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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한양답사] [8] 오간수문, 이간수문/ 시니어조선매거진

鶴山 徐 仁 2014. 8. 24. 22:46

[걸어서 한양답사] [8] 오간수문, 이간수문

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입력 : 2014.08.22 10:10 / 수정 : 2014.08.22 10:10

지난번에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 동묘(東廟)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정확히 말하면 동대문 밖, 그러니까 한양의 사대문 밖이기에 다시 발길을 돌려 동대문 안으로 들어와 본다. 한양 4대 문중 동쪽에 있다 하여 동대문(東大門)이라 부르지만, 정식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한양의 사대문 이름을 지을 때 유교의 오상(五常), 즉 다섯 가지 품성인 인, 의, 예, 지, 신(仁, 義, 禮, 知, 信)을 동서남북으로 배열하여 각각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고 중앙에 해당하는 종로의 종각을 보신각(普信閣)이라 이름 지었다. (북쪽은 知에 해당하나 꾀를 뜻하는 靖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중 흥인지문(興仁之門)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지 않고 지(之) 자를 넣은 것은 법궁 경복궁을 기점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地勢)가 서로 걸맞게 흘러내려야 하는데 우백호에 해당하는 낙산 줄기가 좌청룡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하여 약하였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풍수지리상의 이유라고 한다.


동대문 옆 다리 오간수교(五間水橋)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이 국보 1호인데 비하여 보물 1호이다. 보물로써 동대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동대문 옆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원래 동대문 좌측 낙산 줄기를 따라 한양성곽이 내려와 동대문과 연결되고, 다시 동대문에서 청계천을 건너 광희문까지 성곽이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현재 이곳은 성곽을 찾아보기가 어렵도록 동대문상가와 최근 완성된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들어서 있어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과 쇼핑객들은 이 지역에 한양성곽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동대문에서 청계천을 건너가는 다리가 '오간수교(五間水橋)'인데 오간수교가 무슨 뜻인지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자로 五間水橋(오간수교)라고 씌어있어도 그 뜻이 아리송할 텐데 한글로 오간수교라고 써놓으니 짐작하기도 어렵다. 즉, 이곳에는 원래 다섯 개의 수문인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다리를 놓아 오간수교라고 한 것이다.

오간수교뿐 아니라 청계천에 걸쳐진 22개 다리 대부분이 모전교, 광통교, 수표교, 마전교, 영도교 하는 식의 이름을 가졌으니 그 뜻을 알기도 어렵거니와 그에 얽힌 유래나 옛일을 알기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한자사용의 필요성도 함께 대두하는 부분이다.

▲오간수교는 청계천에 걸린 22개 다리 중 중심부로부터 14번째 다리로 흥인지문 옆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오간수교는 난간을 성곽 모양으로 하여 이곳이 성곽이 지나가는 곳임을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알지 못한다. 하물며 이곳에 다섯 개의 수문, 즉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는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다.
오간수문(五間水門)

도성 한양에 성곽을 둘러쌓고 사대문과 4소문을 내어 출입토록 하였는데, 그중 가장 어려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즉,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를 성곽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이곳은 한양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이었으며 청계천이 흘러나가는 커다란 물줄기가 있으니 산(山)에 성을 쌓기는 그래도 쉬웠으나 물(水)에 성을 쌓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이곳에는 수문(水門)을 내어 물이 흐르게 하고 그 위로 성곽을 얹어 연결하기로 하였다.

▲헐리기 전의 오간수문. 다섯 개의 아치형 수문이 청계천을 가로질러 세워졌고 그 위로는 성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수문 안쪽으로 낮게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가게 하였다.
그러면 이 오간수문은 언제 헐려져 없어졌는가? 오간수문 주변은 조선 시대 군사 관련 시설인 '하도감' '염초' '훈련원'등이 있었는데 하도감은 수도를 방위하고 왕의 안전을 담당하던 곳이며 염초청은 화약을 제조했던 곳이다. 훈련원은 병사들 교육을 하는 관청으로 오늘날 군사학교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구한말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이곳도 빠르게 변화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자 하도감은 해체되었으며, 그 자리는 별기군이 훈련하게 되어 사람들은 이 부대를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대의 습격으로 교관 호리모도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이곳 하도감 훈련장에서 살해되었으며,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들이 이곳에 진을 쳤고, 갑신정변 당시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이곳에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에는 '훈련원 공원'이란 이름으로 운동장으로 만들었고 1919년에는 고종황제 영결식이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으며, 마침내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일제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한양도성을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을 다 헐어버리려 하였으며 그 결과 서대문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동대문과 남대문은 다행히 헐리지 않고 살아남기는 하였으나 좌우로 이어지는 성곽들을 헐어버려 도심 가운데 외딴섬처럼 덩그렇게 남아버렸다. 그런데 동대문과 남대문이 헐리지 않고 남게 된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통하여 한양으로 입성한 전승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서울의 성곽을 헐어내고 사대문 4 소문을 훼손하던 일제는 1920년대 초반부터 훈련원공원 자리에 운동장을 만들 구상을 하게 되는데 1924년 당시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이 발표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사업이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흥인지문 양쪽 성곽과 청계천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훈련도감과 하도감을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경성운동장'을 만들었으니 그날이 1925년 10월 15일이다. 이렇게 하여 오간수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오간수문의 유구들은 현재 성동구 어디쯤 부실하게(?) 보관 중이라는데 자꾸 망실되기 전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면 싶다.

