는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세조 11년(1465)에 흥복사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로 조선 시대 도성 안의 3대 사찰로 손꼽혔다. 원래는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태종의 억불정책으로 없어졌다가 세조가 다시 원각사를 창건한 것이며 당시 원각사는 구리 5만 근으로 주조한 대종(大鐘. 現 보신각종)과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 그리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나누어 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십층석탑 등이 유명하였는데 그 십층석탑이 지금의 국보 2호이다.
- ▲현재 탑골공원. 앞에 출입문인 삼일문이 보이고 마당 뒤쪽에 팔각정과 네모진 보호각이 보이는데
- 보호각 안에 10층 탑이 있다.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병을 고치기 위해 금강산 진주담에 갔다가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다. 세조는 문수보살로부터 “조카에 대한 죄를 갚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찰을 지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와 원각사를 창건하였으며 이후 세조의 피부병도 호전되고 나라도 안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보호각이 세워지기 전의 십층탑 사진(출처 문화재청).
조선 시대 숭유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보호 속에 원찰로서 오랫동안 번성하였으나 성종대부터 강화된 억불정책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연산군 10년(1504) 마침내 폐사되고 마는데 연산군은 이곳에 궁중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옮겼다가 그마저도 이름을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쳐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도록 했으니, 사찰이 임금의 유흥을 위한 기생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뒤에는 3년쯤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었으며 중종 9년(1514)에는 건물의 재목을 여러 공용건물 보수에
사용해버림으로써 원각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 자리에는 탑과 비만 남게
되었다.
탑골공원
탑골공원은 원각사가 폐사되고 탑과 비만 남았던 자리에
들어선 서울에서의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사바틴 설계로 세워진 인천 자유공원보다 약 9년쯤 늦은 1897년에 총세무사로 근무하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세워졌으며, 이때 팔각정도 함께 지었는데 초기에는 황실 공원으로 제실, 음악 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나,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며 1919년 삼일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였던 곳이다.
그런데 왜 탑골공원이라 부르는가? 탑(塔)이란 산스크리트어 stupa, 팔리어 thupa의 음사인 탑파(塔婆)의
준말로, 공양하고 예배하기 위해 일정한 형식에 따라 흙, 벽돌, 나무, 돌 등을 높게 쌓은 구조물을 말하는데 원래는 부처의 유골을 안치한 그
구조물을 탑이라 하고, 그것을 안치하지 않은 것을 지제(산스크리트어 caitya)라고 하였으나, 보통 구별하지 않고 모두 탑이라고 한다.
- ▲구한말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메모. 아래 중앙 Public Park라고 쓴 곳이 탑골공원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탑파(塔婆)나 탑 모양으로 높이 지은 불교 사원을 pagoda(파고다)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는 이 공원을 파고다 공원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992년에 이곳 옛 지명을 따라 탑골공원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삼일문 현판
- ▲떼었다 붙였다 파란 많았던 파고다 공원 출입문의 '삼일문' 현판.
원래 탑골공원 삼일문에는 광복 직후 서예가 김충현 씨가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을 달았다. 그러나
2001년 '3·1 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에 일본군 장교 출신이 쓴 현판을 걸 수 없다'며 뜯어냈으며, 이에 서울시 종로구는 그동안 서울시 및
문화재청과 현판 재설치에 관해 협의하여 2003년 2월 가로 1.2m, 세로 0.9m로 기존 것과 동일한 크기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현판의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는 독립 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사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는 다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었다.
십층석탑 (국보 제2호)
우리나라 석탑 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탑이다. 1348년에 세워진 경천사 터 십층석탑(現 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세워져
있음)과 층수, 형태, 크기, 재료, 세부조각에 이르기까지 매우 흡사하여 아마도 이 탑을 범본으로 만들어진 듯하며, 재료는 흔히 쓰이는 화강암이
아니라 회백색 대리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라져 없는 상태이며, 사실 위로부터 3개 층도 언젠가부터 땅에 놓여 있었는데 1946년 미군 공병대에
의하여 지금 상태로 복구된 것이라고 한다.
높이 12m의 탑은 흔히 보는 이중기단이 아닌 삼중기단이며 각 단의 폭과 높이가
동일하다. 평면 또한 큰 십자형의 한가운데 작은 정사각형을 겹쳐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각 단의 면석에는 온갖 동식물과 인물상을 빈틈없이
현란하게 조각하였으며 갑석에도 아래위로 연꽃 받침을 돌리고 당초무늬를 빠짐없이 수놓았다. 제일 위층 기단부는 난간 무늬를 돌려 아래 두 층의
기단과 구분하면서 탑신부를 받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 ▲유리 보호각 속의 원각사 터 십층석탑. 보기도 불편하고 어른거리고 비치는 현상으로 사진 찍기도 힘들다.
- ▲유리 보호각 속의 원각사 터 십층석탑. 보기도 불편하고 어른거리고 비치는 현상으로 사진찍기도 힘들다.
탑신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1층부터 3층까지는 평면이 기단과 동일한 아(亞)자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4층부터 10층까지는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일반 석탑의 경우와 같다. 3층까지는 몸돌과 지붕돌의 폭이 일정한 비율로 체감하다가 4층에서 급격하게 줄어든 후 다시 밋밋한 체감을
보인다. 몸돌 가장 넓은 면마다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제자를 거느리고 설법하는 장면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돼 있으며, 면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을 조각하였다.
- ▲판박이처럼 닮은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국보 제86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 실내에 있어 살펴보기 용이하다.
지붕들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서 기왓골이나 마루, 추녀는 물론 공포의 작은 부재들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원각사 터 십층석탑은 아마도 조선은 물론 우리나라를 통틀어서 가장 우수한 석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대형 철골조에 유리 보호각을 씌워놓아서 자세히 살필 수 없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