▲현재의 오간수교 옆에 재현해놓은 오간수문. 그러나 물길을 막지 못하고 벽면에 모양으로 만든 이벤트에 불과하다.
동대문운동장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 되었으며 5~60년대에는 정치동원행사가 많았으나 1960년대 후반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통하여 경기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며 당시 고교야구나 박스컵 축구대회 등이 이곳에서 벌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86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위한 잠실운동장이 1984년 개장하면서 이름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고 아마추어와 학생들 운동장으로 역할이 바뀐 가운데 2003년에는 축구장이 폐쇄되고 풍물시장이 들어서는 등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 후 도시변화의 빠른 속도와 함께 2007년 겨울을 기점으로 동대문 운동장은 철거되고 오랜 기간 공사를 거쳐 마침내 2014년 3월에는 거대한 우주선을 닮은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들어서 서울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주변에는 화려한 쇼핑 타운이 환하게 밤을 밝히며 지새우는 동대문 일대에서 이제 더는 오간수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헐리기 전의 동대문 운동장(축소모형), 축구장, 야구장과 부속시설들이 보인다.
      ▲그 자리에 들어선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옛 동대문 운동장 야간조명탑 2개는 살려놓았다.
이간수문(二間水門)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DDP를 짓는 과정에서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곳이 조선 시대 군사시설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유물이 나왔으며, 오간수문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이간수문이 발굴되어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사와 병행, 이를 복원하여 놓았다. 즉, 동대문 옆으로는 청계천 물줄기에 설치한 오간수문과 함께 남산-장충동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이간수문이 있었던 것이다.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안쪽에 복원된 이간수문, 윗부분이 성곽구조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옆으로 광희문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성곽을 함께 복원하였는데 역시 성곽을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였다.
          ▲당시 한양지도를 보면 동대문 옆으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소문 광희문(光熙門)

동대문에서 오간수문, 이간수문을 이어지는 성곽은 곧 동소문인 광희문(光熙門)으로 이어진다. 이 광희문은 오간수문, 이간수문이 있어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하여 나갔으므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하였다.

          ▲광희문 앞과 뒤, 아직 성곽이 온전하게 복원·연결되지는 못한 상태이다.
또 다른 수문(水門)

오간수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가까이 있는 이간수문을 복원해놓아 그 모양을 상상하는데 참고가 된다. 오간수교 옆 벽면에 만들어놓은 오간수문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역사적 고증도 부실해서 실패작으로 보인다. 인도교 수준으로라도 청계천을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제대로 된 오간수문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자하문 밖, 상명대학교 앞에 있는 탕춘대성의 일부. 오간수문과 홍지문이 한양성곽과 북한산성을 이어준다.
그런데 서울에 또 하나의 오간수문이 있다. 바로 한양 북쪽 북한산성과 한양성곽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에 있는 홍지문(弘智門) 옆에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오간수문이 있다. 이 역시 복원한 것이겠지만 다섯 개의 홍예 모양 수문과 그 위에는 성곽을 온전하게 살려놓았고, 홍제천을 실제로 흘러가는 중이다.

          ▲수원 화성의 북수문 화홍문(華紅門). 7개의 수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에도 정조 때에 세운 수문(水門)이 남아있다. 화성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2개의 수문을 세웠는데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7개 쌓은 후에 멋들어진 누각을 올렸으며 아래로 물이 통과하는 수문에는 쇠창살을 설치하여 무단통과를 차단하였다. 이 북수문은 화홍문(華紅門)이라는 예쁜 이름을 받았으며, 7개의 수문 그러니까 칠간수문(七間水門)인 셈인데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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